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조선 후기의 수취 관련문서들

개마두리 2015. 1. 11. 19:12

 

내가 5년 전(서기 2010년)에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서 본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서 올린다. 부디 이 글이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자료가 되기를 빈다 : 잉걸

 

 

- 김해 양산 소재 남판서댁 노전(蘆田) 세납책(稅納冊) :

 

 

서기 1859년 11월 모일에 김해 양산에 소재한 남판서댁 노전(蘆田)에 대한 세(稅) 현황을 기재한 (토지)대장이다. 노전 전체의 원가(元價) 5980냥에 대하여 2푼 세율을 적용하여 1196냥의 세가 부과되었다. 마지막 면에 부사(府使)가 서명하였다.

 

 

- 김해부 소재 노전 세납책 :

 

 

서기 1868년(일본에서 명치유신이 일어난 해 - 옮긴이) 1월 모일에 김해부에 소재(所在)한 노전(蘆田)에 대한 세(稅) 현황을 기재한 대장이다. 김해지역 노전 20곳의 원가 7670냥에 대하여 2푼 세율을 적용하여 1530냥의 세가 부과되었다. 마지막 면에 적힌 기록을 근거로 당시 수세도감(收稅都監)이 서필수(徐弼脩)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경상남도 김해군 상북면 중사도(中沙島) 본궁(本宮) 전고(田庫) 타량대장(打量大帳) :

 

 

서기 1906년(대한제국기 - 옮긴이) 6월 모일에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김해군 소재 운현궁의 전고에 대한 현황을 작성한 양안이다. 양안에는 ‘낙강여재지(落江餘在地)’ 6석 6두 7승과 ‘노윤용등세전니생전중 자원충납낙강조(盧潤容等世傳泥田中 自願充納落江條)’ 43석 15두 5승, 총 50석 2두 2승의 밭과 시초장(柴草場) 1곳에 대한 조사 결과가 기재되어 있다. 당시 감관(監官)은 노한용(盧漢容)이었고, 김해군수는 이휘선(李徽善)이었다.

 

 

- 하동 양안(河東 量案) :

 

 

서기 1893년 8월, 9월, 11월에 조사한 하동 적량면(赤良面), 악양면(岳陽面)에 소재한 전답 현황을 기재한 양안이다. 하동색리 이지영(李志英), 정찬기(鄭贊基), 김우태(金佑泰)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 전라도 만경현 소재 명례궁속(明禮宮屬) 각둔전답(各屯田畓) 진기구별(陳起區別) 양안 :

 

 

서기 1853년 4월 모일에 전라도 만경현에 소재한 명례궁 관할의 전답에 대한 현황을 작성하여 고보한 양안이다. 양안의 기재 요소를 잘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 면에 ‘계자인(啓字印)’이 찍혀있다. 당시 타량색리(打量色吏)는 곽부영(郭富永)과 주봉운(朱鳳雲)이었고, 만경현령은 정완묵(鄭完黙)이었으며, 담당 내수사사관은 김인구(金仁球)였다. 다른 양안과 달리 규격이 큰 편이고, 책의 장황 또한 비단으로 표지를 입힌 다음 금속으로 편철을 하였다.

 

 

-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익산군(益山郡) 소재 명례궁 둔답(屯畓) 양안 :

 

 

서기 1853년 4월 30일에 전주부와 익산군에 소재한 명례궁 둔답의 현황을 작성하여 보고한 양안이다. 전주부에는 조촌면(助村面) ․ 이북면(伊北面) ․ 봉상면(鳳翔面) ․ 오백조면(五百條面) ․ 우서면(紆西面) ․ 동일면(東一面) ․ 이동면(利東面) ․ 이남면(利南面) ․ 이북면(利北面) ․ 부북면(府北面) 등지에, 익산군에는 춘포면(春浦面)에 있는 해당 답(畓)에 대한 각종 기재사항이 수록되어 있다. 양안의 마지막 면에 전주부 판관 윤규석(尹奎錫)과 내수사 사관 양식(梁植)이 서명을 하였고, 계자인이 답인되어 있다.

 

 

- 낙안군(樂安郡) 남면(南面) 하도(下道) 영등평(永登坪) 순원군(順原君) 사패답(賜牌畓) 이주(移主) 양안 :

 

 

서기 1861년 11월 모일에 낙안군 남면 하도 영등평에 소재한 순원군 사패지의 답(畓) 현황을 기재한 양안이다. 이주양안이라는 명칭은 기주(起主), 즉 경작자의 변경사항 파악을 주목적으로 작성된 양안이라는 의미로 판단된다. 경작자 기재 사항 가운데 변동사항이 있는 곳에 종이를 덧대어 변동사항을 기재하였다. 매 면마다 ‘낙안군수지인(樂安郡守之印)’이 찍혀 있고, 마지막 면에는 군수가 서명하였다.

