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멀리서 가물거리는 불빛

개마두리 2015. 8. 25. 18:05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아르하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르하는 어릴 때 그 도시에 와서 부잣집의 하인으로 일했습니다.

 

아르하의 주인은 에티오피아에서도 유명한 부자인 하프톰 하세이였습니다. 하프톰은 돈이 무척 많아서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프톰은 오히려 사는 게 따분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하프톰은 늘 재미있는 일거리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하프톰은 언제나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너무 따분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프톰의 집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높은 산에는 언제나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디스아바바는 더운 도시지만, 워낙 높은 산이라 그 꼭대기에는 1년 내내 눈이 쌓여 있는 것입니다. 하프톰은 그 산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사람은 추위 속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이 말을 들은 아르하는 무심코 대답했습니다.

 

저 산꼭대기에서도 알몸으로 하룻밤은 견딜 수 있을 겁니다.”

 

저 산꼭대기에는 눈과 얼음밖에 없는데, 알몸으로 견딜 수 있다고?”

 

하프톰이 놀랍다는 듯이 묻자, 아르하가 관심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나는 누구든 저 산꼭대기에서 담요나 불이 없이는 하룻밤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어때? 나와 내기를 해 보지 않겠나?”

 

 

하프톰의 말에 아르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용감한 사람은 분명히 벌거벗고도 하룻밤을 견딜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주인님과 내기를 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아르하의 대답에 하프톰이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다는 듯이 이야기했습니다.

 

좋아. 나와 내기하자고. 자네가 저 산에 올라가는 거야. 만일 자네가 산 위에서 벌거벗고 하룻밤을 견디면, 난 자네에게 집과 소 떼와 밭 1만 평을 주겠네.”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담요나 옷이나 불을 가져가서는 절대로 안 돼.”

 

좋습니다. 내일 밤에 제가 산에 올라가겠습니다. 그 대신 반드시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아르하는 하프톰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약속은 했지만, 아르하는 걱정스러웠습니다.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눈보라치는 산꼭대기에서 벌거벗은 채 하룻밤을 새우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아르하는 걱정을 하다가, 같은 고향 출신인 지혜로운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노인은 아르하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자네를 도와주겠네. 내일 밤 내가 산 아래에 모닥불을 피워 둘 테니, 산꼭대기에서 그 불빛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내게. 졸리거나 추위 때문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면, 산 아래 있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그 불의 따뜻함을 떠올려 보게.”

 

아르하는 노인의 말을 듣고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르하는 노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르하는 산으로 떠났습니다. 하프톰은 아르하를 감시하라며 하인 네 명을 딸려 보냈습니다.

 

아르하가 정말로 벌거벗은 채 산꼭대기에서 밤을 새우는지 잘 지켜보아야 한다.”

 

아르하는 하인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내 밤이 찾아왔습니다. 아르하는 약속한 대로 옷을 벗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아르하의 몸을 싸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르하는 이를 악물고 추위를 견뎠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하의 온몸은 꽁꽁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아르하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졌습니다. 하지만 아침이 되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아르하의 눈에 저 멀리 산 아래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보였습니다.

 

아르하는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르하는 노인이 한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래, 정신을 차리자. 할아버지가 저 산 아래서 내게 용기를 주려고 모닥불을 피우고 계시잖아. 그래, 용기를 잃지 말아야지.’

 

아르하는 따뜻한 모닥불을 떠올렸습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아르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수 있어. 오늘 밤만 견디면 식구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어. 나는 견뎌야 해!’

 

아르하는 이렇게 다짐하면서 고통을 참아냈습니다. 온몸이 쑤시고, 얼굴에는 고드름이 달렸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서 가물가물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면서, 아르하는 기어이 밤을 새웠습니다.

 

, 난 해냈어요! 저기 동이 터 오고 있잖아요.”

 

 

아르하는 자기를 감시하고 있던 하인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르하는 다시 옷을 입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하프톰은 쉽사리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아르하가 벌거벗은 채 밤을 세웠단 말이냐?”

