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세계사]▩유럽인이 오기 전부터 농사를 지었던 아마존 원주민들

개마두리 2024. 2. 12. 21:54

(글쓴이[개마두리]의 말 : 이 글은 내가 지금으로부터 열세 해 전에 쓴 것이다)

 

서기 200912월 문화방송(MBC)에서 방영된 한국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은 아마존 밀림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하 아마존 원주민으로 부름. ‘인디오는 에스파냐어로 인도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원주민들을 바라트 사람으로 잘못 알고 붙인 이름이다. 원주민들은 남아시아인인 인도인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을 뿐 아니라 말, 종교, 문화, 역사, 사회조직도 다르므로 이 이름은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아시아 주에 속하는 바라트[인도의 정식 국호]에 사는 게 아니라 아메리카 주에 속하는 아마존[브라질/페루/콜롬비아/베네수엘라/볼리비아가 나눠 가진 땅이다. 밀림과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다]에서 산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아마존 원주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아마존 원주민은 야생 멧돼지를 사냥하고(마티스 족), 33년 전(서기 “1976”)에야 브라질 백인들에게서 개를 얻어 사냥에 동원했으며(마티스 족), “티셔츠와 반바지같은 옷 몇 벌, 총 한 자루와 자라바따나라고 하는 사냥 도구, 낚싯줄과 몇 개의 장신구가 전부(마티스 족)”인 살림살이에 가축을 기르는 데 별로 소질이 없(마티스 족)”어서 후나이(브라질 정부가 만든 원주민 보호기구)가 철제 우리를 지어주어도 그것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 그들은 시간 맞춰 먹이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붙잡아 우리에 집어넣은 야생 멧돼지들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래서 그들의 마을에서는 야생 멧돼지들을 사냥해서 우리에 가둔 다음 탈출한 놈들을 잡아먹는 이상한 일들이 반복된다(마티스 족).” 그들의 삶은 단순해서 사냥하거나 과일을 따거나 모여서 차를 마시며 하루를 보낸다(마티스 족).” 다른 민족의 삶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요즘 들어 문명과 함께 전해진 그물로도 낚시를 하지만 원래 와우라족은 화살을 쏘아 고기를 잡는다.” 그들은 아르마딜로를 사냥하기도 하고 원숭이, 사슴, 물고기 등을 잡아먹기도 한다. 늘 활과 화살, 흙으로 만든 솥, 실타래 등을 가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어디를 가든 해먹 한 장만 치면 그곳이 바로 집이 된다(조에 족).”

 

이들이 농사를 아예 안 짓는 것은 아니어서 사는 곳 근처에다 만주오카(마나 고구마나 감자처럼 뿌리를 먹는 식물 - 옮긴이)를 경작해 먹기도 한다(조에 족).” 와우라족은 고추를 재배해서 각종 음식에 넣어 먹기 때문에 매운맛에 익숙하다.” 마루보족은 만주오카와 바나나 농사를 지으며 야노마미족(“브라질과 베네수엘라 사이 국경 지대에 사는민족)원시적인 형태로나마 농사를 짓는다(마빈 해리스 교수. 이하 존칭 생략).” 다만 조에족은 할 줄 아는 농사가 만주오카 농사뿐이고, 야노마미족의 농사도 한꺼번에 몇 에이커의 숲을 태워 개간한 다음 니트로겐이 풍부한 그 잿더미에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을 심는(마빈 해리스)” 화전(火田)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마존을 시간이 멈춘 땅이나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땅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아마존 바깥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마존 원주민 사회는 잘해 봐야 초보적인 농경으로 생계의 일부를 충당하는 촌락 사회(마빈 해리스. 이하 해리스)”라는 평가를 받을 뿐, 백인들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고 백인이 오기 전에는 전혀 바뀌지 않은 사회였다는 인상을 풍긴다. 또한 브라질 백인들이 아마존으로 들어와 숲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콩 농사를 짓거나 목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마존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환경을 파괴하는 짓이라고 주장하는 환경운동가들은 아마존에 농경사회가 없는 것은 축복이라고 주장한다. 나도 5년 전(서기 2006)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아마존에서 찾아낸 증거들과, 서기 16세기 아마존에 들어간 적이 있는 유럽인이 남긴 기록은 이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전자부터 살펴보자. 아마존의 일부인 볼리비아의 베니()에는 여러 개의 숲 둔덕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총으로 쏜 듯 일직선으로 된, 길이 5킬로미터 남짓한 두툼한 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찰스 만).” 볼리비아 지질학자 한 명과 팀을 이루어 일하고 있는 클라크 에릭슨 교수(고고학자)의 말에 따르면, “전체 면적이 75,000평방킬로미터(참고로 한국의 면적 - 휴전선 남쪽의 면적 - 99,000평방킬로미터다)가 넘는, 둑으로 연결된 이 숲 둔덕 지역은 2천년도 더 전에 인구가 밀집한 복잡한 사회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에릭슨 교수가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의 모습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관념에 도전해 온 몇몇 급진적인 학자들(찰스 만. 이하 ’)”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말에 회의를 품을지 모르겠으나(실제로 스미스소니언 협회[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서기 1846년에 만들어진 미국 최대의 학술 협회] 소속의 고고학자 베티 메거스는 지금까지 나는 베니 지역에 단 한 번이라도 큰 규모의 인구가 살았다는 증거를 본 적이 없으며,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단지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만의 말에 따르면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두 고고학자는 그 거대한 흙둔덕(토루)들 대부분이 홍수로 인해 자연스레 생겨난 퇴적층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왔다. 거기에 초기의 적은 인구들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둑길을 만들고 흙둔덕 위에 밭을 일구었으리라는 것이다.”), 3자인 만도 둔덕들이 일직선으로 된 두툼한 둑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하므로 베니 주의 둔덕들이 인공물이 아닐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원래 같으면 자신들이 사는 땅(남미)의 역사를 추켜세워야 할 베네수엘라의 고고학자들이 베니 주의 둔덕들을 자연스레 생겨난 퇴적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그들이 메거스 박사가 소속된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지원을 받아서 연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협회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지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에릭슨 교수가 베니의 원주민들이 도로, , 수로, 저수지, 흙둔덕, 그리고 운동 경기장까지 지었을 뿐 아니라 철마다 범람하는 목초지에서 물고기도 잡았다.”고 주장하고 그들이 원래 철마다 반복되는 홍수의 결과 자연적으로 생겨난베니의 사바나에 정기적으로 불을 놓아 사바나 지역을 넓혀 갔다. 초원 지대에 나무나 덤불이 자라면 물고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불을 놓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가장 확실한 것은 물증이다. “둔덕의 8분의 1정도가 도자기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진흙을 지탱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기 위한 용도(에릭슨 교수)”였던 듯하다는 연구결과는 이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둔덕 가운데 하나인 이비바테는 로마 제국의 쓰레기장이었던 몬테 테스타치오보다도 넓으며, 이비바테와 비슷한 둔덕이 수백 개는 더 있다().” “분명 베니는 로마 제국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양산해 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비바테의 토기들은 애초에 깨뜨려서 묻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수많은 토기들은 숙련된 기술자들로 구성된 많은 숫자의 인구가 장기간 이 흙둔덕 위에서 먹고 마시며 생활했음을 의미한다고 에릭슨은 말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토기 더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공의 수, 노동에 드는 시간, 도공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의 수, 토기를 깨고 흙 속에 묻는 대규모 작업 과정들은, 에릭슨의 생각에 따르면 1천 년 전(서기 1000.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무려 492년 전이다 - 옮긴이)의 베니가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였다는 또 다른 증거이며, 그것들이 이제야 비로소 고고학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릭슨의 억측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증언도 들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에릭슨보다 먼저 베니에 온 지리학자 윌리엄 데네반은 서기 1961년 비행기를 타고 베니를 관찰하면서 외따로 서 있는 숲 둔덕들, 길고 도드라진 둑, 수로, 봉곳한 농경지, 해자(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이나 도시 둘레에 판 호)처럼 생긴 원형의 도랑, 그리고 기묘하게 지그재그를 그리는 이랑들 을 봤고, 나중에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 작은 비행기 안에서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래 보이는 것들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자연 상태에서는 그런 직선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다.

 

