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 일본 “조선인 강제노동 자료없다.” … 사도광산 ‘역사왜곡’ 조짐

개마두리 2024. 4. 13. 22:43

 

- 아베 사실 토대로 반론해야.” 세계유산 추천 놓고 보수/우익 공세

 

- 군함도 약속 안 지킨 일본 한일관계 악화/심사탈락 부담

 

(도쿄 = 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니가타(新潟[신석 옮긴이])(왜국 혼슈 섬 중부에 있다 옮긴이) 사도(佐渡[좌도 옮긴이]) 광산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추천하는 문제를 놓고, 일본 보수/우익 세력이 일제 강점기(대일[對日] 항전기. 서기 1910 ~ 1945옮긴이) 조선인(‘한국인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서기 1910년에 망한 나라는 구한국[舊韓國]’인 대한제국이었고, 서기 1919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져 서기 1945년까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흑인을 검둥이로 부르는 것이 부당하다면, 서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코리아[Corea] 사람으로서 살았던 이들을 한국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부르는 것도 부당하다 옮긴이) 강제 노역(좀 더 정확한 이름은, ‘노예노동’ - 옮긴이)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서기 2021 ~ 2022년에 옮긴이)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 추천 움직임을 비판한 가운데, (왜국의 옮긴이) 집권 (정당인 옮긴이) 자민당과 니가타현 등을 중심으로 세계유산 등재가 강제 노역과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고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 왜곡(뒤틀기/비틀기 옮긴이)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강제노동 자료 없다 한국에 반론해야.” 역사 왜곡 주장 이어져

 

지난달(서기 2021년 양력 12옮긴이) 일본 문화심의회가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에 추천할 일본 후보로 선정했음에도, 일본 문화청이 정부 내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며 추천을 즉시 결정하지 않은 가운데, 세계유산 등재를 희망하는 이들이 강경론으로 기우는 양상이다.

 

이와 관련해 니가타현은 “<조선반도(왜국에서는 한반도조선반도로 부르는데, 이는 [왜국 안에서는] 경멸과 혐오가 담긴 이름이기도 하다. 이는 흑인들의 땅‘<검둥이들>의 터로 부르는 것과 같다. ‘조선반도라는 이름이 결코 바람직한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은, ‘조선인이라는 왜어[倭語]조센징이 왜국에서는 경멸과 혐오를 담은 욕설로 쓰이는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옮긴이)> 출신() 자가 일한 사실은 있지만, 강제 동원이었는지 어떤지 자료나 기록이 없고, (우리도 그것을 따로 옮긴이) 파악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라고 19(서기 2022년 양력 119옮긴이) 요미우리(讀賣[독매 옮긴이]) 신문이 보도했다.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자민당 보수/우익 성향 의원 등으로 구성된 보수 단결의 모임(줄여서 모임” - 옮긴이)’은 전날 일본 국회에서 회의를 열어 사도 광산을 세계 유산으로 추천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재임 중 일제 강점기(대일 항전기 옮긴이) 일본의 가해 행위에 물타기() 하는 데 앞장섰던 아베 신조(安倍 晋三[안배 진삼 옮긴이])’ 전 총리도 이날 회의에 참석해 사실에 토대를 두고 (한국 측에) 반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기사는 아베가 한 일본인의 총에 맞아 죽기 전에 쓰였다 옮긴이).

 

공영방송 NHK의 보도에 따르면, 모임은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에 추천하려는 시대가 (일제 강점기와) 다르다는 것을 한국 측에 외교 경로로 설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일본 측은 에도(江戶[강호 옮긴이]) 시대(서기 1603 ~ 1868)까지로 대상 기간을 좁혀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일제 강점기가 제외됐으니, 강제 노역(노예노동 옮긴이)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인 셈이다.

