논평

후쿠시마를 겪고도 녹색당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개마두리 2012. 4. 10. 09:26

 

- [기고] 투표 통해 탈핵 의제 지켜내야

 

- 서형원(과천시의회 의원, 녹색당원)

 

- 기사입력 : 2012-04-10

 

투표일을 이틀 남겨놨습니다. 녹색당을 세우자고 처음 마음먹었던 때를 떠올립니다. 불과 여덟 달 전입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후쿠시마 핵사고로 독일에서 25만 명이 탈핵 시위에 나섰는데 바로 옆의 우리나라에는 어떻게 1000명도 모이지 않느냐고. 안 될 거야, 하는 마음이 제 마음을 먼저 차지해버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어떤 행사에서 한 청중이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위험과 환경에 무감각한 우리 사회에 절망한다." 그 때 알았습니다. 후쿠시마보다, 고리1호기보다 사람들을 더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행동해야 했습니다. 후쿠시마 이후 25만 명의 독일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던 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똑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탈핵은 그들이 얻어낸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독일녹색당이 오랜 싸움을 통해 얻어낸 탈핵의 약속을 메르켈 보수정부가 뒤집었고 독일 시민들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고자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핵에 저항한 주민들이 있었지만 정말 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상상을 떠올려보지 못했습니다.

 

작년 9월, 2030년까지 탈핵하자는 법안을 만들어 처음 토론회를 열던 날, 지금 영덕 신규핵발전소 부지의 녹색당 후보로 뛰고 있는 농민 박혜령 씨가 발언하며 울더군요. 말은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전 느꼈습니다. 혹시나 하고 달려왔지만 듬성듬성 자리가 빈 그 토론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긴 어려웠던 겁니다. 몹시 괴로운 자리였습니다.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녹색당은 원전으로 괴롭힘 당하는 주민들에게 탈핵의 짐을 떠넘기지 않을 겁니다. 전기를 쓰는 우리들, 도시 사람들이 이 짐을 떠안도록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늘 마음속에 있던 말이지만, 여전히 자신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 이번 총선에 출마한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들. 왼쪽부터 정정화, 유영훈, 이유진 후보. ⓒ녹색당

 

그리고 여덟 달을 지내며 저는 변화의 속도에 놀라고 있습니다.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셀 수 없는 탈핵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생협, 성당, 교회, 풀뿌리 시민단체들마다 탈핵 강좌를 열고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갔습니다. 하승수 녹색당 사무처장은 한겨울 광화문에서 100일간의 탈핵 1인 시위를 이어갔고,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서 탈핵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제일 서명받기 힘든 것이 핵문제라고 푸념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원전 1기 분량의 전기를 줄이겠다고 천명한데 이어, 45개 지방자치단체들이 탈핵 선언을 했습니다. 서너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입니다. 전기소비자들이 고리1호기에 대해 불안해하며 발언하기 시작했고, 온라인에선 핵발전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탈핵을 첫 번째 과제로 천명한 녹색당이 불가능해보이던 창당을 이뤄내고, 종교계, 지식인, 풀뿌리 활동가와 시민들로부터 탈핵을 위한 녹색당 지지선언이 줄 잇고 있습니다.

 

이제 저와 동료들은 탈핵을 위해 핵발전소 지역의 주민들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주민들이 도시에 와서 탈핵의 절박성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녹색당원들이 영덕으로, 울진으로, 고리로 달려가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박혜령 후보는 지금도 울보입니다. 선거 내내 울고 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눈물이 아프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절실함이 담긴 눈물이지만, 외로움이 아닌 결의와 단호함의 눈물이라 느낍니다. 이제야 저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그의 동료가 됐습니다. 탈핵의 목소리는 수많은 동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냉혹합니다.

 

녹색당의 끈질긴 탈핵활동이 끊임없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유력한 지식인들과 칼럼니스트들이 핵에 대한 입장이 투표의 새로운 잣대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하고 있습니다. 낡고 위태로운 고리1호기 핵발전소의 사고은폐가 드러났고, 새누리당은 비례1번으로 핵과학자를 선정했습니다. 야권연대를 자칭하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정책합의에서 핵은 사라졌고, 그 짐은 녹색당의 비례1번 탈핵후보와 핵발전소 지역의 두 후보에게 떠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정치면의 선거보도는 여전히 새누리당과 민주통합의 다툼으로만 도배되고 있습니다. 탈핵은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아직 정치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총선은 정권심판이니 진보정당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니 하는 구호로 치러지고 있지만 그보다 당리당략과 세력다툼이 더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일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민주통합당 공천에서 4대강, FTA 후보들이 낙마한 것입니다. 탈핵은커녕 환경후보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통합진보당이, 녹색당 후보가 이미 출마한 핵발전소 지역 두 곳에 뒤늦게 출마한 민주통합당 후보들에게 야권단일후보라는 간판을 달아 준 것입니다. 그 중 한분은 심지어 찬핵인사입니다. 기회 있을 때 나도 탈핵이라고 말하는 통합진보당이 한 일입니다. 자기 입으로 한 말을 명백히 뒤집은 일들이지만 두 당을 비난해봐야 남는 것이 없습니다.

 

녹색당은 사실 탈핵의 정당이 아닙니다. 소외되는 소수자와 억압받는 생명이 없는 세상, 다양성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회복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녹색당의 지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절박한 과제는 핵의 위협에서 벗어날 희망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후쿠시마 핵참사 후 첫 선거에서 녹색당 하나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탈핵을 정치의 수많은 기준 중 하나로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 5%의 시민들에게 호소합니다. 후쿠시마 핵참사보다 더 우리를 힘들게 하던 희망 없음의 상태로 우리 자신을 되돌리지 말자고. 4.11 선거를 통해 탈핵을, 작지만 분명히 커나갈 정치의 잣대로 만들어내자고.

 

*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409161239§ion=01

 

(<프레시안>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