데네반은 그곳은 완전히 인간에 의해 개간된 지형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베니의 유적이 초기 문명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가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다만 그곳이 아직까지도 거의 탐사되지 않은 상태이며, 심지어 그 지역의 흙둔덕과 수로에 대한 상세 지도조차 없다는 것이 이 이론을 입증하는 데 방해가 되는 가장 큰 걸림돌로 남아 있다. 베니에 조직된 사회가 있었다는 이론을 반박하고 싶은 사람들은 직접 탐사라도 해 보고 나서, 조사가 끝난 뒤에 반박해도 늦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제 새로운 이론이 밝혀낸 베니 지역의 고대사/중세사를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서기전 1000. 이 때 동아시아에는 고조선과 서주西周가 있었고 동남아시아에는 반랑 왕조[베트남]가 있었다 - 옮긴이)에 시작된 이 오래된 사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특이하며, 생태적으로 가장 풍부한 인공 환경을 창조했다. 정기적으로 홍수가 닥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넓은 흙둔덕을 쌓아올려 집과 농장으로 이용했고, 운송과 교통수단으로 둑길과 수로를 만들었으며(물길에 카누를 띄워서 노를 저으면 되기 때문이다 - 옮긴이), 어살(물고기를 잡는 통 - 옮긴이)을 만들어 식량을 마련했고, 초원 지대에 불을 놓아 나무가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1천년 전(서기 1000. 이 때 동아시아에는 고려와 북송과 일본이 있었고, 북아시아에는 요나라가 있었으며, 중앙아시아에는 대하大夏[흔히 서하西夏라고 불리는 나라의 정식 국호. 타브가치족과 탕구트족이 함께 세운 나라다]와 티베트와 호라즘 제국이 있었고, 동남아시아에는 대리大理[:오늘날의 중국 운남성. 대리국의 후손들이 오늘날 태국에 살고 있는 타이족이라고 한다]과 전()레 왕조[:베트남 북부]와 참파 왕국[:베트남 남부]과 크메르 제국[:캄보디아]과 스리비자야 제국[:인도네시아]이 있었다 - 옮긴이) 이들의 사회는 정점에 이르렀다. 마을과 도시는 널찍하고 질서정연했으며 해자와 말뚝 울타리로 방어되고 있었다. 에릭슨의 가상 재현에 따르면, 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다란 면 옷을 입고(그러니까 목화의 솜에서 뽑아낸 실로 짠 흰 옷을 입고 - 옮긴이) 목과 손목에는 무거운 장신구들을 짤랑거리면서 둑길을 걸어다녔을 것이다().” 이후 유럽인이 온 뒤 이 문화는 쇠퇴했고, 이곳까지 뚫고 들어온 에스파냐인 침략자들을 맞이한 것은 한 때는 번성했던 문화의 흔적뿐이었다. 베니에는 고대사회/중세사회가 있었던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니는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대부분의 아마존은 문명이나 조직적인 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마존의 다른 지역은 어땠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점을 베니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서기 1000년 경 브라질 서부의 아크레 주(), 그러니까 아마존의 일부인 곳에는 어떤 사회가 있었을까? “원형이거나 정사각형 모양의 흙둔덕들을 가진 작은 마을들의 그물망 조직()”이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유물은 2003년 연구가들이 유적지를 뒤덮은 열대 숲을 제거한 다음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이것들에 대해 최초로 보고한 핀란드의 고고학자들은 아마존 저지대 어느 곳에서나 비교적 높은 인구 밀도를 가진 사회가 존재했음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런 발표는 아마존 지역을 연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의 의견을 대변한다. 서기 1000년 경의 아마존 강은 지금보다 훨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그들은 믿는다. 특히 강 아래쪽 절반 지역은 더욱 그러했다. 강가에 늘어선 절벽 위에는 마을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강이 연간 주기에 따라 넘치고 물러났으므로 마을 주민들은 높은 수위일 때는 고기잡이를, 낮은 수위일 때는 농사일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 절벽에서 한참 들어간 곳에서 수 킬로미터를 따라 조성된 마을 과수원이었다. 아마존 사람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농업 형태와는 다른, 나무를 재배하는 일종의 농림업(農林業)을 했다. 모든 마을이 다 작았던 것은 아니었다. 대서양 근처에는, 아마존 강어귀에 있는 거의 한 나라만 한 크기의 섬에 기반을 둔 마라호족이 살았다. 마라호 족 인구는 최근 1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상류 쪽으로 1천 킬로미터 더 올라간 지역, 지금의 산타렘(브라질 북부 파라 주에 위치한 마을) 근처에 살던 인구수는 그것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아마존의 가장 큰 지류인 타파호스 강어귀를 바라보는 높은 절벽 위에는 아마존 원주민의 마을이 있었는데, “고고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윌리엄 우즈에 따르면 타파호스 강 유역의 정착촌(사람들이 한 군데에 뿌리내린 뒤 만든 마을 - 옮긴이)은 이론적으로는 거의 40만 명의 거주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서기 2010내셔널 지오그래픽(‘미국 지리학회’. TV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다큐멘터리 잡지를 펴내는 학회 - 옮긴이), ABC 뉴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브라질과 볼리비아 접경지대의 아마존 상류에서 원형과 장방형 등 기하학적인 형태의 지반공사 흔적과 경계를 구분한 흔적이 포착된 것으로 나타났다. 1999년 이래 찍은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전문가들은 아마존 분지 상류 250km 범위에서 도로, 수로, 울타리 등을 포함한 약 260여 개의 유적을 구분해냈다. 연구진은 목적이 알려지지 않은 그와 같은 구조물의 10배 정도나 되는 유적지가 아마존 숲에 가려져 있어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 논문 공동 저자이자 브라질 파라 연방대학교의 인류학자 드니스 샤안(이하 샤안 - 옮긴이) 박사는 유적지 중 하나는 적어도 약 1280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영국의 일간 가디언은 "엘도라도의 실제 흔적"일지 모른다고 보도했다(코리아 타임즈기사).”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아마존에 엘도라도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아스텍이나 잉카에 버금가는 문명으로 여겼다. 그래서 수세기 동안 많은 탐험가들이 엘도라도를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고그 때문에 엘도라도는 마침내 신화 속의 도시로 여겨지게 됐다.” “20세기 학자들은 아마존 지역이 (인간이 - 옮긴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거대 주거지가 조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일부 구조물들은 가장 오래된 경우 서기 200, 나머지는 1283년경으로 연대가 올라간다.” 발굴된 구조물 대부분은 농사를 짓기 위해 숲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는데 이는 콜럼버스 이전 발달된 기념물 건축 사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연구팀이 지적했다.” “연구팀은 지금까지로 봐서는 미지의 인간들이 직각의 도로들을 따라 정확한 기하학적 설계에 의해 구조물들을 건설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제하고이 문화는 범람원과 고지를 모두 개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적지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자. “36피트(11m) 정도, 깊이 수 피트 정도의 도랑들이 망을 이루고 있으며 3피트(0.9m) 높이의 둑이 이들을 둘러싸고 있다.”, “일부는 도자기, 목탄, 석재 도구들이 묻혀있는 나지막한 흙더미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들은 요새나 주택에서 사용되거나 의식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중세 유럽의 웬만한 도시의 인구보다 많은 6만명 정도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규모. 샤안 교수는 이번 발견으로 아마존 상류의 토양이 척박해 본격적인 농업이 이뤄질 수 없다는 믿음이 깨졌다고 전했다.” 유적의 흙무덤 대부분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을 향하고 있어 천문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한다(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이 유적을 만든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넋이 북쪽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어서 일부러 무덤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 한다. 아니면 유적을 만든 사람들이 아마존 북쪽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서 그렇게 묻었거나 개마두리).” 연구팀은 특히 범람원과 고지의 구조물이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는데 이는 동일한 문화에 의해 건설됐음을 시사한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수준높은 토목공학, 운하, 도로 건설에 사용된 기술은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기술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부터 필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는 부분까지의 자료는한국일보기사에서 인용)

 

아마존의 고대/중세사회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또 있다.사이언스(영어로 과학이라는 뜻 - 옮긴이)서기 20088월호에 따르면 아마존 유적은 마야 문명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인류학자들이 추측해 왔던 것보다 더욱 복잡한 문화를 형성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아마존 유적이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설명했는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브라질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1500년 전”, 그러니까 서기 508년에 아마존 유적에 “5만 명이 거주했다고 계산했다(참고로 그 때 서유럽은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지 32년이나 흘러 주민들은 문명생활을 누릴 수 없었고, 인구도 많이 줄어들어 오늘날과는 달리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로부터 592년이 흐른 뒤에도 서유럽의 도시들은 대부분 인구 4~5만 명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파리나 런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서기 6세기의 아마존 유적은 서기 12세기의 동()로마[:영어 이름 비잔틴’]제국이 거느린 위성도시들보다도 규모가 컸다. 동로마 역사를 전공한 미셸 카플란 교수(이하 카플란’)의 말에 따르면, “테살로니카(신약성서에는 데살로니가로 나오는 도시), 에페수스(신약성서에는 에베소로 나오는 도시) 혹은 트레비존드 같은 도시들의 인구는 “3~ 4만 명이었으니까. 숫자만 놓고 판단한다면 아마존 유적이 동로마 제국의 지방도시들보다 1~ 2만 명이나 더 많은 수를 먹여살린 것이다. - 아마존 유적은 서기 1283년경 경에는 6만 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어서 이런 수치를 덧붙였다 -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타파호스 강의 정착지도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앞서 타파호스 강 정착지가 40만 명을 먹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거니와, 이것을 중세시대의 다른 도시와 견주어보면 그 위대함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 시)을 보자. “전성기였던 6세기와 12세기에는(카플란)” “도시에 35~ 4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카플란)”, 이는 타파호스 강 정착지보다 5만 명이 적거나 비슷한 수치다. 헬라스[그리스]가 자랑하는 도시의 규모가 아마존 분지에 있는 타파호스 강 정착지의 그것보다 더 작거나 비슷했던 것이다.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자료만 놓고 이야기한다면, 중세시대에 타파호스 강 정착지보다 규모가 컸던 도시는 “10세기에 인구 100만이었던 바그다드(카플란)”나 서기 12세기에 인구 50만의 국제도시(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였던 북송(北宋)의 개봉(開封. 북경어로는 카이펑’)() 뿐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시아나 유럽에서 번영하던 문명 못지않은 인구 부양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도시나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 학술용어로는 아메린드라고 한다 - 의 능력을 얕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구진은 아마존 유적지의 각 마을에는 중심광장을 이어주는 도로가 나 있으며, 큰 공동체의 경우 최대 150만 에이커에 이를 뿐 아니라 출입문과 제 2의 광장까지 갖추고 있다.”고 했다(출처를 따로 밝힌 것을 빼고는 마야 문명만큼 정교하지는 않지만부터 2의 광장까지 갖추고 있다.”는 인용문은 [뉴시스]기사에서 인용함).

 

그러니까 고고학자들이 서기 1999년부터 서기 2010년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베니가 아닌 지역에서도 원주민들이 비교적 복잡한 사회를 이루었고, 그 사회는 어떤 지역에서는 5만 명, 어떤 지역에서는 10만 명, 어떤 지역에서는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회는 모두 에스파냐/포르투갈의 백인이 오기 훨씬 전(이르면 1300년 전부터, 늦어도 220년 전에)에 나타났으며, 유럽인들이 온 뒤 499년 동안 잊혀졌다가 이제야 다시 흔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고학 유물과 유적만 놓고 본다면 아마존 원주민에게 고대사/중세사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유적과 유물이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면, 그 문화의 성격은 어땠는가? 오늘날에도 아마존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마을이었는가, 아니면 보다 복잡한 사회였는가? 그 물음에 대답하려면 유럽인이 남긴 기록을 살펴봐야 한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북미(흔히 우리가 아는 바와는 달리, 아스텍 제국과 톨텍 왕국이 있었던 메히코[영어 이름 멕시코’]는 엄연히 북미에 속한다)나 중미(마야 문명)나 남미(흔히 잉카로 알려진 타완틴수유제국)는 달리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고, 그래서 역사를 되풀이해서 외우거나 말로만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유럽 백인들이 와서 원주민을 죽이거나 내쫓기 시작하자, 이들의 역사/문화는 이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백인 이민자들은 이들의 역사/문화/풍습을 애써 보존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부추겼다.

 

이는 옷감이나 가죽에 글자를 써서 기억을 보존하는 것을 막았던 드루이드(로마가 서유럽을 정복하기 전, 켈트족의 종교를 책임졌던 사제)들 때문에 일단 로마가 갈리아를 점령하고 게르만족이 남부 독일에서 켈트족을 내쫓자 켈트족의 신화와 종교와 문화와 풍습을 다룬 정보들이 거의 다 사라져 버린 것과 비슷하다(켈트족은 에이레[영어 이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만 자신의 역사/신화/전설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 두 지역은 모두 로마군이 점령하지 않은 - 또는 점령하지 못한 - 지역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지닌 켈트족에 대한 지식은 그들의 적이었던 헬라스[:영어 이름 그리스’]/로마인이 남긴 거친 기록과, 로마인에게 점령되지 않았던[또는 영향을 적게 받았던] 켈트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 남긴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살아남은 아마존 원주민들의 구전 문학(말로 전해진 문학. 구비서사시라고도 한다. 신화나 전설이나 야사도 이에 포함된다 - 옮긴이)에서 과거 사건에 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들은 세세한 삶의 기록과 역사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해석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구전 문학도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찬란하긴 하지만 단지 간접적인 빛을 비춰 줄 뿐()”인 것이다. 이는리그베다마하바라타산해경이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신화를 담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의 내용을 모두 역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다행히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3~40년 전부터 남미 여러 나라와 만나기 시작한 아마존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보존하던 역사와 문화를 라틴 알파벳으로 적어서 남기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문화방송의 PD(제작자)이자 <아마존의 눈물>을 만든 김진만이 만난 비닌(마티스족)’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어서 포르투갈어를 배웠다고 말했다. 마티스족은 아마존의 일부분인 자바리 밸리의 주인으로 꽤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글자가 없어서 역사를 그저 말로밖에 전해지 못했던 것이다. 비닌은 이 사실이 안타까워서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라틴 알파벳을 익힌 것이다. 알파벳으로 포르투갈어를 적어서 마티스족의 역사를 남기면 그 글이 포르투갈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널리 퍼질 테고, 나아가 다른 말로도 옮겨져서 온 누리(전 세계를 일컫는 우리말)에 퍼질 테니까. 비닌과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말로 전해진 역사를 글로 남기면, 학자들이 아마존 원주민의 역사를 다시 쓰는 데 도움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아직 이런 시도가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책 한 권을 다른 나라의 말로 옮길 때에도 몇 해는 걸리는데, 비닌이 마티스족의 역사를 알파벳으로 적겠다고 마음먹은 건 겨우 두 해 전이다. 앞으로 비닌 같은 아마존 원주민들이 더 나온다 하더라도, 그동안 아마존 원주민들의 말이 사라지지 않아야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쉬운 일이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분간은 알파벳으로 쓰여진 유럽의 탐험가, 보물 사냥꾼, 그리고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역사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기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절(서기 16세기부터 서기 19세기 초까지의 기간을 일컫는 말 - 옮긴이)에 쓰여진 유럽 인들의 보고서는 역사 자료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저자들은 대개 인디언(아마존 원주민 - 옮긴이)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이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몰랐다. 또한 원주민 풍속에 대한 묘사보다는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경력을 위해, 어떤 이들은 정치적 점수를 따기 위해 이런 보고서들을 썼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 기록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신중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실제 사건을 밝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의 기록에 선입견과 과장과 오해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과 함께 보고 들은 사실도 섞여 있기 때문에, 이 기록들을 접하는 사람은 사실만 추려내서 읽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이 글에서는 그 점을 밝히고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한다.