 

 

- 전라도 광양현(光陽顯) 구례현(求禮縣) 소재 운현궁(雲峴宮) 장토(庄土) 답험(踏驗) 양안 :

 

 

서기 1868년 11월 모일에 전라도 광양현과 구례현에 소재한 운현궁 장토의 현황을 작성하여 보고한 양안이다. 광양현에는 월포면(月浦面) ․ 진상면(津上面) ․ 진하면(津下面) ․ 다압면(多鴨面) 등지에, 구례현에는 토지면(土旨面) ․ 은전면에 있는 해당 전답에 대한 각종 기재사항이 수록되어 있다. 양안의 매 면 하단의 작인(作人) 기재사항에 무진(戊辰) ․ 기사(己巳) ․ 경오(庚午)에 따라 종이가 덧대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양안은 1868년(무진) 이후 1869년, 1870년 3년에 걸쳐 매년 그 현황을 최신화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면에 관(官)의 서명이 있고, 색리(色吏) 김국홍(金國鴻)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 전라도 광양현 소재 전답 노염전(蘆鹽田) 양산고수(養山庫數) 양안 :

 

 

서기 1866년 전라도 광양현에 소재한 전답, 노전, 염전, 양산의 현황이 기재된 양안이다. 골약면(骨若面), 옥룡면(玉龍面), 옥곡면(玉谷面) 지역에 답 17석 17두락, 전 4석 18두락, 노전 3곳, 염전 3곳, 양산 3곳이 있었다. 매 면에 관인이 찍혀 있으나 정확히 판독할 수 없으며, 마지막 면에 광양현감이 서명하였다.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당시 광양현감은 이유선(李有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전라도 김제군 소재 대역불도죄인(大逆不道罪人) 황검 모역동참죄인 관검 전답 답험 성책 :

 

 

서기 1801년 12월 모일에 전라도 김제군에 소재한 대역죄인 항검(恒儉)과 모역 동참죄인 관검(觀儉)의 전답 현황을 기재한 양안이다. 유항검 ․ 유관검 형제는 천주교도로서 전라도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서기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처형당하였다.

 

 

- 완흥군(完興君) 소유(所有) 전라남도 순천군 소재답(所在畓) 개양안(改量案) :

 

 

서기 1908년(대한제국기 - 옮긴이) 11월 모일에 완흥군 이재면이 아들 영선군 이준용에게 본인 소유의 전라남도 순천군 동하면 소재의 논 1석 13두락을 증여하면서 작성한 양안이다. 양안은 2부가 작성되었고 내용은 서로 동일하다. 양안의 본문에는 이재면이 이준용에게 논을 증여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와 순천군 동하면에서 측량한 양안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제반 절차를 진행하면서 작성된 위임장, 신청서, 증명서도 낱장 문서 형태로 양안 사이에 끼워져 있다.

 

 

- 완흥군 소유 전라남도 보성군 소재답 개양안 :

 

 

서기 1908년 10월 모일에 완흥군 이재면이 아들 영선군 이준용에게 본인 소유의 전라남도 보성군 남하면 소재의 논 11석 16두 7승락을 증여하면서 작성한 양안이다. 양안의 본문에는 이재면이 이준용에게 논을 증여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와 보성군 남하면에서 측량한 양안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면에는 완흥군 소유답을 영선군에게 증여하는 것에 대한 증빙서가 첨부되어 있다.

 

 

- 운현궁 소유 이주서가(李注書家) 매수답여전(買收畓與田) 구건(舊件) 양안 :

 

 

서기 1871년 4월 모일에 작성된 것으로 ‘운현궁 소유 이주서가 매수 답 ․ 전에 대한 구건 양안’이자 동시에 ‘청풍부 각면에 있는 경거 이주서가 전답 ․ 가사 ․ 원림에 대한 정안’이다. 즉 운현궁이 이주서가로부터 사들인 청풍부 소재 전답 현황이 기재된 양안이다.

 

 

- 개성군(開城郡) 강남면(江南面) 이소리(二所里) 금암연동 궁장(宮庄) 전답(田畓) 신구성책(新舊成冊) :

 

 

서기 1908년 개성군 강남면 이소리 금암연동에 소재한 운현궁의 궁장전답 현황을 기재한 성책이다. 기재 방식은 양안 기재 방식을 따랐고, 해당 지역의 주변 형세를 그린 낱장의 도면이 별도로 끼워져 있다.

 

 

- 배천(白川) 발산면(鉢山面) 궁장 보수세(洑收稅) 성책 :

 

 

서기 1881년 배천군 발산면에 소재한 궁장보 사용에 대한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세(稅) 내역을 기재한 대장이다. 2점 모두 기재된 내용은 서로 동일하다. 세 납부 대상의 성명이 적혀있고, 아래에 두락(斗落) 수가 적혀 있다. 매 면마다 ‘운현궁(雲峴宮)’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 배천 발산면 궁장 축동(築垌) 기답(起畓) 축보(築洑) 하기(下記) :

 

 

서기 1881년 3월 모일에 배천군 발산면 소재 궁장의 축동 ․ 기답 ․ 축보에 소용된 비용을 기재한 하기다. 전(錢) 1750냥에 대한 세부 지출 내역이 일일이 기재되어 있다. 매 면마다 ‘운현궁’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 배천 계화리(桂花里) 백석촌(白石村) 수세보(水稅洑) 성책 :

 

 

서기 1889년 8월 모일에 배천군 계화리 백석촌에 소재한 수세(水稅)를 거두어 들이는 보(洑)의 현황을 기재한 대장이다. 크게 월교상보답안(月橋上洑畓案), 계화리중보답안(桂花里中洑畓案), 백석촌하보답안(白石村下洑畓案)으로 나누어 기재되어 있다. 항목별로 세 납부 대상, 두락수, 답주(畓主)가 적혀 있다.