 

하프톰은 하인들에게 몇 번이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하인들은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프톰은 막상 약속대로 아르하에게 집과 소떼와 밭을 주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그리고 아르하가 어떻게 그 추위를 견뎌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아르하, 산꼭대기에서 밤새 견뎌 낸 비결이 무엇이냐?”

 

너무나 힘들었지만, 산 아래서 가물가물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견뎌냈어요.”

 

아르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뭐라고! 불이라고? 그럼 너는 약속을 어긴 게 아니냐? 넌 내기에 진 거다. 난 분명히 네가 담요나 불을 사용하지 않고 견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아르하는 하프톰의 말에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산 아래 피워 놓은 불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그 불을 쪼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든 너는 불을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나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억울하면 재판관에게 가서 따져보자.”

 

아르하는 하프톰의 말대로 재판관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돈 많은 하프톰의 편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기에 진 것이다. 처음에 내기를 할 때, 불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프톰은 너와의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

 

아르하는 목숨을 걸고 산 위에서 밤을 새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자 슬퍼했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잘 살아보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르하는 다시 지혜로운 노인(문맥상 아르하를 위해 모닥불을 피워준 노인으로 보인다 - 옮긴이)을 찾아갔습니다.

 

여보게, 희망을 잃어선 안 되네. 어딘가 자네를 도와 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걸세.”

 

노인은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주인으로 모셨던 하일루 어른을 한번 찾아가 보게. 하일루 어른은 지혜가 넘치고 정의로운 분이니까, 자네를 도와 주실 게야.”

 

아르하는 노인이 일러 준 대로 하일루를 찾아가서 그간에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일루는 아르하의 이야기를 듣더니,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젊은이, 걱정 말게. 자네가 받아내야 할 것들을 꼭 받게 해 주겠네.”

 

며칠 후, 하일루는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하일루는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욕심 많은 하프톰과, 그의 재판을 맡았던 재판관도 참석했습니다.

 

하일루는 넓은 마당에 양탄자를 깔고 커다란 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아직 상 위에는 아무 음식도 차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염소구이 냄새, 온갖 향료 냄새, 여러 가지 양념과 과일 냄새 등 맛있는 음식 냄새만 집 안에 가득 찼습니다.

 

손님들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음식은 나오지 않고, 맛있는 냄새만 계속 풍겨 왔습니다.

 

왜 이렇게 음식이 안 나오는 걸까요?”

 

하프톰이 재판관에게 귀엣말로 물었습니다.

 

글쎄요. 너무 늦어지고 있는데요.”

 

사람들은 냄새만 풍기고 음식이 나오지 않자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생각한,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 하일루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하일루! 어째서 냄새만 피우고 음식을 주지 않는 거요?”

 

하일루는 이 물음에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니, 냄새만 맡으면 되지, 음식은 먹어서 뭐합니까? 오늘 잔치는 음식 냄새만 맡는 잔치입니다.”

 

하일루의 말에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여보쇼! 냄새에는 아무 영양가도 없단 말이오.”

 

그래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 모닥불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불을 사용한 것이라고 트집을 잡았다더군요. 그래서 나도 배운 겁니다. 냄새만 맡아도 음식을 먹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사람들은 아르하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일루의 말에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습니다. 하프톰은 자기가 욕심을 부린 일이 부끄러웠습니다. 재판관도 그릇된 판결을 내린 것을 반성했습니다.

 

, 내가 잘못했소. 아르하에게 약속한 집과 소떼와 밭을 주도록 하겠소.”

 

하프톰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아르하에게 사과했습니다. 하일루는 그 때서야 음식을 내오도록 시켰습니다.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하일루의 지혜를 칭찬하면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즐겼습니다.

 

- 에티오피아의 옛날이야기

 

* 출처 :웅진메르헨월드 14 - 영리한 아싸드(김성희 엮음, 웅진출판회사 펴냄, 서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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