 

이제 오늘날의 페루에서 브라질(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라질 땅이 된 아마존)로 간 적이 있는 유럽 백인의 기록을 펼쳐보자. “최초로 아마존에 대한 기록을 남긴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이하 카르바할’ - 옮긴이)의 보고서는 글이 씌어질 당시부터 부정확하고 이기적인 해석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서기 1500년경 스페인(에스파냐 - 옮긴이) 수도사 카르바할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 잉카 제국 선교를 위해 남아메리카로 갔다. 그는 아타우알파 왕이 몰락한 지 5년 뒤인 1536년 남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카르바할은 서기 1541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곤살로 피사로가 엘도라도를 찾아 떠난 원정에 군목으로 부대와 동행()”했는데, 이 때 에스파냐 군은 말과 타완틴수유(잉카 제국의 정식 국호)인 노예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먹을 것까지 떨어져서 곤경에 처했다. 곤살로 피사로(이하 피사로는 곤살로임 - 옮긴이)의 부사령관이자 사촌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나포 강(아마존 강의 상류에 있는 지류 - 옮긴이) 아래쪽에 있는 부유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피사로에게 원정대의 배를 타고 거기로 보급품을 얻으러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피사로는 허락했고, “오레야나는 1541122659명의 부하를 데리고 출발했다. 그 중에는 카르바할도 있었다().” “오레야나와 그의 부하들은 5개월 동안 아마존 강을 따라(오늘날의 아마존 분지로 - 옮긴이) 내려갔고 카르바할은 매 순간을 기록했다().” 그는 우리는 가죽으로 된 말 안장의 깔개까지 먹었다. 신발의 앞창은 물론 신발 전체까지 먹었다. 굶주림만한 반찬은 없었다.”고 적어 그들이 탐험중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정도()”를 드러내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원주민들과도 자주 마주쳤으며, 이는 종종 적대적이었다. 강을 따라 이어진 원주민 지역을 지나는 것은 마치 성난 벌떼 옆을 지나는 것과 같았다. 인디언(아마존 원주민 - 옮긴이)들은 북소리와 전령들을 통해 낯선 이들의 침입에 대해 미리 경고를 받고는, 나무 뒤와 숨겨둔 카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독침 사격을 날리고는 철수했다. 강을 따라 몇 킬로미터 더 내려가면 또 다른 인디언 부족(민족 - 옮긴이)이 기다렸다가 공격했다. 탐험대는 음식을 얻는 경우(쉽게 말해 먹을거리를 빼앗으려고 마을을 치는 경우 - 옮긴이)를 빼고는 가능한 모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항해했다. 그럼에도 세 명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카르바할은 얼굴에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

 

카르바할은 이렇게 자신들을 죽이려고 혈안(血眼. ‘핏발 선 눈이라는 뜻. 눈이 빨갛다는 이야기다. ‘눈이 뒤집혔다.’. ‘비정상적으로 몰두한다.’와 같은 뜻이다 - 옮긴이)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기록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풍요로운 땅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페루 - 브라질 국경 지역으로 가면서 더 멀리 갈수록 인구가 밀집(빽빽하게 모여 있음 - 옮긴이)하고 살기 좋은 지역이 나타났다.’고 적었다. 3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한 광활한 지역에는 마을에서 마을까지 활 한 번 쏠 거리도 안 될 정도로 사람이 밀집해 살았다. 강 아래쪽에서 마주친 인디언 부족(아마존 원주민 - 옮긴이)은 수없이 많은 거대한 정착촌과 아름답고 비옥한(기름진 - 옮긴이)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마을들이 있었다. 그런 마을을 20곳 넘게 지나친 적도 있었다. 카르바할은 또 다른 곳에서 거의 집과 집 사이 공간이 없이 25킬로미터 이상 펼쳐진 부락(마을 - 옮긴이)을 보았다.

 

바다에서 6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타파호스 강어귀에서, 오레야나의 군대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큰 인디언 부락과 마주치게 됐다. 이 부락의 집과 정원들은 강둑을 따라 230킬로미터 정도나 펼쳐져 있었다. 강에서 내륙 쪽으로 5-9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매우 커다란 몇몇 도시가 보였다. 그곳에서 2,30명씩 2백 척의 전투 카누에 나누어 탄 4천여 명 이상의 인디언 전사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맞이했다. 또 수천 명이 넘는 인디언들이 남쪽 둑 절벽 꼭대기에서 동시에 야자수 잎을 흔들어 축구 관중석에서처럼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자, 카르바할은 섬뜩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상세한 상황을 기록했다.

 

화려한 깃털 망토를 입은 인디언 병사들이 카누를 타고 다가왔고, 카누 군단 뒤로는 뿔피리, 호각, 그리고 세 줄짜리 현악기를 든 군악대가 떠 있었다. 음악이 연주되자 인디언들은 공격을 개시했다. 스페인 인들은 화력으로 이들을 놀라게 해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1546, 오레야나는 두 번째로 행해진 실패한 아마존 탐험(‘침입이나 염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 옮긴이) 도중에 죽었다. 카르바할은 리마(페루의 도시 - 옮긴이)에서 성직자로 근근한 명성을 얻었고, 80세까지 살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 오레야나의 탐험도, 카르바할의 기록도 당시 합당한 관심을 얻지 못했다. 사실 카르바할의 기록은 1894년까지는 공식적으로 출간되지도 못했다(그러니까 그 기록이 348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 옮긴이). 이런 무관심의 이유는 오레야나가 정복한 게 아무것도 없이 기껏해야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을 뿐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카르바할의 기록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던 에스파냐 백인들은 상당히 완고해서, “그가 원고를 끝내고 나서 얼마 후, 역사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는 이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라고 비웃었다().”

 

이후의 학자들도 카르바할의 기록을 믿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저주 받은 기후(찌는 듯이 더운 날씨 - 옮긴이), 불모의 땅(영양분이 거의 없는 거친 흙 - 옮긴이), 단백질의 부족 같은 압박 때문에, (아마존 강 - 옮긴이) 유역에서 대규모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마존은 카르바할이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분주하고 사람이 밀집한 곳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마존은 더워서 인간이 활동하기가 힘들고, 복잡한 문화와 사회가 나타나려면 대규모로 농사를 지어서 많은 곡식과 푸성귀(채소를 일컫는 순우리말)와 과일을 거둘 수 있어야 하는데(먹고 나서 남는 게 있어야 그걸 바탕으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고, 그래야 농사와 장사로 문명을 일으킬 수 있다) 흙이 기름지지 않아서 그럴 수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흔히 아마존 지대에는 커다란 사냥감들이 많이 서식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탁 트인 초원보다도 더 희귀하다(해리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에 필수적인 힘을 얻기가 어렵고 이는 복잡한 문화가 나타날 수 없는 조건이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학자들이 내건 카르바할의 기록을 믿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관점은 반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지리학자, 역사학자들이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토착 문화가 환경에 미친 영향을 재평가하게 되면서, 관심은 자연히 열대 우림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마존 분지 역시 원주민 문명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믿는 학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마존 밀림이 달력 그림에 나오는 수백만 년 된 야생 지대가 아니라, 인구가 밀집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인디언 사회와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소개한 유적들이 직접적인 증거고, 카르바할의 기록은 그 유적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라는 이야기다.

 

즉 유적지가 아마존에 농사를 지으면서 한 곳에 눌러앉아 사는 사람들이 만든 복잡한 사회가 있었다. 그 사회는 유럽인이 오기 훨씬 전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카르바할의 기록은 - 비록 딱 한번 보고 말긴 했지만 - 그 사회의 규모가 아주 컸고 병사/군악대/장인(匠人)들이 자기 일을 나누어서 할 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카르바할 일행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마존 원주민을 만난 게 아니라, 점령한 타완틴수유 제국, 그러니까 오늘날의 페루에서 아마존에 풍족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곳으로 갔다. 그들은 페루 원주민에게서 정보를 얻었을 테고, 이는 에스파냐인이 오기 전에 아마존 원주민과 페루 원주민이 서로 교류하였음을 시사한다(만나지 않았다면 상대방이 풍족한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기록만 있고 유물과 유적이 없다면 이 사실을 의심해야겠지만, 이 경우에는 기록과 유적이 모두 있으니 유럽인이 오기 전의 아마존 역사를 고쳐 쓴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하지만 오늘날의 아마존 원주민들은 화전으로 먹고산다. 그들의 인구는 많지 않다. 만약 많은 인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들이 유럽인이 오기 전부터 농사를 지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반박할 것이다. 당연한 반박이다. 그럼 지금부터 유적과 기록이 증언하는 아마존의 고대사/중세사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생산수단과 생산양식에 대한 질문을 던질 차례다.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 열대우림이 우거진 열대나 아열대 지방의 흙이 겉모습처럼 풍요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마존 삼림에 독특한 다양성과 아름다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풍성해 보이는 천막은 메마른 토대, 즉 빈약한 토양을 덮고 있는 가면이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열기는 노출된 토양 표면을 깎아내리고, 광물을 씻어 내며, 유기 화학 물질을 분해한다. 그 결과 아마존의 붉은 토양은 풍화되고, 심각하게 산성화되며, 필수 자양분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바로 생태학자들이 열대 우림을 젖은 사막이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다().”

 

열대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양분이 온대 지역처럼 토양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토양을 뒤덮고 있는 식물군에 저장된다. 잎이나 가지가 떨어지면 그 안에 있던 탄소와 질소는 고도로 효율적인 열대 식물의 뿌리 조직을 통해 빠르게 재흡수된다. 그러므로 만일 벌목꾼이나 농부가 식물군을 개간하면 그 지역 토양의 자양분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라면 삼림은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생긴 구멍 같은 빈 공간을 재빨리 채워 손상을 최소한으로 유지한다. 하지만 빈 구멍이 너무 크거나 땅이 너무 오랜 시간 빈 채로 있다면, 태양과 비는 남아 있는 모든 유기 물질을 분해하고, 토양 표면을 마치 벽돌처럼 붉고 침투성이 없는 상태(물과 영양분이 스며들 수 없는 상태 - 옮긴이)로 구워 버린다. 그래서 토양은 거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열대 우림은 그 엄청난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나가는 것이다().”

