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메히까 제국 사람들과 그 유민들이 만들어낸 고문서

개마두리 2024. 4. 27. 00:06

우리는 종이라는 말을 들으면, 후한(後漢)의 환관인 채륜이 그것을 맨 먼저 만들었고, 2 () 왕조 때 압바스 제국 군사들에게 붙잡힌 한족(漢族)’ 기술자들이 종이 만드는 기술을 압바스 제국에 전했으며, 그 기술은 중세 말기인 서기 14세기에야 서유럽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고문서라는 말을 들을 때는, 종이로 만든 두루마리에 글이 적힌 것이나, 아니면 종이 여러 장을 쌓아 올린 뒤, 구멍들을 뚫고 그 구멍들 안으로 실을 꿰어 한데 묶은 옛날 책을 떠올린다.

 

이 두 가지 고정관념대로라면, 중세 말에 중앙아메리카에서 세워져 근세 초에 망한 메히까 제국(‘아스테카 제국으로 알려진 나라의 올바른 이름은 메히까 제국’이다)은 종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고, 에스파냐(까스띠야) 왕국이 메히까 제국을 침략/정복/점령하기 전까지는 종이도, 책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메히까 제국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건너오기 온 아흔 네 해(194) 전부터 종이를 만들어서 썼고, 그 종이로 책과 문서를 만들었으며, 심지어 나라가 망한 뒤(그러니까, 서기 1521년 이후)에도 오랫동안 자신들의 고문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문서를 만드는 기술은 식민지 시대 이후에는 발전하지 않고 오히려 뒷걸음질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좀 자세히 살펴보자. 메히까 사람들은 종이를 만들었는데, 나무껍질을 얇게 빻아 펴고 말려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배달민족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가 한지(韓紙)를 만드는 방법과 같았다(손성태 배재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아래 손성태 교수’).”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 책과 문서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 위에(종이 위에 옮긴이) 하얀 흙을 살짝 발라서 말린 후에(뒤에 옮긴이) 식물의 가시나 동물의 가는 뼈로 (흙을 옮긴이) 긁어내어 그림을 그리고(선인장을 비롯한 식물의 가시나, 짐승 뼈를 펜 삼아 그림을 그리고 옮긴이), 광물과 식물에서 뽑아낸 물감을 새의 깃털로 찍어 (그러니까, 깃털을 붓 삼아 옮긴이) 색깔(빛깔 옮긴이)을 입혔다(고대/중세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나 중세 유럽도 새 깃털로 펜을 만들어서 썼다 옮긴이).

 

그렇게 그림을 그릴 때 먼저 가늘게 살짝 파내었는데, 이 방식은 우리의 전통 공예 조각 방식인 상감(象嵌) 공예 방식(모양[]골짜기[]’로 나타냄 쇠붙이나 흙그릇의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파서 그 속에 금/은 따위를 넣고 채우는 기술 옮긴이)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옮긴이) 긴 종이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만들려고 옮긴이) 접었는데, 그 접는 방식도 우리의 전통 방식과 같이, 병풍처럼 접었다(손성태 교수).”

 

이것은 흔히 고문서(Codex[코덱스])’로 불리는데, 고문서 안에는 메히까 제국의 갈마(‘역사[歷史]’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와 문화, ()들의 이야기(본향[本鄕]풀이), 종교 행사, 달력 따위가 들어 있다(고문서들 가운데는 그것들 말고도,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식(손성태 교수)”도 들어 있었으므로, 원래는 의서[醫書]나 천문학 서적이나 건축학 서적이나 수학 서적인 고문서도 있었을 것이다).

 

고문서는 마야 문명의 그림글자와는 다른, 거의 그림에 가까운 그림글자가 적혀(아니, 그려져) 있는데, 메히까 사람들은 갈터(‘가르치는 터를 줄인 말. ‘학교[學校]’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이자 새로운 배달말)에서 아이들에게 이것(고문서/)들을 보여준 뒤, 이것들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에스파냐에게 정복당하기 전, 메히까 제국에는 갈터가 있었고, 귀족 집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갈터와, 평민 집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갈터가 따로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사립학교와 공립학교를 따로 나누어 학생들을 보내는 것과 같다. 짐작하셨겠지만, 전자가 학생들에게 더 많은 것을 더 자세하게 가르쳤다). 그러니까 고문서는 어른들이 필요한 일에 쓰기 위해 만든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이자 교과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고문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이 내용을 해석하기는(풀이하기는 옮긴이) 쉽지 않(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은데, 그래서 아무나 이 고문서를 이용하지는 못했고, “그림문자(그림글자 옮긴이)와 관련한 역사(갈마 옮긴이), 문화, 종교, 수학, 의학적 지식이 있어야지 내용을 파악할 수 있(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었다. “그래서 지식이 풍부한(아는 것이 많은 옮긴이) 사람만이 (이런 옮긴이) 고문서를 작성하고(만들고 옮긴이), 또 해석할(풀이할 옮긴이) 수 있었(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

