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모순들

"공주의 '허황된 꿈'은 그들에게 감동이 아니라 모욕"

개마두리 2012. 4. 13. 07:59

 

- 2012/04/12

 

- [인터뷰] 장애인이동권 투쟁 역사 담은 <버스를 타자> 박종필 감독

 

- 박장준 기자(weshe@mediatoday.co.kr)

 

장애인미디어운동.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자막이나 화면해설, 수화방송을 늘려달라는 요구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운동은 정보격차 해소 운동이 아니다. 혹자는 장애인의 시선에서 비장애중심적 미디어를 비평하는 것 아니냐는 정도까지 나간다. 그러나 이것도 이 운동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장애인미디어운동은 2001년 장애인의 문제를 장애인 스스로 해결하려는 진보적 장애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장애인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미디어의 주체가 되자는 것이 목적이다.

 

미디어오늘이 7일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열린 대학로 CGV 무비꼴라주에서 박종필 감독을 만났다. 박 감독은 1999년 에바다학교의 인권침해를 계기로 14년째 꾸준히 장애인 다큐멘터리를 찍어왔다.

 

저상버스 도입의 계기가 된 2001년 장애인이동권 투쟁의 역사를 담은 <버스를 타자>(2002), 장애인야학 깊숙이 들어가 장애인교육권 현실을 관찰한 <노들바람>(2003), <시설장애인의 역습>(2010)이 대표적이다. 그는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를 2003년부터 주도했고, 현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다큐인’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민방송 RTV에서 <나는 장애인이다>를 제작하기도 했다.

 

박종필 장애인 다큐멘터리 감독

 

“2002년 미디액트가 생기면서 미디어교육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장애인, 이주민, 여성, 아동, 노인이 미디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를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교육의 시작은 ‘미디어 비판적 읽기’다. 박종필 감독은 기성 미디어가 장애인을 재현하는 방식을 “불쌍, 극복, 따뜻한 사회”로 정리했다.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거나, 장애를 극복한 수기를 인간극장 형식으로 편집해 ARS로 성금을 모으는 방송이 대부분이라는 것. 박 감독은 “이런 행태가 비장애인뿐 아니라 장애인의 삶을 부정하고 사회와 더 단절시킨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이런 미디어를 부정하고 장애인이 직접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운동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박종필 감독은 비장애중심적 미디어에 대한 부정을 장애인이 전면에 등장한 영화까지 확대했다. 그는 제주인권영화제 상영작인 <핑크 팰리스>(2005) 또한 “감독이 여성의 권리와 충돌하는 ‘성매매’를 방관해 간접적으로 돕고 장애인의 성적 욕망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이창동 감독 <오아시스>(2002)에 이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소개된 이 작품에 대해 박 감독은 “공주(문소리 분)가 일어나길 바라는 비장애인의 욕망이 비현실적으로 투영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장애인도 그런 꿈을 꾸지만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허황된 꿈’”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영화를 본 많은 장애여성들이 불쾌해했다”며 말을 이었다. 박종필 감독은 “자신을 성폭행한 비장애인 남성을 사랑하는 ‘공주’의 모습에서 장애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장애여성이 성적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 존재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현재 운동은 ‘장애인도 영화보자’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만만치 않다. 박종필 감독에 따르면 상업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도 화면해설과 자막을 함께 넣지만 배급사와 극장에서는 ‘비장애인 시청권 배려’를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그는 “장애인 문제를 다룬 <도가니>조차 자막을 함께 내보낸 극장은 많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박 감독은 자막이 비장애인의 관람에 방해가 된다고 인정하면서도 “장애인이 관람할 수 있는 시간대와 횟수를 제도로 정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디지털로 정보가 유통되면서 늘어나는 정보격차를 줄이는 것도 운동의 과제다. 박종필 감독은 TV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로 들며 “디지털 정보는 장애친화적으로 변환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며 “정책으로 만들어 규제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이 아날로그로 나오는 아파트단지의 안내방송은 듣지 못하지만 디지털로 음성을 문자로 바꾼다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 비판적 읽기에서 시작한 장애인미디어운동은 현재 영상 제작에서 연극, 노래까지 다양하다. 극단 ‘판’은 장애인이 직접 자신의 문제를 연극으로 풀어내고 있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시선’도 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미디어운동을 돕는 경우도 꽤 있다. 미디어센터에서 미디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푸른 영상’은 3년 넘게 서울 봉천동에 있는 ‘함께 하는 세상’의 지적 장애인에게 영상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박종필 감독은 세련되지 않더라도 장애인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를 갈음하며 이같이 말했다.

 

“<달팽이의 별>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공부도 많이 했고 자신의 불만을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장애인이 대부분입니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장애인이 직접 자신의 삶을 말할 때 울림을 준다고 생각해요. 12년 동안 시설에서 생활하다 탈출한 한 장애인이 제게 가장 싫고 끔찍한 음식을 얘기해줬어요. ‘미역국’이라고. 이런 표현을 장애인이 직접 하고, 비장애인이 연대하는 게 장애인미디어운동입니다.”

 

- 입력 : 201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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