 

기존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게 자칫 잘못하면 사막이나 황무지가 될 수 있는 열대 우림 지역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농사는 “‘나무를 베어 태우기’, 즉 화전 농업이었다. 농부는 도끼와 마체테 칼(중남미 원주민이 벌채 도구와 무기로 사용한 날이 넓은 칼)로 작은 밭을 개간한 뒤 찌꺼기들을 태우고 씨앗을 심는다. 타고 남은 재는 토양에 빠르게 양분을 공급해 농작물을 자랄 수 있게 한다. 농작물이 자라면서 정글은 급속도로 예전 모습을 되찾는다. 처음에는 잡초가, 그 뒤 성장 속도가 빠른 열대 수목이 자란다. 농부들은 삼림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 몇 년 동안의 수확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만이 인용한 메거스 박사의 설명).” 문제는 메거스가 인정하듯, 벌목 화전은 거대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식량은 생산할 수 없다는 중요한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한 식구나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농사지을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도 영원히 땅을 일구지는 못한다. “반면에 보다 집약적인 농업을 하면 잉여 농산물은 생산할 수 있지만, 지속이 불가능하다. 경작된 땅은 흙을 구성하는 영양분들이 노출되어 단 10년의 기간에도 완전히 파괴된다. 생태학자들은 화전을 한다 해도 삼림이 이전 상태를 회복하기까지는 백 년 정도 걸릴 수 있다고 말한다. 유럽 식 농업은 메가니뇨(가뭄/산불을 대규모로 불러일으키는 기상현상 - 옮긴이)에 취약할 뿐 아니라 삼림 토양을 영원히 황폐화시킬 수도 있다().” ‘흙을 기름지게 하면서 동시에 생산량도 올리고, 숲을 지킬 수도 있는 방법이 아니면 아마존에서 복잡한 사회가 나오는 것(그리고 농사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유적과 카르바할의 기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온다. 외부인이 아마존 고유의 농법으로 여기는 화전 농업은 유럽인이 오기 전에는 없었으며, 아마존 원주민은 채소가 아니라 옥수수와 과일나무를 길렀고, 심지어 아마존 열대 우림의 일부와 그 밑바탕이 되는 기름진 흙도 직접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사실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많은 고고학자들은 나무를 베어 불에 태우는 방식의 농업을 생태학 교과서에서 묘사되듯이 원주민의 전통적인 방식이라기보다는 유럽 기술을 통해 더욱 널리 퍼지게 된, 상대적으로 현대적인 기술로 보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바로 돌도끼다.

 

세계에서 가장 울창한 숲에 사는 아마존 분지의 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많은 나무를 없애야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한 그들의 기본적인 도구는 돌도끼였다. 불행히도 돌도끼는 정말 형편없는 도구다. 돌도끼로는 나무를 벤다기보다는 그저 나무 밑둥의 일부를 때려 나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까지 밑둥을 약하게 만드는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존 지역에 위치한 마나우스 시 외곽에서 한 연구가는 내게 그 지역에서 만든 전통 돌도끼의 복제품으로 커다란 브라질 호두나무를 자르게 했다. 여러 번의 타격 끝에 나는 나무 밑둥에 조그만 홈을 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마치 대륙을 공격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 연장은 정말 형편없어요.’

 

1970년대에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로버트 카네이로는 철기 출현 이전에 밭 개간에 필요했을 노동력을 측정했다. 그는 페루, 브라질, 베네수엘라의 무성한 숲에서 사람들에게 돌도끼를 주어 작업하도록 시켰다. 많은 나무들이 직경(지름 - 옮긴이)1.2미터가 넘었다. 카네이로의 실험에서는 직경 1.2미터짜리 나무 한 그루를 원시적인 돌도끼로 넘어뜨리는 데 115시간이 걸렸다. 매일 8시간씩 3주 동안 일하는 것에 해당된다. 쇠도끼를 사용한 사람들은 비슷한 크기의 나무를 쓰러뜨리는 데 3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돌도끼로 통상적인 화전의 크기인 1,800평의 대지를 개간하는 데는 하루 8시간씩 153일을 일하는 것에 해당하는 시간이 걸렸다. 반면 쇠도끼로는 8일이 걸렸는데, 거의 20배나 빠른 속도였다. 고고학자 스티븐 베커만의 조사로는, 아마존 화전민들은 숲이 다시 무성해질 때까지 평균 3년 동안 밭을 일굴 수 있었다. 이들이 또한 사냥을 하고, 다른 식량을 찾아다니고, 집과 울타리를 짓고, 자신들의 기존 농장을 유지하고, 그 밖의 수많은 다른 일들을 해야 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떻게 3년마다 수 개월 동안 계속해서 나무를 두들겨 새로운 밭을 개간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고고학자 윌리엄 데네반은 전체적으로 보아 금속 도구가 벌목 화전 방식을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나무를 베어 불태우는 방식의 농업이 인디언들이 자연과 지속적인 조화를 이룬 오래된 풍습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혹은 전부 신화에 불과하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지만 그에 반()하는(거스르는 - 옮긴이) 증거는 상당히 많고, 그저 단순 논리로 생각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증거도 있다.’ 아마존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간주된 벌목 화전 농업은 사실상 현대의 침입인 것이다().” 벌목 화전은 쇠붙이로 된 도구가 있어야 시도할 수 있는데, 아마존에는 유럽인이 오기 전에는 쇠붙이가 없었고, 유럽인이 오고 난 다음에야 쇠도끼/쇠칼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인이 오기 전 아마존 원주민들이 화전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는 가설은 수정이나 폐기가 불가피하다.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만 더하자면 아마존의 화전 농법은 유럽 식 도끼, 그리고 유럽 질병의 부산물이다. 유럽 질병이 인디언 집단의 수를 엄청나게 감소시켜, 생산력은 적지만 노동력도 적게 드는 이 농법을 채택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화전 농법을 하는 아마존 원주민인 야노마미족이 금속 도구를 얻기 시작한 시기가 서기 17세기고, 그 때부터 화전 농법을 통한 일시적인 정착을 하기 시작한 사실이 좋은 예다. 너무 깨끗하게 살던 원주민들이 위생 관념이 철저하지 못하고 병을 잘 앓았던 유럽인들로부터 병이 옮아 많은 사람이 죽자, 그들은 마을과 밭과 과수원을 버리고 숲으로 달아났고, 이후 적은 수로 무리지어 1백년 정도 떠돌다가 유럽인들로부터 쇠도끼와 쇠칼을 얻어 자립할 수 있게 되자 나무를 베고 숲을 태우는 새로운 농법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다. 머릿수가 줄어든 대신 철기라는 새로운 도구가 일을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아마존 역사에 대한 가설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잘못된 토대 위에 세워졌다.

 

화전도 유럽식 농법도 아니라면 아마존 원주민이 지었던 농사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쯤(서기전 2000년경. 이 때 이라크 남부에서는 수메르 문명이 막 멸망하고 있었고 나일 계곡에는 자신을 케메트라 부르는 이집트 왕조가 있었으며, 파키스탄에서는 인더스 문명이 번성했고 북중국에는 상나라가 있었다 - 옮긴이) 아마존 하류의 인디언들은 최근의 계산에 따르면 최소한 138가지의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베니 지역에서 최초의 유적이 나타나기 즈믄(1천을 일컫는 순우리말) 해 전에, 아마존 상류에서 최초의 유적이 나타나기 2200년 전에, 브라질 아크레 주에서 복잡한 사회가 나타나기 3000년 전에 이미 아마존에서 농경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먼저 농경이 시작되고, 그 다음 문명이 나타난다.’는 역사학의 기본 법칙과도 들어맞는다. 이 농사는 다른 지역의 그것처럼 곡식과 푸성귀(채소를 일컫는 순우리말)를 가꾸는 것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아마존 원주민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국립 브라질 아마존 연구소의 인류 식물학자 찰스 클레멘트에 따르면, 초창기 아마존 사람들은 분명 빗방울 물리학의 딜레마(나무를 베거나 식물을 없애면 흙의 영양분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 사라져 버리고, 뒤이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어 흙이 단단하게 구워져 버리는 일 - 옮긴이)를 피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이들의 해결책은 삼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삼림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적응된 종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조(滿潮 : 밀물 - 옮긴이)때 수면 높이의 끝에 해당하는 절벽 위에, 즉 낚시를 할 만큼 물에 가깝지만 홍수를 피할 만큼은 높은 곳에 작업장을 세웠다. 그리고 농업의 중심을 연중 작물(벼나 밀처럼 사람이 직접 심어서 가꾸어야 하는 곡식, 또는 배추나 무 같은 푸성귀를 가리킨다. 한 해 안에 길러서 거두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 옮긴이) 수확이 아니라 다양한 아마존 수목군(나무들 - 옮긴이)에 두었다().”

 

물론 클레멘트의 생각으로는, 아마존의 초기 거주민들이 힘들게 돌도끼로 작은 밭들을 개간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숲이 다시 자랄 때까지 농장에 곡물만 재배하기보다는, 선별된 수목 작물(과일나무 - 옮긴이)을 연중 재배 작물과 함께 심고 이들을 번갈아 유지했다. 아마존에 알려진 138종의 재배 작물 가운데 절반 이상은 수목종이다. ‘재배의 정의에 따라 그 비율은 80퍼센트까지 높아질 수도 있다. 사포딜라, 칼라바시, 투쿠마, 바바쿠, 아카이, 야생 파인애플, 코코야자, 아메리카 기름야자, 파나마 모자 야자 등, 아마존의 풍부한 과일, 견과류, 야자류는 아주 유명하다. 클레멘트는 말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숲 사이를 걸으며 끊임없이 나무에서 열매를 딸 수 있다는 데 놀라는데, 그건 사실 사람들이 일부러 심었기 때문이예요. 방문객들은 오래된 과수원 사이를 걷고 있는 거죠.’ ().”

 

이 나무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복숭아 야자라는 나무다. “현기증 날 만큼 높고 곧은 복숭아 야자는 가시로 덮인 줄기가 10개가 넘는데다 나무 밑둥 주변을 감싸는 뾰족한 받침으로 보호 받는다. 따라서 인공적인 보호가 거의 필요 없다. 복숭아 야자의 목재는 매우 단단해서 베니에서는 톱니로 사용될 정도였다. 오렌지색이나 붉은색을 띠는 열매 다발은 잎의 아랫부분에 축구공처럼 매달려 있다. 열매는 기름기가 많고 베타카로틴(몸 안에서 비타민 A로 바뀌는 물질. 눈의 건강을 유지시켜 주고 몸 안에 머무르는 해로운 산소를 없앤다 - 옮긴이), 비타민 C, 그리고 놀랍게도 단백질이 풍부하다. 열매를 말린 뒤 흰색 또는 분홍색 과육(果肉. 과일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 - 옮긴이)을 분말로 만들어 얇은 토티야 같은 케이크를 만들 수도 있고, 끓이거나 훈제하면 전채 요리가 된다. 삶아서 발효시키면 맥주가 된다 수액(나무에서 나오는 물 - 옮긴이)으로는 일종의 와인(포도주 - 옮긴이)도 만들 수 있다. 일 년에 이모작(곡식이나 푸성귀나 열매를 두 번 거두어들이는 일 - 옮긴이)도 드물지 않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으로 보면 통상적으로 쌀, , 옥수수보다도 훨씬 생산성이 높다. 복숭아 야자는 3년에서 5년생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해 70년 동안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딸기처럼 비정기적으로 싹을 틔우는데, 약간만 돌보면 이 싹들은 가장 좋은 야자 열매로 수확될 수 있다. 내가 먹어본 바로는 아주 맛있었다. 이 나무의 학명은 박트리스 가시파에스인데, 푸푼하, 카히페이, 템베, 페히바예, 촌타두로, 피후아요 등 2백 가지가 넘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렇게 다양한 명칭은 여러 문화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클레멘트는 아마존 분지 전체의 복숭아 야자나무를 조사해 보았다. 그는 열매의 크기를 포함해 몇몇 형태적인 특징이 베니 근처의 서부 아마존 시작 부분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복숭아 야자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클레멘트의 동료 호르헤 모라우르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 인디언들이 페루의 아마존 지역을 포함한 여러 지역의 야자를 교배함으로써 지금의 복숭아 야자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기원이 어디든, 사람들은 수천 년 전에 이 종을 재배하기 시작해 처음에는 아마존 일대에, 그 뒤로는 카리브 해(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바다. 쿠바/자메이카/아이티/도미니카공화국/푸에르토리코 섬/벨리즈/온두라스/니카라과/코스타리카/파나마/콜롬비아/베네수엘라/그레나다/세인트크리스토퍼 네비스/엔티가 바부다/도미니카 연방/바베이도스/세인트루시아/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트리니다드 토바고로 둘러싸여져 있다 - 옮긴이)와 중앙아메리카로 급속도로 퍼뜨렸다.

