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늑대가 된 아기 양

개마두리 2014. 2. 22. 20:24

 

물은 맑고, 땅은 기름지며,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렀다. 날씨까지 좋아서 그야말로 축복받은 땅이었다. 그곳에 순한 양(羊)떼와 말 잘 듣는 양치기 개, 그리고 그곳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 양치기가 살고 있었다.

 

그는 여느 양치기와 사뭇 달랐다.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고통 역시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양치기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피리 대신, 날카롭게 삑 소리가 나는 호루라기와 철심이 박힌 몽둥이를 가지고 다녔다.

 

그는 젖을 짜고, 털을 깎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는 등 양한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졌다. 한 마디로, 양 덕분에 먹고살았다. 그런데도 그는 양을 제대로 보살펴 주기는커녕 오히려 학대를 일삼았다.

 

양치기는 아침, 점심, 저녁 끼니때마다 어미 양들의 젖을 짰다. 그는 젖이 많이 나오든 적게 나오든 언제나 불평을 해댔다. 양의 젖꼭지에서 피가 날 때까지 젖을 쥐어짰다. 양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는 철퇴와 채찍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 댈 뿐이었다.

 

“네놈들 가죽이 쭈글쭈글해지고, 내장이 오그라들 때까지 젖을 짜낼 테다. 이 못된 놈들아!”

 

양치기는 손에서 철퇴와 채찍을 잠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몸무게가 30킬로그램 나가는 양한테서 매일 40리터의 젖을 짜내려고 기를 썼다.

 

양들은 양치기의 포악함을 견디지 못해 날이 갈수록 생기를 잃어 갔다. 게다가 그 수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어쩌면 양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살아남은 양들이 죽은 양들의 몫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손해 보는 건 절대로 못 참는 양치기가 예전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양들을 들볶아 대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지막에 홀로 남은 양은 그동안 다른 양들이 만들어 냈던 어마어마한 양의 젖과 양털을 혼자 떠맡아야 할 참이었다.

 

양 떼는 하루하루 그 수가 줄어들어 이제는 고작 몇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양치기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예전에 비해 확 줄어든 젖과 양털, 그리고 고기(양고기 - 인용자 잉걸. 이하 ‘인용자’)! 치솟는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그는 분풀이를 마구 해 댔다. 철퇴와 채찍을 들고 양들을 뒤쫓아 다녔다.

 

양 떼 가운데 아직 덜 자란 아기 양이 있었다. 양치기는 아기 양이 몹시 못마땅했다. 너무 어린 탓에 아직 젖을 한 방울도 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양치기는 느닷없이 치솟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아기 양을 마구 때리며 뒤쫓았다. 달아나다 달아나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아기 양은 울면서 애원했다.

 

“양치기 님, 저는 아기 양이에요. 제 발은 달아나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요. 양은 달리기를 못해요. 제발 부탁합니다. 저를 때리지 말아 주세요. 제 뒤를 쫓아오지 마시라고요.”

 

양치기가 양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는 죽은 양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괘씸한 놈들! 이때껏 먹여 주고 키워 줬더니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죽어 버려? 그딴 식으로 나를 배신했겠다!”

 

그는 아기 양에게 죽은 양들에 대한 앙갚음을 하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양치기의 철퇴와 채찍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아기 양의 생김새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돌이 많은 산과 바위로 덮인 비탈길을 달리다 보니, 몽땅하던 다리가 길어지면서 가늘어졌다. 아기 양은 부쩍 속력을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양치기는 아기 양을 뒤쫓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기 양은 양치기의 채찍과 철퇴를 피하기 위해 더 많이, 더 빨리 달렸다. 어느 날 뾰족한 바위 위로 기어오르다 발톱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기 양은 뭉툭한 발톱 대신 갈고리 발톱을 갖게 되었다.

 

아기 양을 놓친 양치기는 분해서 씩씩거렸다. 아기 양은 메에 하고 울었다.

 

“양치기 님, 저는 아기 양이에요. 왜 모르세요? 아기 양한테 다른 걸 요구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양치기는 당연히 아기 양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날마다 달리고 도망치느라 아기 양은 배가 쏙 들어가 버렸다. 몸길이도 기다랗게 늘어났다. 털도 조금씩 조금씩 빠지더니 결국에는 한 올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곱슬곱슬한 양털 대신 짧은 잿빛 털이 나오기 시작했다.

 

양치기는 이제 도저히 아기 양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풀어 놓은 양치기 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아무도 아기 양을 따라잡지 못했다.

 

바짝 약이 오른 양치기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아기 양을 막다른 곳으로 몰았다. 그리하여 기어이 아기 양과 맞닥뜨린 양치기는 그동안의 화풀이를 모조리 해 버렸다.

 

아기 양은 흠씬 두들겨 맞으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양치기 님, 저는 아기 양이에요. 아기 양이 할 수 있는 일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요.”

