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차는 달 기우는 달

개마두리 2012. 10. 2. 11:45

한번은 아크바르 대제(大帝)가 비르발에게 밀명(密命 : 몰래 내린 명령 - 옮긴이)을 주어 카불(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수도)로 보냈다. 비르발은 사람들 속에 몰래 섞여 들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눈에 띄고 말았다.

 

“난 저 자가 의심스러워! 아무래도 수상한 사람이란 말이야.”

 

“평범한 척하지만 저 자는 틀림없이 외부인이야.”

 

“그래, 첩자일거야. 가서 임금님께 말씀드리자.”

 

카불의 왕은 이 수상한 자를 데려오게 했다.

 

“너는 누구냐? 사실대로 말하라. 여기엔 무엇 하러 왔느냐?”

 

“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여러 나라들을 거쳐서 여행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 그대는 그토록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아왔으니 과인의 왕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 보라.”

 

비르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마치 보름달과도 같습니다. 어떤 달도 보름달의 찬란한 빛에는 비길 수가 없지요.”

 

왕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 나라의 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 그 분요! 그 분은 가냘프고 약한 초승달이시죠.”

 

“그대가 과인을 기쁘게 했도다. 금일봉(金一封. 종이에 싸서 봉한 돈 - 옮긴이)을 하사하노라.”

 

“전하,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는 정말 관대하십니다.”

 

그 뒤 비르발은 델리(오늘날의 ‘뉴델리’시. 당시 무굴 제국의 수도였다. ‘뉴델리’는 ‘새로운(영어로 New) 델리’라는 뜻이다 - 옮긴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에 관한 소문도 함께 와서, 그보다 먼저 궁중에 도착했다.

 

“후세인 칸, 말해 보게. 승상에 관한 어떤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겐가?”

 

“예, 폐하. 승상이 지난 달에 카불로 간 것을 아시지요?”

 

“그야 짐이 보냈지. 그런데?”

 

“그런데 승상이 그 나라 왕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가?”

 

“그는 폐하 앞에서는 폐하께 충성하는 척하지만 카불의 왕 앞에서는, 폐하는 초생달인 데 반해 카불의 왕은 보름달과도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내일 짐이 그를 직접 문초하겠노라!”

 

다음날, 아크바르 대제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비르발을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승상, 경에게 중죄(重罪. ‘무거운 죄’, 그러니까 ‘큰 죄’라는 뜻 - 옮긴이)를 묻겠노라.”

 

“폐하, 소신(小臣. ‘작은 신하’라는 뜻. 벼슬아치가 임금에게 자신을 낮추어서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에게요? 소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씀이옵니까?”

 

“짐은 경이 카불의 왕에게 아첨하려고 짐을 깎아내렸다는 말을 들었노라.”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하라. 경은 짐을 초승달에 빗대고 카불의 왕을 보름달에 빗대지 않았던가?”

 

“폐하, 그건 사실이옵니다.”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했는고, 승상! 경은 짐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비교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름달은 그 크기와 빛이 기울게 되어 있는 운명임을 모르시나이까? 앞날이 약속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초승달입니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도 모두 음력 초이틀을 기리지 않습니까(무슬림들은 고려왕조나 조선왕조 사람들처럼 음력을 쓴다 - 옮긴이)?”

 

대체는 그 말을 들은 뒤에야 화를 풀었다.

 

“경을 의심하기보다는 좀 더 깊이 이해했어야 하는 것을! 경이 또 이겼소.”

 

* 출처 :『비르발 아니면 누가 그런 생각을 해』(이균형 엮음, 정택영 그림, 정신세계사 펴냄, 서기 2004년)

 

* 옮긴이의 말 :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역사책에 나온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기 660년 6월(양력), 한 귀신이 남부여(백제가 망할 당시의 이름)의 궁궐 안에 들어와 크게 부르짖은 뒤 땅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의자왕(성이 부여夫餘, 그러니까 여餘씨고 이름은 의자義慈임. 그가 다스릴 때 나라가 망해서 시호가 없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땅을 파 보았다. 땅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 거북의 등에는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었더니, 무당은 “보름달 같다는 건 꽉 찼다는 뜻이오니, 차면 이지러지는 법이며, 초승달 같다는 건 아직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화가 난 왕은 무당을 죽이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보름달 같다는 건 꽉 찼다는 뜻이고, 초승달 같다는 것 미약하다는 뜻이니,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번성하고 신라는 미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삼국사기』「백제본기」의자왕 조).

 

물론 1343년 후에 역사책을 읽고 있는 우리는 누구의 말이 옳았는지 알고 있다. 그 ‘예언’대로 남부여는 신라에게 망했다. 그리고 2세기 동안 유지되다 고려에게 망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예언이 옳았느냐, 그르냐가 아니라 비르발이 태어나기 868년 전부터 위대함이나 초라함, 흥함과 망함을 달의 모양에 빗대어 말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대에는 어느 나라 씨알(백성)이건, 어느 겨레건, 어느 인종이건 상관없이 해를 신(神)으로 모셨듯이 - 그리고 땅을 어머니로 여겼듯이 - 사는 곳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르고, 겨레가 달라도 그 문화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겉모습’이나 ‘언어’나 ‘종교’라는 장벽을 넘어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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