 

복숭아 야자는 최소한 기원전(서기전 - 옮긴이) 1700,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에 코스타리카(중앙아메리카 남쪽에 위치한 공화국)에 이르게 되었다. 17세기의 한 저자는 콜럼버스 시대에 이르러 아메리카 토착민들은 이 열매에 대해 아내와 아이 다음으로 높은 가치를 두었다.’고 썼다. 클레멘트는 복숭아 야자가 고대 아마존의 옥수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옥수수와는 달리 이 나무는 스스로 번식할 수 있다. 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그 유용성을 잘 알 수 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아마존 지역의 많은 인디언들은 자신의 농장(- 옮긴이) 마을을 버려 유럽의 질병과 노예 교역을 피했다. 이들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숲 속에 숨어 자유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윌리엄 발레는 이 시기를 농업의 퇴보기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쫓기던 사람들은 당연히 농사일을 포기하고 닥치는 대로 (풀을 - 옮긴이) 뜯어 먹으며 살아남았다. 수많은 유럽 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아마존 야생 지대의 석기 시대 부족민이라는 이미지는 상당 부분 유럽 인들이 만들어 낸 결과에 불과하다. 이들은 소위 야생 지대가 그들 선조가 만든 과수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휴한지로 불리는 이 오래된 숲들을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고삼림(물이 잘 빠지는 토양의 원시림)으로 분류해 왔다. 하지만 이 숲들은 인간의 경작 활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아마존 원주민이 유럽인이 오기 전에 농사를 지었다면 그것은 과일나무를 심어서 가꾸는 농사였을 것이고, 나무가 자라서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흙의 영양분이 비에 씻겨 내려가거나 햇볕에 흙이 구워져 단단하게 굳는 일을 피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나무의 뿌리는 흙을 붙들고 물을 가두기 때문에 흙과 물이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고, 광합성 작용 때문에 숲에서 산소가 뿜어져 나와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농사를 지으면서, 환경도 지키는 일을 해 왔던 것이다.

 

중앙아메리카 사람들이 옥수수를 만들어 내고, 안데스 산맥의 원주민들이 감자를 길렀듯이, 아마존 원주민들은 복숭아 야자를 길렀는데, 이 식물의 열매는 지방과 비타민과 단백질이 많이 들어있어서 영양 보충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한 해에 두 번 거둘 수 있으며, (수확량이 많은) 벼나 옥수수보다도 수확량이 많고, 한 그루를 심으면 70년 동안이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게다가 가꿀 때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식물을 길러서 먹는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렸다거나 적은 인구만 먹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각각의 유적지에서 나온 5, 6, 40만이라는 숫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흔히 아마존 지대에는 커다란 사냥감들이 많이 서식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탁 트인 초원보다도 더 희귀하다(해리스).”는 말은 사실이지만(해리스 교수와는 달리 아마존에 복잡한 사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안나 루스벨트 박사도 아마존에 최초로 찾아온 사람들은 아마존에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큰 짐승을 사냥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야자수처럼 단백질과 기름이 풍부한 야생 식물은 숲에서 저절로 자라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간헐적으로 또는 특정한 계절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고기를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효과가 떨어진다(해리스).”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해리스 교수의 말과는 달리 야자수숲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아마존 원주민들이 심은 것이었고, 그 열매는 간헐적으로 또는 특정한 계절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심으면 늘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야자의 단백질만으로는 모자란다는 해리스 교수의 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마존에는 단백질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먹을거리가 있었다. 바로 아마존 강의 1,500여 종의 물고기(만이 인용한 루스벨트 박사의 말)”, 특히 “1미터 76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에(김현철 PD)” “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나가는 것도(김현철 PD의 증언. 이하 김현철)” 있는 삐라루꾸라는 물고기와(이 물고기가 가장 큰 경우는 몸길이가 3미터, 무게는 150킬로그램까지 나간다고 한다.”), “60~70센티미터쯤 되는 아로와나(김현철)”라는 물고기였다(아로와나는 흔히 관상어로 알려졌지만, 아마존에서는 이 물고기도 먹는다. 이 물고기는 다 자라면 몸 길이가 1.2m나 되기 때문에 식용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다). 문화방송의 취재진이 만난 와우라족의 말에 따르면 아마존에 댐이 생기기 전에는 물고기 가운데 그 크기가 사람만 한 것도 많았(김진만)”다고 한다. 와우라족 노인은 취재진에게 예전에는 물고기 잡기가 수월해지는 건기가 오면 온 부족민들이 각자의 활과 화살을 들고 강기슭에 모여 축제를 열었다.”축제가 끝날 무렵 모든 부족민이 강 중앙을 향해 무작위로 활을 쏘면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화살에 맞아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들은 고기를 적게 먹는 대신 물고기를 많이 먹어서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연구결과를 따르건 그들의 식생활이 풍성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들이 곡식을 아예 안 기른 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조금 전(서기 5~6? 대략 서기 1세기 초 - 옮긴이)부터 아마존 강 중심부와 하류 지역은 극심한 문화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때 안데스 지방에서 옥수수가 들어왔고, 정착촌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학자들이 찾아낸 복잡한 사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서남부인 베니 지역에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복잡한 사회가 있었다!). 그러니까 복숭아 야자를 바탕으로 많은 인구를 먹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보다는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역시 많은 수확량을 약속하는 곡식인 옥수수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발전하여 복잡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아마존 원주민들은 옥수수밭을 과수원과 함께 일구어서 숲을 파괴하거나 흙의 영양분을 다 써 버리는 일을 막았고, 이들을 모두 유지함으로써 많은 곡식과 과일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벼라는 수확량이 많은 작물을 기르던 조선 사람들이 감자와 옥수수와 고구마라는 작물을 새로 들여왔기 때문에 더 많은 곡물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를 늘리고 음식문화를 보다 다채롭게 만들었던 사실과 비슷하다. 서기 18세기 판노니아 지방(발칸 반도의 일부분)의 기록을 보면, 호밀은 한 알을 심어서 여섯 알을 거둘 수 있는데(내가 예전에 보리 이삭을 주워 직접 세어 본 바에 따르면 보리는 한 알을 심어서 열 내지 열두 알을 거둘 수 있었다) 옥수수는 한 알을 심어서 자그마치 여든 알(!)을 거둘 수 있었다. 옥수수가 호밀보다 열세 배, 보리보다는 여덟 배나 높은 생산성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곡물을 받아들인 사회가 먹을 것이 모자라서 굶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놀라셨다면 다음에 소개할 연구결과는 여러분에게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새로 열리는 충격을 줄지도 모른다. 아마존 원주민이 아마존을 관리했으며, 아마존의 숲 자체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마라호 섬(아마존 강 하구河口 옆에 있는 큰 섬 - 옮긴이)의 남동쪽 본토에 있는, 카포르 족(아마존 원주민 가운데 하나 - 옮긴이)이 거주했던 지역에서는 수 세기에 걸친 개량을 통해 삼림 사회가 크게 바뀌었다. 윌리엄 발레의 식물 목록에 따르면 카포르 족이 관리한 숲에서는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종의 거의 절반 정도가 아직도 인간에 의해 식량으로 사용된다. 최근 들어 관리되지 않은 유사한 숲에서는 그 수치가 20퍼센트에 불과하다.

 

1989년에 출간되어 널리 인용된 보고서에서 발레는 물이 범람하지 않는 아마존 삼림의 최소한 11.8퍼센트, 8분의 1정도는 인간에 의한 발생, 즉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한 바 있다. 오늘날 몇몇 연구가들은 이 수치를 보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발레도 그중 하나로, 그는 10년 후 그 추정치를 더 높였다. 클레멘트는 내게 말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아마존 밀림이 모두 다 인간이 만든 거라 생각합니다.’

 

고고학자 클라크 에릭슨도 마찬가지로, 남미의 저지대 열대 삼림은 이 지구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 예술 작품 중 하나라고 볼리비아에서 내게 말했다. ‘내 동료들 중 몇몇은 이 견해가 꽤 급진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그렇게 믿습니다.’ 고고학자 피터 스탈에 따르면, 많은 식물학자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 세계로 사람들이 상상하고 싶어하는 아마존이 사실은 수천 년 동안 사람에 의해 관리되어 온 장소라고 믿는다().”

 

이 학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하고자 한다. “엄밀히 말해 아마존 분지는 아마존 강과 그 지류들의 유역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아마존 분지는 아마존 밀림 전체가 아니란 말이다. “반면 아마존은 서쪽(원문에는 동쪽으로 나왔으나 지도에서 확인한 결과 안데스 산맥은 아마존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쪽으로 고친다. 책을 우리말로 옮길 때 착오가 일어난 듯하다 - 옮긴이)으로는 안데스 산맥, 북쪽으로는 기아나 순상지(남미 동북부의 광대한 열대 지역), 남쪽으로는 브라질 순상지로 둘러싸인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중 어떤 것도 아마존 열대 우림 지대와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우선 아마존의 모든 지역에 비가 내리는 건 아니다. 어떤 곳의 강수량은 뉴욕의 연간 강수량보다 더 많지도 않다. 무엇보다, 아마존의 3분의 1은 삼림이 아니라 초원이며, 그중 볼리비아의 베니가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아마존 강과 그 지류의 범람원은 아마존 분지 전체의 5-10퍼센트를 이룬다. 오직 아마존의 절반 정도만이 고지대 삼림이다. 이곳에는 외부인들이 아마존이라고 하면 연상하듯이, 머리 위로 엉켜 있는 덩굴 식물, 겹겹이 드리워진 나뭇가지에 나비만한 딱정벌레와 새만 한 나비가 존재하는 곳이다().”

 

참고로 아마존의 초원지대는 유럽계 이민자들이 아마존에 목장을 만들려고 나무를 베고 숲에 불을 지르기 전부터 있었다. 게다가 숲이 저절로 자라려면 비가 많이 내려서 물이 많아야 하는데 아마존에는 강수량이 적은 곳도 있다. 물이 많은 아마존 강을 낀 지역은 아마존 분지뿐이고 그나마도 분지 전체에서 5-10퍼센트밖에 안 된다. 아마존의 숲은 그런 곳에서 벗어난 지역에 있다. 그렇다면 아마존이 원래 인간이 들어오기 전에는 대부분이 초원이었다가 인간이 들어와서 과일나무를 심고 그 밖의 다른 나무들을 심어 가꾼 뒤부터 숲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학설이 완전히 황당한 것은 아닌 셈이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과수원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존이라는 자연환경자체를 만들고 가꾸었다. ‘자연에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자연환경에 맞추어서 사는 아마존 원주민이라는 생각은 학자들이 밝힌 현실과 맞지 않다. 기존의 아마존 원주민 상()은 고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농사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해도 흙이 기름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열대 우림 지역의 흙(아마 원래는 초원이었을 것이다)은 그다지 기름지지 않은데, 아마존 원주민은 어떻게 많은 복숭아야자나무를 심고 옥수수를 가꿀 수 있었을까? 여기에도 여러분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실이 숨어있다. 아마존 강은 주기적으로 흘러넘쳐 흙에 영양분을 날라다 주었고, 아마존 원주민은 원래는 기름지지 않았던 흙을 기름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아마존 인디언들은 말 그대로 그들의 발아래 땅을 창조했다().” 이번에는 이 두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춰 보자.

