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늑대와 이리

개마두리 2013. 10. 23. 14:09

 

 

어느 날 한 늑대가 우연히 이리의 굴을 발견했다. 마침 굴이 비어 있는 것을 본 늑대가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정말 좋은 기회군!’

 

 

그는 동굴 구석에 숨어서 이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늑대는 자신의 꾀에 흐뭇해하며 이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입구에 낯선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한 이리는 잠깐 서서 생각에 잠기더니 안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사랑하는 나의 굴이여! 나의 귀중한 집이여, 안녕.”

 

 

굴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신중한 이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지껄였다.

 

 

“친애하는 집이여,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요? 어, 이상하다? 여태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할 수 없군. 대답이 없으니 이젠 당신을 떠날 수밖에 없군요. 다른 집을 구해야겠어.”

 

 

동굴 안에 숨어 있던 늑대는 이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마 이 집은 주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집인 모양이다. 만약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아 이리가 그냥 가버리면 내 꾀가 아무 쓸모도 없게 되겠지?’

 

 

늑대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굴 밖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질렀다.

 

 

“주인이시여, 말씀만 하십시오.”

 

 

이리는 굴 안에 숨어 자기 꾀에 넘어간 어리석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늑대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괘씸하게 생각한 이리는 얼른 근처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세퍼드에게 달려가 늑대가 숨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영문도 모르고 세퍼드가 달려가는 대로 쫓아간 양치기는 굴 입구에 찍힌 늑대 발자국을 보고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드디어 그는 양을 잡아먹는 늑대를 벌줄 기회를 잡은 것이다.

 

 

양치기는 큰 돌로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고, 결국 늑대는 굴 속에 갇혀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죽고 말았다. 이리를 잡아먹으려다가 자기 꾀에 넘어가 오히려 자신이 죽고 만 것이다.

 

 

- 출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채운정 옮김, 정신세계사 펴냄, 서기 1998년)

 

 

* 인용자(잉걸)의 말 : 우리는 이리의 신중함과 꾀를 본받아야 한다. 교활하고 똑똑한 자가 늑대처럼 나를 노리면 그 늑대의 허를 찌르는 방법을 써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웃음도 나온다. 늑대가 너무 순진[?]해서였다. 이리가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상식에 어긋나는 것 - 집이 말을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 - 을 믿다니!)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옮긴이(채운정 씨)의 말 :

 

 

서아시아의 고전. 원제는『투티 나메(Tuti Nameh)』, 즉『앵무새 책』. “한 편의 이야기 속에 수십 편의 이야기가 담기는 기묘한 구성”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행진”으로 이루어진 책. 앵무새 한 마리가 목숨을 걸고 ‘코바트’라는 황제에게 하룻밤 동안 수십 편의 이야기를 한다는 내용이다. 지은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는 옛 바라트(인도의 정식 국호)에서 만들어진 책이며, 서기 14세기에 ‘낫셰비(Nadschebi)'라는 시인이 이 책을 파르시(페르시아어. 이란의 표준어)로 옮기면서 내용을 새롭게 바꾸었다. 이후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퍼졌으며, 각 나라의 말로 옮겨지고 나중에는 유럽에까지 소개되었다(오스만 제국에서는 이 책이 황자皇子들의 수신서(修身書 : 몸과 마음을 닦는 책)나 제왕의 교과서로 쓰였다. “재미있게 읽는 동안 자연스레 현군(賢君)의 덕목을 깨우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서(西)아시아 세계에서『천일야화(千一夜話)』못지않게 인기를 누린 책이다.

 

 

서기 19세기에 독일 외교관 ‘게오르크 로젠’이 이 책을 (서아시아에서 입수한 뒤) 독일어로 옮겼으나, 그의 번역은 다소 무겁고 난삽하여 나중에 ‘지그프리트 샤르슈미트’가 따로 번역본을 만들어야 했다. 한국말로 옮겨진 번역본은 샤르슈미트의 번역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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