 

 

- 배천 계화리 백석촌 보수세안(洑水稅案) :

 

 

서기 1889년 11월 모일에 배천군 계화리 백석촌에 소재한 보(洑)에 대한 수세(水稅) 현황을 기재한 대장이다. 크게 계화리보수세안, 백석촌보수세안으로 나누어 기재되어 있다. 항목별로 세 납부 대상, 두락수, 세액이 기재되어 있으며, 세액은 매 두락별로 2두씩으로 기재되어 있다. 별도로 계화리보에 관한 일로 왕래하면서 소용된 부비(浮費) 내역을 기재한 문서가 끼워져 있다.

 

 

- 송도(松都) 강남면(江南面) 추수기(秋收記) :

 

 

서기 1896년 10월 모일에 송도 연동, 필동, 오궁(五宮)과 배천 발산(白川 鉢山) 일대에 소재한 전답의 추수 현황과 상납조(上納租)의 현황을 기재한 대장이다.

 

 

- 용천군(龍川郡) 신북동(新北垌) 소재 운현군 답험실수(踏驗實數) 성책 :

 

 

서기 1900년(대한제국기 - 옮긴이) 3월 모일에 용천군 신북동에 소재한 운현궁 소유의 답(畓)에 대한 현황을 기재한 양안이다. 장진승답(張陳昇畓), 홍수경답(洪守京畓) 등 답마다 인명이 부가되어 있다. 매 면마다 ‘용천군인(龍川郡印)’이 찍혀 있고, 마지막 면에는 용천군수 유봉근(柳鳳根)의 직인이 찍혀 있다.

 

 

- 실득추수성책(實得秋收成冊) :

 

 

서기 1907년(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평민 의병들이 일어난 해 - 옮긴이) 10월에 명동(明洞), 망천(望川), 수조(水助), 안곡(安谷), 어병산남(御屛山南) 일대에 소재한 답(畓)의 추수 입고 현황을 기재한 대장이다. 마지막 면에 “무술년(서기 1908년) 7월 19일 구영희(具永喜)가 삼가 올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서기 1907년의 추수 입고 현황을 총정리하여 이듬해인 서기 1908년에 작성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 평안도 용천부(龍川府) 신북동답(新北垌畓) 수세정식(收稅定式) 절목(節目) :

 

 

서기 1865년 12월 모일에 작성된 평안도 용천부 신북동 소재 답(畓)의 수세에 관한 절목이다. 용천 도호부사가 용천 의주 경내의 신북동 장토에 대한 현황과 향후 수세 기준과 납세 등에 대한 규정을 정하여 보고한 것이다. 본문에 의하여 이 절목은 3건이 작성되어 1건은 종친부로 보고되었고, 2건은 영읍(營邑)에 두었다고 한다. 이 절목은 종친부에 보고된 절목이다. 매 면마다 ‘용천부사지인(龍川府使之印)’이 적혀 있고, 마지막 면에 용천도호부사가 서명하였다.

 

 

- 부평부(富平府) 서면(西面) 전지지(全地池) 제언작답(堤堰作畓) 절목(節目) :

 

 

서기 1868년 1월 모일에 종친부에서 작성한 부평부 서면에 소재한 전지지의 제언작답에 관한 절목이다. 당시 해당지역 도장(導掌)으로 박희동(朴曦東)을 새로 임명하면서 직무를 어김없이 수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세금 상납에 관한 구체적인 조목들을 열거하고 있다. 매 면마다 ‘종친부인(宗親府印)’이 찍혀 있고, 마지막 면에는 ‘종친부’라고 쓰고 아래에 압(押, 일종의 서명)을 하였다.

 

 

- 절목 :

 

 

서기 1829년 5월 모일에 양산군에서 작성한 절목이다. 김해에 거주하는 정좌충(鄭座忠)과 양산군에 거주하는 신치담(申致聃) 사이에 벌어진 노전(蘆田)을 둘러싼 쟁송(爭訟)에 대한 전말을 기재하고 있으며, 감영(監營)에서 내린 처분에 따른 최종 판결을 준행하라는 취지로 이 절목을 작성하였다. 매 면마다 ‘양산군주지인(梁山郡守之印)’이 찍혀 있다. 표지에 ‘일건예암서원(一件禮巖書院)’이라고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목은 원래 김해에 소재한 예암서원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절목이 운현궁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운현궁의 김해 지역 노전 경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

 

 

서기 1805년 6월 17일에 전주(田主) 유학(幼學) 박렴(朴(玉 + 廉))이 재종제(再從弟) 박리(朴璃)에게 김해 중북 신중원(新中員)의 자기 소유의 밭을 15냥에 팔면서 작성한 문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