 

아마존 강은 매년 범람하지만 자연재해가 아니라 그저 계절적 순환이다. 건기에 1.5 킬로미터 폭이었던 물줄기는 우기에는 50 킬로미터 정도로 넓어진다. 다섯 달 뒤에는 물이 빠지면서 비옥한 퇴적층을 남기게 된다().” 이는 나일 강이 흘러넘치면서 사방이 물에 잠겼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는 물이 빠지면서 그 자리에 영양분을 가득 담은 흙이 쌓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농경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하지만 강에서 떨어진 지역은? 그런 지역에서는 어떻게 농사를 지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전문가의 견해를 빌려야 한다. 지리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윌리엄 우즈에 따르면, 아마존의 토질이 형편없다는 주장들은 1천 개도 안 되는 토양 샘플(표본 - 옮긴이)에 기초한 것이었다. 보통 일리노이 주(미국의 한 주. 아마존보다 좁다 - 옮긴이)의 한 시()가 매달 백여 개의 토양 샘플 분석을 받는 것에 비하면(따라서 일리노이 주 전체는 못해도 수백 개나 1천개 이상의 표본을 분석해야 하고, 미국 전체는 5만개 이상을 분석해야 한다 - 옮긴이) 놀랄 정도로 적은 데이터(자료 - 옮긴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1990년대 후반, 우즈를 포함한 몇몇 토양 연구가들은 아마존의 흙을 면밀히 측정해 결과를 취합(聚合 : 모아서 합침 - 옮긴이)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형편없는 토질을 지닌 황량한 지역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테라 프레타 도 인디오도 여러 군데에서 발견했다. 이것은 인류학자들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름지고 비옥한 검은 인디언 흙이다(농부와 지질학자의 말에 따르면, 가장 기름지고 식물이 잘 자라는 흙은 검은 빛을 띈다고 한다. 온갖 물질이 쌓여서 잘 썩었고, 그것이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옛 이집트인이 자신의 땅을 일컬은 말인 케메트검은 땅’, 그러니까 기름지고 식물이 잘 자라는 땅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아마존 전역의 농부들은 테라 프레타(검은 흙이라는 뜻 - 옮긴이)의 높은 생산성을 칭송한다. 어떤 농부들은 수 년간 최소한의 비료만으로 이 흙에서 농사를 지어 왔다. 그 가운데는 내가 방문했던 파파야 과수원 주인도 있는데, 그는 20년 동안 테라 프레타에서 순조롭게 작물을 재배해 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농장의 테라 프레타에 포함된 토기들로 미루어 볼 때 토양이 거의 1천 년 동안 그 자양분을 보유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존에 유럽식 농법을 도입하면 10년도 못 가 땅이 망가지는 현실과 견주어봤을 때 놀랄 만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테라 프레타 역시 주변의 질 나쁜 토양과 마찬가지로 혹독한 조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 자체가 매우 놀랍다고 독일 토양 지리학 연구소의 화학자 브루노 글라저는 말한다. ‘교과서에 따르자면, 거기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검은 흙(테라 프레타)은 아마존에 얼마나 깔려 있을까? “아마존 토양에 대한 세심한 조사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테라 프레타의 정확한 양과 분포는 아무도 모른다. 우즈는 테라 프레타가 아마존 유역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것이라 추측했는데, 이는 대략 프랑스 정도의 면적에 해당한다. 최근에 나온 훨씬 더 보수적인 학자들은 테라 프레타가 아마존 유역의 0.1-0.3 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수천 평방킬로미터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고 계산한다. 이 두 숫자들의 커다란 차이는 생각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수천 평방킬로미터의 농지로도 마야 중심부의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수치가 사실이라면, 서기 1491년 이전, 아니 그보다 50년 후인 서기 1541(카르바할이 아마존에 침입한 해)까지 아마존 원주민의 인구는 수백만 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오늘날의 아마존 원주민 인구보다도 많은 숫자다. 그렇다면 이제는 검은 흙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다시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자.

 

대부분의 넓은 테라 프레타 지역은 물이 넘치는 평원 가장자리의 낮은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대개는 6천 평에서 18,000평에 이르는 정도의 면적이지만 860만 평이 넘는 테라 프레타 지역도 있다. 검은 흙 층은 대개는 30-60센티미터 정도 깊이지만 1.8미터 이상 되는 곳도 있다. 고엘디 박물관의 디르세 컨이 실시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테라 프레타는 특정한 토양 형질이나 환경적 조건과 관련이 없으며, 이는 테라 프레타가 자연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테라 프레타를 인간이 만들었다는 또 다른 단서는 대개 테라 프레타 속에 섞여 있는 깨진 토기 조각들이다. 브루노 글라저는 내게 말했다. ‘그들(아마존 원주민들 - 옮긴이)은 수 세기 동안(실제로는 2천년 이상 - 옮긴이)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왔습니다. 하지만 토양을 망가뜨리기는 커녕 오히려 향상시켰어요.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릅니다.’()”

 

대체로 테라 프레타는 전형적인 열대 토양보다 농사에 유익한 인, 칼슘, , 질소(화학비료의 원료이기도 하다. 원래는 콩의 뿌리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물질이다 - 옮긴이)를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 유기 물질도 더 많고, 수분과 자양분 함유량도 더 높으며, 관리만 잘 하면 농업으로 인해 지력이 빠르게 고갈되지 않는다.

 

글라저는 테라 프레타가 장기간의 비옥함을 유지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숯이라고 말한다. 테라 프레타는 주변의 적색토(붉은 빛깔을 띈 흙. 영양분이 없어 기름지지 않다 - 옮긴이)보다 최대 64배나 많은 숯을 포함하고 있다. 유기 물질은 물에 씻겨 나가지도 다른 비()유기 화합물에 결합하지도 않고 오히려 숯에 달라붙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숯은 부분적으로 산화해 계속 자양분이 달라붙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저 숯을 흙에 섞는다고 테라 프레타가 되지는 않는다. 숯에는 자양분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고()영양의 투입, 즉 거북이, 물고기, 동물뼈 같은 거름이 필요하다고 글라저는 말했다.

 

코넬 대학의 테라 프레타 연구팀 소속 토양 생태학자 재니스 티스는, 특별한 토양 미생물이 테라 프레타를 지속적으로 비옥하게 하는 데 일익(한몫 - 옮긴이)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테라 프레타는 다른 삼림토(숲이 자라는 흙 - 옮긴이)보다 미생물 총량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이는 과학자들이 숯, 자양분, 미생물군을 섞어 질 나쁜 열대 토양을 테라 프레타로 변형시킬 수 있는 <패키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높여 준다.’

 

테라 프레타는 숯을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화전 농업의 부산물은 아니다. 우선 화전에서 발생하는 탄소는 대부분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공기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에 테라 프레타를 만들기에 충분한 숯을 발생시키지는 못한다. 대신, 인디언들은 토양 과학자 크리스 토프 슈타이너가 나무를 베어 태우기가 아니라 나무를 베어 굽기라고 명명한 과정을 통해 테라 프레타를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옛 인디언 농부들은 유기 물질들을 완전 연소시켜서 재를 만드는 대신, 불완전 연소를 통해 숯을 만들어 내어 이 숯을 흙에 섞었다.

 

나무를 베어 굽기는 토양에도 이득이 되고 나무를 베어 태우는 방법보다 훨씬 적은 양의 탄소를 배출시키는데, 이는 기후 변화에 있어 많은 의미를 지닌다. 나무들은 줄기, 가지, 잎에 어마어마한 양의 탄소를 저장한다. 나무가 죽거나 사람이 나무를 베어 내면, 탄소는 보통 대기 속으로 배출되어 지구 온난화를 촉진시킨다. 일본의 간사이 환경 공학 센터의 오가와 마코토(원문에는 마코토 오가와라고 나오나,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성이 먼저 나오고 이름은 나중에 나오므로 성인 오가와를 먼저 내세우는 쪽으로 고쳤다. 아마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사람이 원문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한다 - 옮긴이)가 행한 실험에서, 숯은 최고 5만 년까지 토양 속에 탄소를 보유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오가와는 내게 나무를 베어 굽는 것은 매우 영리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아는 한 유럽이나 아시아의 그 누구도 토양 내 숯의 성질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중세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을 재//볏짚과 섞어서 삭힌 뒤 그것을 거름으로 썼지만(이것을 퇴비라고 한다), 남아메리카의 아마존에서는 퇴비 대신 숯과 (그냥 버릴 경우 음식물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짐승/물고기의 뼈와 미생물을 섞은 뒤 그것을 다시 흙과 섞어서 흙을 기름지게 만드는 방법을 쓴 것이다. 숯과 뼈를 거름으로 썼다는 점에서, 이는 유래가 없는 방법이고 아주 독창적인 방법이며 효과적인 방법이다(나아가 똥오줌보다는 훨씬 깨끗한재료로 거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칭찬할 만하다!). 다행인 것은(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검은 흙은 지금도 아마존 원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꾸준히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리학자 수잔나 헥트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지금도 이런 방법으로 테라 프레타를 만들고 있다. 헥트는 중앙 아마존의 카야포족과 몇 년을 (함께 - 옮긴이) 생활하면서 그들이 잡초, 음식물 쓰레기, 농작물 부스러기, 야자 잎사귀, 흰개미 무덤 등을 태워 맨발로 밟아도 될 정도로 뜨겁지 않은 불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 헥트는 이곳에서는 태우는 것은 지속적인 활동이다. 카야포 족과 함께 사는 것은 어딘가에서는 항상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썼다().” 그렇다면 아마존 원주민이 아닌 사람들이 검은 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흙은 얼마나 기름질까? 해답을 얻으려먼 직접 만들어 보는 수밖에 없다. 여기 그 일을 시도한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테라 프레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예비 실험에서 크리스토프 슈타이너, 브라질 농업 연구소의 웬슬로 테이세이라, 바이로이트 대학의 볼프강 제크는 숯과 비료를 갖고 다양한 처리법을 적용해 심한 풍화를 겪어 나빠진 마나우스 외곽 지역의 토양들을 테스트(시험 - 옮긴이)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벼(원문에는 로 나오나, 쌀은 엄연히 벼에서 나온 낟알을 일컫는 말이고 는 쌀이 나오는 식물 자체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라는 말을 써야 한다. 영어로는 벼와 쌀이 모두 ‘Rice'라서 이 책의 옮긴이인 전지나씨가 잘못 옮긴 듯하다 - 옮긴이)와 당밀을 각 구역에 3년 동안 재배했다. 첫 해에는 대조군(실험 대상과 견주어보기 위해 일부러 실험 대상과는 다른 조건에 놔두는 물건이나 동물이나 사람 - 옮긴이)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던 것만 제외하고는 처리법들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두 번째 해에는 숯으로 처리된 구역은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숯만으로 처리한 구역에서는 작물이 거의 성장하지 않았지만, 숯과 비료를 결합한 구역은 비료()만 처리한 구역보다 무려 880퍼센트나 높은 성장을 보였다. 옛날 그대로의 미생물 비율을 재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 낸 테라 프레타는 그 정도로 생산성이 높았다().”