 

모임의 대표자 격인 다카토리 슈이치(高鳥 修一[고조 수일 옮긴이])’ 중의원 의원은 일본 정부가 추천 결정을 미루는 것(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두 해 전인 서기 2022년에 쓰였다 옮긴이)에 관해 무엇을 어떻게 검토해서 판단한 것인지 밝히지 않으면 니가타현 주민의 이해도, (그리고 왜국의 다른 지역에 사는 옮긴이) 국민의 이해도 얻을 수 없다.”며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피해자 경험과 동떨어진 일본 주장

 

일제 강점기 강제 노역 전문가인 정혜경박사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재단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만든 옮긴이)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서기 2019) [라는 옮긴이] 보고서를 보면, 일본 측의 주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노예노동의 피해자 옮긴이)의 경험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 옮긴이) 사도 광산에 동원된 임태호(서기 1919 ~ 1997)’ 씨는 지하에서 광석을 채굴하는 일을 맡았는데, “매일 같이 낙반(落盤. 광산이나 토목 공사 공사장에서 갱 안의 암석이나 토사[土砂. ()와 모래()]가 무너져 내리는 일 옮긴이) 사고가 있어서 오늘은 살아서 이 지하(땅 밑 옮긴이)를 나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이고 살았다.”는 취지로 당시(노예노동을 강요당했던 제2차 대전 때 옮긴이)를 회고했다.

 

(임씨 옮긴이)는 지하 작업 중 발판이 떨어져 다치는 등 두 번이나 다쳤는데, 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고, 이로 인해(이 때문에 옮긴이) 탈출을 결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도 광산에 동원된 (그리고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옮긴이) 조선인(한국인 옮긴이)에 관해 연구한 히로세 데이조(廣瀨 貞三[광뢰 정삼 옮긴이])’ 일본 후쿠오카(福岡[복강 옮긴이])대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 광산의 조선인은 운반부착암(바위에 구멍을 뚫음)등 갱도 내(옮긴이) 위험한 작업에 동원된 비율이 일본인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

 

사도 광산은 에도 시대에는 금광으로 유명했으나, 태평양 전쟁(2차 세계대전의 일부분인 전쟁 옮긴이)이 본격화한 후(옮긴이)에는 (그러니까 서기 1941년 이후에는 옮긴이) 구리, (옮긴이), 아연 등(같은 옮긴이)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주로 활용됐다.

 

일제가 노동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인을 대거 동원한(그리고 노예노동을 강요한 옮긴이) 곳이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발간 자료에 의하면(따르면 옮긴이), “최대 12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으나, (옮긴이) 실태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으며, 히로세 명예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적어도 2천명 정도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군함도 약속 안 지킨 일본 딜레마 봉착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추천을 강행했을 때, 한일 간 역사 논쟁이 다시 가열할 수 있다는 점이나, 사도 광산이 유네스코 심사에서 탈락할 가능성도 인식하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왜국 정부가 지금으로부터 두 해 전인 서기 2022년에 인식했던 것이고, 한국에 왜국 조선총독부용산 총독부로 불러야 할 정도로 성향이 종일[從日]인 새 정부가 들어선 지 두 해가 흐른 지금은 상황이 왜국에게 유리해졌다 옮긴이).

 

일본은 (서기 옮긴이) 2015년 하시마(端島[단도 옮긴이], 일명 군함도[섬의 생김새가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다른 이름(별명)이 붙었다 옮긴이]’) 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 조선인 강제 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갈마 옮긴이)를 알리겠다고 한 약속을 아직 이행하지 않았으며(이 기사가 쓰인 지 두 해 하고도 석 달 여드레가 흐른 지금까지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옮긴이), 이는 일본 입장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본은 난징(南京[남경 옮긴이]) 대학살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만약 유네스코 옮긴이) 회원국의 반대가 있으면 사실상 세계유산으로 결정할 수 없도록 제도를 개편하는 데 앞장선 이력이 있다.

 

세계유산과 관련해 국제사회의 합의가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일본이 자국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반대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등재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 태도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아사히(朝日[조일 옮긴이]) 신문 사도 광산을 추천하라.”는 일본 정치권의 요구와, “일한(왜국에서는 한/일을 일/한으로 부른다. 이는 자기 나라를 앞세우고, 다른 나라는 나중에 말하는 관례를 따르는 것이다 옮긴이) 관계 악화 가능성을 고려해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는(맞부딪치는 옮긴이) 가운데, 일본 정부가 둘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고 19(서기 2022년 양력 119옮긴이) (왜국 안의 옮긴이) 분위기를 전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 文雄[안전 문웅 옮긴이])’ 일본 총리(이 자는 지금 그러니까 서기 2024년 현재 까지도 왜국 총리/수상으로 일하고 있다 : 옮긴이)는 사도 광산 문제의 대응 방침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정부로서는 (세계유산) 등록을 실현하는데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지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18(서기 2022년 양력 118옮긴이) 말했다.