 

양치기는 이번에도 아기 양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기 양은 양치기와 양치기 개가 자기 뒤를 쫓는 소리를 멀리서도 들을 수 있도록 촉각을 바짝 곤두세웠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아기 양은 나비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귀가 예민해졌다. 동시에 귀의 모양도 끝이 뾰족하게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양은 - 인용자) 여전히 양치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양치기는 아기 양이 어둠 속에서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악용해 밤이면 더 못살게 굴었다.

 

아기 양은 메에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양치기 님, 저예요. 아기 양이라고요! 저를 아기 양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지 마세요!”

 

양치기는 예전처럼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부터 아기 양은 양치기의 기습을 경계하며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다. 아기 양은 매일 밤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아기 양의 눈은 불꽃이 타오르듯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아기 양은 어둠 속에서도 무엇이나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기 양은 양치기에게 시달렸다. 꼬리가 너무 무거워서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으니까. 아기 양은 육상 선수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자 꼬리가 차츰차츰 가늘어지더니 나중에는 채찍처럼 길어졌다. 아기 양은 채찍 같은 꼬리를 하늘로 곧추세우고는 바람처럼 달렸다.

 

그래도 아기 양은 양치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양치기는 비겁하게 저만치서 돌을 던져 댔다.

 

아기 양은 메에 하고 울부짖었다.

 

“양치기 님, 저는 아기 양이에요. 양으로 태어났으니. 양으로 곱게 죽고 싶어요. 대체 무엇 때문에 저를 다른 것이 되도록 강요하는 건가요?”

 

양치기는 이번에도 아기 양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기 양은 으슥한 곳으로 내몰렸다. 매를 피하려고 버둥거리던 아기 양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갈고리 발톱으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아기 양의 발톱에 손을 긁힌 양치기는 억울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기 양은 이빨로 공격을 해 보려 했지만, 동그란 턱 안의 무딘 이빨로는 역부족이었다. 아기 양은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이빨을 갈고 닦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기 양의 턱과 이빨리 슬슬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혀도 서서히 길어졌다.

 

아기 양은 예전처럼 메에 하고 울었다. 하지만 더 이상 옛날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메에 하고 울면서 애원을 해 대서 그런지, 목소리가 굵직하고 걸걸해져 버렸다.

 

아기 양을 상대하기가 버거워진 양치기는 양치기 개에게 아기 양을 공격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개들도 힘에 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기 양은 양치기 개를 갈고리 발톱으로 움켜쥐고 손쉽게 쓰러트렸다. 그리고 다른 상대(다른 양치기 개 - 인용자)를 골라 목을 물어뜯더니 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다.

 

악에 받친 양치기는 아기 양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세우고 난폭하게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기 양은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이봐, 양치기, 이쯤에서 그만둬! 이러다가 곧 험한 꼴을 보게 될 것 같아.”

 

양치기는 아기 양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그는 채찍을 움켜잡은 손에 더더욱 힘을 실었다.

 

어느 겨울날 아침, 양치기는 여느 때처럼 일찌감치 눈을 떴다. 세상은 온통 밤새 내린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양치기는 얼마 안 되는 양들의 젖을 쥐어짜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는 - 인용자) 한 마리의 몸에서 열 마리가 만드는 양젖을 짜내겠다는 일념으로 철퇴와 채찍을 두 손에 단단히 들었다.

 

바깥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눈 위의 선명한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갈가리 찢겨진 양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목이 졸린 채 죽어 있었다. 그가 이끌던 양 떼는 단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을 이마 위에 대고 먼 곳을 두리번거리자, 저만치서 아기 양의 모습이 보였다. 눈 위에 앞발을 앞으로 쭉 뻗은 채 긴 혀로 턱에 묻은 피를 핥으면서 길게 엎드려 있었다.

 

아기 양의 곁에는 양치기 개 두 마리가 죽은 채로 누워 있었다. 아기 양은 으르렁대며 양치기를 향해 다가왔다. 오싹한 공포에 휩싸여 뒷걸음질치던 양치기는 주춤거리며 말을 건넸다.

 

“내 아기 양, 나의 귀여운 아기 양 …….”

 

아기 양이 으르렁거렸다.

 

“난 이제 아기 양이 아니야!”

 

양치기는 다시 더듬거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 아, 아, 아기 양, 나의 아기 양, 나, 나, 나, 나의 귀여운 아기 양 …….”

 

아기 양이 대답했다.

 

“옛날에는 아기 양이었지. 지금은 아냐. 너 때문에 늑대가 되었어!”

 

“넌 사랑스럽고, 귀엽고, 온순하고, 앙증맞은 나의 아기 양이야.”

 

아기 양은 훨씬 더 사납게 으르렁댔다.

 

“이젠 너무 늦었어, 양치기.”

 

양치기는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늑대가 되어버린 아기 양의 갈고리 발톱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양치기의 목을 물었다. 새하얀 눈은 양치기의 붉고 더운 피를 빨아들였다.

 

- 아지즈 네신 선생의 우화

 

-『개가 남긴 한마디』(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이종균 그림, 도서출판 푸른숲 펴냄, 서기 2008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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