 

아마존 원주민들의 방법을 다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검은 흙을 만들어보았는데도 이처럼 생산성이 높은 흙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면, 당사자들은 이보다 더 기름진 흙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검은 흙은 이르면 기원전 360()”, 늦어도 서기 620년에서 720년 사이()”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하니, 이후 821~ 1901년 동안 이 흙과 흙을 만드는 사람들이 퍼져 나가면서 아마존을 풍요로운 숲이자 농장이자 과수원으로 만든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봐야 한다.

 

이 흙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 아마 처음에는 나무가 타고 난 다음 생긴 찌꺼기들과 물고기나 짐승의 뼈를 모아서 묻은 곳에 누군가가 과일의 씨를 버렸을 테고, 2년 후에 거기서 식물이 크게 자라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그 다음부터는 일부러 숯과 음식물 찌꺼기와 미생물을 흙에 섞은 뒤 씨앗을 심어보았을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처음에는 한 마을이, 다음에는 그 마을과 강()으로 이어진 다른 마을들이 이 흙을 만드는 방법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이 흙에 안데스 산맥에서 들어온 옥수수의 씨앗과, 베니 지역에서 들어온 복숭아야자의 씨앗을 심었고, 엄청난 수확량을 자랑하는 이 두 식물은 아마존 원주민들에게 풍성한 식량을 안겨다주었다. 당연히 아마존 원주민들의 공동체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고, 남아도는 식량과 사람을 바탕으로 복잡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

 

이미 살펴본 베니 지역이나 아마존 상류나 타파호스 강뿐 아니라 중부 아마존()”아마존의 긴 지류인 싱구 강(브라질 고원에서 솟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아마존강 하류와 합류하는 강 - 옮긴이) 상류()”에도 복잡한 사회가 세워졌는데, 전자의 광장은 적어도 4백 미터 정도의 길이였고, 수로는 길이 100미터 이상에 넓이는 5.4미터, 깊이는 1.8미터 정도였다. 이는 사실상 크고 지속적인 정착촌이었던 것이다().” 후자를 세운 사람들은 서기 “1250년과 1400년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마을들 주변에 다리, 강물을 차단하는 댐, 연못, 높이 돋운 둑길, 운하를 비롯해 여러 구조물들을 만들었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뿐 아니라 다른 어떤 지역의 복잡한 현대 사회의 구조물과도 견줄 만한, 대단히 정교하게 구축된 환경이었다().” 카르바할은 이 사회에 발을 들인 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적었던 것이다.

 

물론 아마존 원주민의 복잡한 사회는 비교적 늦게 나타났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그리고 안데스 지역에서(마이클 우드 기자. 이하 우드)” “농촌이 나타난 시기는 서기전 3000년이지만, 아마존에서 가장 일찍 나타난 복잡한 사회인 베니의 정착촌은 그보다 2000년 후인 서기전 1000년에야 나타났다. 그리고 아마존 상류나 중류의 복잡한 사회는 베니보다도 늦게 나타나서, 서기 200년 쯤 되어야 최초의 정착촌이라고 할 만한 사회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글자가 없이도, 길들인 짐승이 없이도, 쇠붙이가 없이도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냈으며 이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단순히 유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규모를 늘렸고, 그러면서도 자연환경을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살기 좋게 바꾸기까지 했다. “광활한 경작지가 아마존 유역에도 있었다는 주장(우드)”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사실이며, 경작지 뿐 아니라 작은 나라라고 부를 만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는 인류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업적이며 성취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가 왜 사라졌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유럽인이 질병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아마존 유적을 연구하는 연구팀은 5세기 전 유럽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이후 질병 확산 등으로 인해 지역들은 인구 급감현상을 보이다 결국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뉴시스>의 정옥주 기자).” 실제로 유럽인의 질병은 아마존 원주민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한 예로 백인들과 함께 들어왔던 각종 질병(나병/중풍/혼수상태/무른궤양 등)으로 남비콰라 족(아마존 원주민 가운데 하나 - 옮긴이)은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1915년만 해도 남비콰라족의 인구는 2만명 정도로 추산됐으나 레비스트로스가 갔던 1938년 당시에는 수백명 정도로 줄었다. 남비콰라족의 한 분파인 사바네집단은 1900년께 1000명이 넘었지만 1928년에는 남자 127명과 거기 딸린 여자와 아이들로 줄었고, 1938년에는 남자 19명과 거기 딸린 아내와 아이들뿐이었다(김태경 한겨레글쓰기연구소연구위원).”

 

백인들이 들어온 지 400년이 흐른 뒤에 접촉한 사람들도 이런데 하물며 유럽인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들의 병원균을 전혀 알지 못했던 (따라서 그 병균에 대한 면역력도 떨어졌던) 사람들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카르바할 일행은 아마존 원주민의 마을을 약탈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에스파냐의 병균을 옮겼고, 이후에 아마존에 침입한 에스파냐/포르투갈인 노예 상인들도 같은 일을 했다. 그 결과 (일부러 그랬건 아니건) ‘병에 의한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이는 아시아에서 들어온 페스트에 걸린 중세 서유럽 사람들이 면역력이 없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인구의 3분의 1이 그 병 때문에 죽어 기존의 사회가 무너지고 문화가 사라진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병 때문에 검은 흙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들과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 죽자 더 이상은 복잡한 사회를 유지할 수 없었고, 사회의 바탕이 되는 인력(人力)이 줄어들어 사회를 재건할 수도 없었다. 병과 노예사냥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사람들은 농사 대신 사냥과 채집과 고기잡이로 살아야 했고, 이후 사회가 안정되었으나 인구는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존 원주민들은 유럽인 이민자들이 가져온 철기를 받아들여 화전을 하는 방식으로 먹고살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아마존 원주민들이 옥수수를 기르지 않는 까닭도 설명해야겠다. 이는 옥수수라는 식물이 지닌 특성 때문이다. “다른 곡식들은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번식할 수 있다. 하지만 옥수수 낟알은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사람이 씨를 뿌리지 않으면 스스로 번식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옥수수밭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옥수수 낟알이 저절로 땅에 떨어져서 자라는 게 아니라 옥수수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이는 유럽인의 침략을 피해 밭과 과수원을 버리고 달아나야 했던 아마존 원주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옥수수는 모두 사라져 버렸고, 남은 것은 야생 식물이 된 복숭아야자뿐이었다)

 

역사를 전해줄 만한 사람들은 다 죽고 없는 상황에서 남은 건 유럽인의 기록과 유적뿐이었고, 후자는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최근에야 발굴되었기 때문에 전자의 명예회복이 그만큼 늦어졌다. 물론 아마존 원주민들의 몰락한 모습만 본 외부인들은 그 모습이 태곳적부터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모습이라고 믿었고, 그 때문에 역사가 없으며, 변화하지도 않는 원시인이라는 아마존 원주민 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유적과 토기와 검은 흙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나온 이상, 이제 이런 상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오해를 살까봐 덧붙이자면 나와 학자들이 아마존 원주민들이 유럽인이 들어오기 전에 농사를 지은 사실이나, 자연환경을 조절해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낸 사실을 밝히는 까닭은 5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아마존 파괴(브라질 정부는 서기 1960년대부터 밀림에 들어가 농장을 개척하는 사람들에게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 뒤 밀림에 목장과 농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목장주나 농장주들은 원주민을 죽이면서 숲도 파괴했다. 이는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다)를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도 브라질의 목장주, 농장주, 벌목업자, 광부들, 광산업자들이 아마존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망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아마존과 아마존 원주민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올해 6월 초에도 오 베데 로일라 수자(31)라는 지역 운동가가 불법 벌채업자들과 싸우다가 그들의 총에 맞아 죽었고,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인 브라질 북동부 파라 주와 서부의 론도니아 주에서는 지난 한 달 동안 수자와 같은 지역 운동가 6명이 살해됐다.” “파라 주에서 살해당한 지역 환경운동가인 리베이로 다 실바와 그의 아내 에스피리토 산토는 지난 2년간 살해 위협을 받아왔고, 로도니아 주에서 살해된 아델리노 라모스는 벌채업자들에 맞서 싸워온 유명한 지역 지도자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브라질에서 토지를 둘러싼 폭력을 감시하는 단체인 토지사역위원회는 2001년 이래 살해 위협을 받아온 1800여 명의 명단을 연방 정부에 보냈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 중 수십 명은 이미 살해당했고 그 외 많은 사람이 암살 미수로 겨우 살아나거나 상해를 입었다. 지난 20년 동안 아마존 지역에서는 1000명 이상의 환경 운동가, 종교 지도자, 지역 운동가 등이 살해됐다.”

 

이런 식으로 파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폭력으로 누르면서 목장/농장을 확장하고 벌목을 밀고 나간 결과 올해 5월 브라질 국립우주연구소가 공개한 인공위성 촬영 사진에 의하면 올해 3,4월 아마존에서 발생한 산림 벌채는 592평방킬로 규모로 작년 같은 시기의 103평방킬로에 비해 약 6배나 넓은 면적이었다.” “대부분의 산림 훼손은 서부의 마토 그라쏘 주에서 발생했는데 이곳은 브라질 전체 콩의 4분의1을 생산하는 콩 농사 중심지다. 이 수치는 브라질 환경부조차 놀라게 했다.”

 

(이쯤에서 부끄러운 사실을 털어놔야겠다. 나는 6년 전[서기 2005]에는 채식주의자였는데 - 지금은 다시 고기와 생선을 먹는다. 물론 내 뜻대로 결정한 게 아니라 가족의 강압 때문이었다 - 그 때 환경문제를 다루는 글을 쓰면서 소를 키우는 목장에 비하면 콩을 기르는 농장은 환경을 덜 파괴하며, 따라서 앞으로는 아마존에 콩 농장이 더 들어서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콩 농장도 열대우림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모른다. 내 잘못된 견해를 담은 글 때문에 혼란에 빠졌을 그 때의 독자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 개마두리)

 

환경운동가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한 브라질 국내와 외국의 고기와 농산물 소비가 산림 훼손을 야기했다고 말한다. 환경보전 전문 뉴스 사이트인 <몬가베이(Mongabay)>에 의하면 2000~2005년 사이 훼손된 아마존 산림의 65~70%는 목축 때문이었다. 20~25%는 소규모 농업에 의해, 그리고 5~10%는 대규모 농업에 의한 것이었다. 2~3%는 목재를 얻기 위한 벌채에 의해 발생했고, 1~2%는 광산, 도시화, 도로 건설, 댐 건설 등 탓이었다.