 

추천서 마감은 다음 달 1(그러니까, 서기 2022년 양력 21옮긴이)이며, 일본 정부는 그 전에 사도 광산을 추천할지 여부를 정식으로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sewonlee@yna.co.kr

 

- < 연합뉴스 > 서기 2022년 양력 119일자 기사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내가 두 해 전의 언론 보도를 지금 와서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까닭은,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국 정부도, 왜국 우익도, 왜국 사회도 2차 대전 때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이 글을 올린 날짜인 서기 2024년 양력 413)네이버의 게시판에 당시(2차 대전 때) 조선인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이었는데,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건 당연하잖아? 그게 뭐가 문제야? 게다가, 월급도 잘 주고 대우도 좋았고 일본인(왜인) 고용주들이 밀린 돈도 내 주었던데, 이 일(노예노동 강요)을 비난하는 것들이 제정신이야? 북한(조선 공화국. 수도 평양)한테 속아서 반일을 외치는 것들이 아니면 누가 이 일에 화를 내(원문은 더 거친 표현이 많아, 최대한 순화해서 써야 했다. 양해를 바란다 옮긴이)?”하는 댓글이 (한국어로!) 올라올 정도로 왜국의 앞잡이인 종일파(從日派)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활동하고,

 

(나치가 강요한 노역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어떤 용서도 하지 마라!”고 떠들지만, 근대 왜국[倭國]이 강요한 노예노동은 서양 백인인 연합군 포로들이 강요당한 노예노동은 빼고 대충 넘어가는) 서양은 이 모든 일에 입을 딱 다물고, 국제연합(UN)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피해자들이 노동 3권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이 일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데, 어떻게 이 일이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때문에라도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이 기사에 나오는 자민당과 니가타현 관리들과 '보수 단결의 모임'과 아베 신조 전 왜국 총리 때문에, "오늘날의 로(Ro)시야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른바 '만주'에서 붙잡은 관동군 60'마리'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수용소로 끌고 가서 때리면서 노예노동을 강요한 걸 왜국(倭國)에 사죄/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큰 소리로 말하기로 했다.

 

나는 외신(外信) 기자나 국제연합(UN) 관리 앞에서도, 산케이 신문 의 기자 앞에서도, 넷우익이나 재특회 회원 앞에서도 똑같이 말하리라.

 

그리고 만약 그들이 내 말에 화를 내거나 당황하면, 그땐 이 기사에 나온 사실과 2차 대전 때 한국인 노동자들이 강요당한 노예노동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테고. 그런 다음 "그래서라도 나는 이렇게 거친 말을 하며 맞받아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하고 덧붙일 것이다.

 

나아가 나는 평소에 "만약 한국이 종일(從日) 세력을 청산하고 완전한 독립국가로 다시 태어나면, 그땐 왜국과 싸워야 한다. 왜국과 전쟁을 할 때, 미사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기(兵器)로 공격해야 하는 곳은 적국의 수도인 도쿄/독도를 노리는 현인 시마네/서기 1592년 왜군(倭軍)을 보내 근세조선을 짓밟았고, 서기 19세기 후반에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낳은 지역인 가고시마/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던 오사카다. 그 네 곳은 꼭 쑥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기사를 읽으니, '쑥밭으로 만들어야 할 곳'에 니가타 현도 집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종일 세력을 청산하고 오늘날의 한국이 있던 곳에 세워진 새로운 독립 국가가 내게 총을 들고 니가타 현에 가서 싸우라고, 그럼으로써 2차 대전 때 사도 광산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한을 풀라고 명령한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 명령을 따를 것이다.

 

말과 법으로 정의를 되찾으려고 한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면, 이제 남은 건 총칼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뿐이니까. 이것은 단순한 복수나 앙갚음이 아니라,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옳은 일임을 밝힌다.

 

- 단기 4357년 음력 35일에,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존중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므로, "바람"을 들어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런 ""은 푸대접을 하고 모욕을 하고 공격해야 한다.'는 원칙을 되새기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