 

2000~2006년 사라진 아마존 열대우림은 15만평방킬로로 이는 그리스보다 넓은 면적이다. 1970년 이래 사라진 면적은 60만 평방킬로다. 그 이후 2006~2010년까지는 산림 훼손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훼손 면적이 전년에 비해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것이 이기적인 민간인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그나마 위험성이 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 문제에는 브라질 정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이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브라질의 환경운동가들은 올해 산림 훼손 면적이 급증한 이유 중 하나는 브라질 정부의 산림법 개정 절차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산림법은 아마존의 토지 소유주들에게 소유지 산림의 80%, 그리고 다른 지역은 산림의 20%를 의무적으로 보존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산림법은 이 규정을 완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에게는 80% 산림 보호 의무를 면제해주고, 2008년 이전에 발생한 산림 벌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으며, 강에서 30미터 거리까지 토지 개발을 금지했던 것을 15미터 이하로 완화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

 

아마존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산림법을 완화하려는 논의는 10년 이상 지지부진 계속돼 왔다. 그런데 최근 논의가 재개됐다. 개정안은 공산당 대표인 알도 레벨로에 의해 발의됐으며 브라질 농업 개발을 주장하는 이른바 "전원주의자(ruralist)" 의원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토지를 소유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법 개정을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운동가들과 생계를 위해 산림 보호를 주장하는 농민들이나 원주민들은 법이 통과되면 아마존 열대우림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환경운동가들은 최근의 산림 훼손 증가도 법 개정 이전에 산림을 벌채해 이미 벌채가 이뤄진 곳을 농지로 인정받으려는 토지 소유주들의 편법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산림을 보호해야 하는 지역에 농장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리길 바라기 때문에 산림법 개정을 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상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인 브라질 북동부 파라 주부터 산림법 개정을 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대목은 정주진 기자의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인용함)

 

이 문제가 원주민과 열대 강우림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아마존 밖에서 와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에도 해를 끼치고, 그들을 돕는 사람도 죽임을 당한다. 서기 2005212, “아마존의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고 그곳에서 노예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을 하던(엄기호 국제연대 코디네이터의 말. 이하 엄기호)” ‘도로시 스탕수녀는 대지주들이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서 살해를 당했다(엄기호).” “목격자들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보도에 따르면 "청부업자들은 도로시 스탕 수녀에게 다가가 마구 욕설을 한 뒤 그녀가 무시하며 반응을 보이지 않자 3발의 총을 쏘았다. 청부업자들은 쓰러진 도로시 스탕 수녀에게 다시 한 발을 쏘아 확인사살을 했다"고 한다(엄기호).”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동생은 "1986년 거기 갔을 때도 어떤 남자가 우리를 따라다녔다. 땅주인들은, 돈 몇 푼이면 언제라도 귀찮은 사람들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했다"고 눈물로 증언하였다. 도로시 수녀가 요청하였던 신변보호는 완전히 무시당하였다. 돈에 눈이 먼 대지주들과 이들과 결탁한 해외자본,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정책이든 펼치는 국가의 합작품이다. 신자유주의야말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테러라는 것을 도로시 수녀는 온몸으로 증언한 것이다(엄기호).”

 

(“아마존의 무분별한 개발에서부터 도로시 수녀는 온몸으로 증언한 것이다.”라는 대목은 엄기호가 <프레시안>에 올린 기사에서 인용)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으면 그럼 숲을 파괴하는 짓을 모른 척하거나 부추기자는 거야?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고 그곳에서 나무가 다 잘리면 사막이 되어버릴 텐데 그곳에서 인간의 활동을 허락하자고? 당신의 주장이 개발에 미친 자들에게 구실을 던져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옛날에 많은 사람들이 아마존에 살면서 그곳을 개발하고 농사를 지었으니, 자기들이 하는 짓도 옳은 거라고 말할 거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거니와 내가 바라는 것은 아마존의 숲을 베어버리거나, 목장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아마존에 땅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리는 유럽식 농업을 퍼뜨리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역사학자/고고학자/인류학자/지질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에 비추어봤을 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두 진영(환경운동가와 농부들)의 말에 모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마존의 환경에 맞는 발전과 아마존 원주민/가난한 농부들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아마존 원주민들은 과일나무와 옥수수를 심고 물고기를 잡았지, 숲을 밀어버리고 콩을 기르거나 소떼를 들여오지는 않았다. 그들의 농업은 숲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심어서 숲을 만드는것이었고, 그들은 곡물을 심긴 했지만 곡물만 심는 게 아니라 과수원과 밭을 함께 꾸려나가 흙의 힘을 적게 뺐다. 또 그들은 억지로 동물을 데려와 기르는 대신 강에 많은 물고기를 잡음으로써 단백질을 보충하고 나아가 숲과 초원의 파괴를 막았다. 숲을 없애고 만든 목장에서는 많은 소//말들이 풀을 먹어치우고 땅을 단단하게 다져 흙을 사실상 쓸모없게 만들고, 그들의 똥/오줌이 물을 더럽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다.

 

또 그들은 거친 땅에 억지로 농사를 지어 흙의 힘을 다 빼는 대신, 일상생활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거름을 만들어 흙에 섞었다. 그들은 땅이 거름 때문에 기름지게 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농사를 지었고, 거름으로 만든 검은 흙을 서서히 퍼뜨려 식물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자신들의 식량문제도 해결했다. 그들이 농사를 지은 지 4천년(검은 흙이 나온 뒤부터 세면 2300년 이상)이 되었는데도 아마존이 망가지지 않고 오히려 풍요로워졌다는 것은 그들의 방식이 성공적이었음을 입증한다.

 

만약 이 방식에 환경을 생각하는 농부들의 방식을 이어붙인다면, 아마존은 숲과 흙을 더 이상 망가뜨리지 않으면서도 농업과 (규모가 작은) 목축을 할 수 있는 땅이 될 것이다. “아마존의 목축업자들은 1헥타르에 1마리 이하의 소를 키우고(정주진)” 있는데, 이러려면 소가 늘어날 때마다 소가 살 곳과 소가 먹을 풀을 마련하기 위해 숲을 없애야 한다. 물론 이런 방식은 숲을 가꾸고 그 숲을 무대로 살아온 아마존 원주민과, 백인 목장주들이 맞부딪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농부도 있다. 브라질 시민이자, 백인이고, 아마존에서 농사를 짓는 페르시오 바로스 드 리마는 비비씨(BBC) 기자에게 자신은 농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여러 가지 목초를 키우고 1헥타르의 땅에 2.5마리의 소를 키운다. 또한 이 땅에 옥수수도 심는다. 1974년 내가 처음 농장을 샀을 때 당시 법에 따라 반 이상이 산림으로 덮여 있었다. 그 후 계속적인 노력으로 추가로 벌채를 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정주진)”

 

드 리마 씨는 목장에서 소만 키우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식물을 키워 흙이 씻겨 내려가거나 굳는 것을 막았고(농부와 농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흙에서 한 가지 식물만 계속 키우는 것도 땅이 못 쓰게 되는 원인이라고 한다), 목장을 무작정 넓히는 대신 적당한 넓이의 땅에 소를 키움으로써 숲을 망치지 않고도 농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드 리마 씨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학자들이 밝혀낸 검은 흙을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곡식/푸성귀를 기르는 밭과 과일나무를 심어서 가꾸는 과수원을 (그 흙으로) 함께 일군다면, (검은 흙은 음식물 찌꺼기를 태운 재도 섞으므로) 드 리마 씨는 환경오염에 한 몫을 맡는 음식물 찌꺼기를 없앨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많은 농작물을 거둘 수 있기 때문에 환경과 개발이라는, 얼핏 보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문제를 조화롭게 풀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미 숲이 사라져 황폐해진 지역에서도, 이 검은 흙(테라 프레타)을 만들어 덮은 뒤 다시 나무를 심으면 숲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아마존의 검은 흙은 녹색혁명(씨앗을 병과 벌레에 강하게 바꾸고 농약이나 화학비료로 식량 생산량을 늘린 일) 이후 끝없이 농약과 화학비료를 흙에 퍼부어야 하기 때문에 거칠어진 세계의 농지와(화학비료를 너무 많이 쓰면 흙이 망가지고, 농약은 사람과 동물 몸에도 해롭다!), 녹색혁명 이후에도 생산량이 늘어나지 않아 한계에 다다른 땅과, 식량이 모자라서 굶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재해가 일어나는 땅에 새로운 희망을 던진다. 그 흙을 만드는 방법이 온 누리에 퍼진다는 것은 세계 여러 곳의 사람들이 유전자를 조작하지 않고도,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도,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고도 먹을거리를 많이 거둘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자들이 밝혀낸 아마존 원주민의 고대사/중세사는 오늘날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학문임을 잊지 말자.

 

이제 매듭을 짓겠다. 지금까지 아마존 원주민의 고대사/중세사를 농업 중심으로 살펴보았거니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작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역사는 잊힌 채 잠들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또 어느 사회가 드러내는 현재의 모습이 반드시 과거의 모습이라고 여겨서는 안 되며, 어느 나라나 겨레의 후손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역사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이 글을 읽은 분은 아마존 원주민이 자신들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서양 백인 고고학자들이나 남미 백인 학자들, 그리고 유럽인이 남긴 글을 통해서만 고대사/중세사를 겨우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조선은 어떤가? 그들도 서기 19세기 말 일본인 학자들이 서양식 고고학을 가져와 이 땅을 조사하기 전에는 자신들의 조상이 금관을 쓰거나[신라], 못이 박힌 신발을 신거나[고구려], 편두(아기의 머리에 돌을 눌러 이마를 납작하게 하는 일)를 했다는 것[진한]을 전혀 알지 못했고,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빼고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자신들의 고대사를 외부인인 중국인이 남긴 역사서에서 찾아야 했다. 나아가 서기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대한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고구려가 튀르크와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보낸 사실이나, 백제가 참파나 부남扶南이나 스리비자야 왕국이나 천축天竺과 교역했다는 사실, 신라 스님인 혜초가 당은 물론 바라트[인도]와 중앙아시아까지 여행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세계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고 믿고 있었고, 당시 나라 문을 걸어 잠근 조선왕조의 상황만 보았던 서양인들도 그런 생각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아가 올바른 역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개하고, 바뀌지 않고, 멍청한 족속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이 나쁜 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그 환경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어서 보다 살기 좋은 곳을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이 자연을 내버려 두거나, 자연에 무작정 맞춰서 산다.’는 뜻이 아님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명심하고 역사와 현실을 냉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 『아마존의 눈물 외전(外傳)(김진만/김현철 지음, MBC 프로덕션 펴냄, 서기 2010)

 

― 『고등학교 지리 부도(이기석/오홍석/황만익/반용부/허행구 지음, 보진재 펴냄, 서기 1995)

 

― 『작은 인간(마빈 해리스 지음, 김찬호 옮김, 민음사 펴냄, 서기 1995)

 

― 『인디언(찰스 만 지음, 전지나 옮김, 오래된미래 펴냄, 서기 2005)

 

(참고로 인디언의 원제는 1491: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땅들에 대해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 1491 : New Revelations of the Americas Before Columbus이다. 서기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뒤부터 백인의 침략과 정복이 시작되었으므로. 원제에 있는 서기 1491이라는 해는 - 서기 1492년의 바로 전해다 -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과 자주를 누렸던 시기를 상징한다. 이 책은 제목이 드러내는 것처럼 백인 이전의 아메리카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뜻으로 쓰여진 것이다 - 잉걸)

 

―「아마존 유역서 엘도라도 추정 흔적 발견, 한국일보 (서기 201016일자 기사)

 

―「`잃어버린' 아마존 유적 발견,코리아 타임즈 (201016일자 기사)

 

―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미셸 카플란 지음, 노대명 옮김, 서기 1998)

 

― 『우리역사, 세계와 통하다(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가디언 펴냄, 서기 2011)

 

― 『문화로 읽는 세계사(주경철 지음, 사계절 펴냄, 서기 2005)

 

― 『인류 최초의 문명들(마이클 우드 지음, 강주헌 옮김, 중앙 M&B 펴냄, 서기 2002)

 

―「브라질 아마존에서 고대 복합도시 발견, [뉴시스] (서기 20080829일자 기사)

 

―「식인 풍습은 해부학 실습보다 야만적이지 않다,한겨레(서기 2011711일자 기사)

 

―「이어지는 아마존의 눈물이젠 피를 부른다(정주진 기자, <오마이뉴스> 서기 2011618일자 기사)

 

― 「원주민을 돕던 수녀가 암살당한 자리에서 (엄기호 국제연대 코디네이터 · <닥쳐라세계화!> 저자, <프레시안> 서기 200921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