 

[이른바 중화권에서는 한자로 쓰인 한문이 글자 수가 많으며 모양이 복잡하기 때문에, 유학자 같은 사람들만 책/글의 내용을 알 수 있었던 사실이나, 옛 케메트(Kemet)나 키엔기르(‘수메르의 바른 이름)나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는 글자 수가 많고 모양도 복잡하기 때문에 사제나 서기나 세리 같은 사람들만 읽고 쓸 수 있었던 사실을 떠올려 보면, 메히까 제국에서 고문서를 읽고 그 내용을 풀이할 수 있었던 사람의 수가 적었던 것이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고문서는 스페인(올바른 이름은 에스파냐’. 더 정확한 이름은 까스띠야’ - 옮긴이) 정복자들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아주 일부만이 전해(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지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코르테스와 그가 이끌던 에스파냐 군사들이 메히까 제국을 친 정복 전쟁 와중에 불태워지거나 파괴되어 없어져버렸다(손성태 교수).”

 

이는 곧 메히까 사람들의 고문서 만드는 기술에 나쁜 영향을 끼쳐, 고문서의 수준을 떨어뜨렸는데, 한 예로 메히까 제국이 에스파냐 군사에게 정복되기 이전에 (메히까 사람들이 옮긴이) 그린 원본은 매우 정교하고 다양한 물감으로 색칠까지 한 그림이지만, (메히까 제국이 옮긴이) 정복당한 이후에(뒤에 옮긴이) 그려진 것은 색칠도 (제대로 옮긴이) 하지 않고, (그 선도 옮긴이) 연필로 스케치하듯이 (대충 옮긴이) 그린 것들이다(손성태 교수).

 

그러니까, 서유럽 나라이자 남유럽 나라인 에스파냐의 메히까(메히코) 침략은 메히코에 종이라는 새 문물을 전해 준 것도 아니고, 메히코에 책과 문서라는 정보 전달 수단을 알려준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로 침략/정복/점령/지배 이전에는 화려하고 정교하며 다채롭고 아름다웠던 예술 작품(고문서)과 그것을 만드는 기술을 망가뜨렸다는 이야기다(나는 이 때문에라도, “<진출[사실은 침략과 점령]>과 <식민지화>가 식민지를 <발전>시킨다.”는 서양과 지나[支那]와 왜국[倭國]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메히코에서는 스페인 정복 이후에도 고문서 제작은 계속되었(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는데, 한 예로 메히까 제국은 서기 1521년에 망했지만,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서기 1530년대에보투리니 고문헌( Códice de Boturini ) 이라는 아스테카와 메히까 제국의 갈마를 다룬 역사서가 나왔고, 그로부터 열 해 뒤인 서기 1541년에는 스페인의 식민지 정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초대 부왕(副王. 다른 말로는 태수’/‘총독이라고도 한다 - 옮긴이)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5를 위해(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멘도사 고문서 를 만들었으며, 메히까 제국이 망한 지 쉰다섯 해 뒤인 서기 1576년에는오빈 고문헌( Códice de Aubin ) 이라는 고문서가, 그리고 서기 17세기 전반(서기 1620년대)에는 아스땅(‘아스틀란으로 알려진 땅의 바른 이름 옮긴이)을 떠날 때부터 아스태가(메히까 옮긴이) 제국을 건설하여 살다가 스페인에게 멸망당하던 (서기 옮긴이) 1521년경까지의 역사(갈마 옮긴이)를 그려둔 문헌(손성태 교수)”아스가티땅 고문헌( Códice de Azcatitlán ) 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메히까 제국의 고문서는 나라가 망한 뒤에도 1세기 동안 계속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우리는 여기서, 메히코 전통문화의 끈질긴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렇다고 바뀐 것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고문서의 모양이나 형식,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간 글자는 많이 달라졌다. 에스파냐의 정복 이전에는 고문서가 병풍처럼 접은[손성태 교수]” 모양이었으나, 정복 이후에 나온 고문서는 유럽식 책 형태로 발간[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되었고, 정복 이전에는 고문서에 그림글자만 적혀 있었으나, 정복 이후에는 고문서에 에스파냐가 쓰는 글자인 라틴 알파벳이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그러니까, “스페인어[까스띠야어 - 옮긴이] 설명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바뀐 까닭은 이 고문서들이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지위를 증명하기 위해[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 “가계도 등의 정보를 그림문자로 남겼[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지만, 침략자이자 정복자이며 새 지배자인 에스파냐 사람들도 메히까 제국의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새로운 종교[천주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제대로 파악해야 했기 때문에 원주민 필경사에게 지시하여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 신화[본향(本鄕)풀이 옮긴이]등을 기록[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했기 때문이며, 정복 이후에 유럽에서 신비로운아메리카[거북섬 옮긴이] 원주민의 이야기를 이색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고문서는 많은 인기를 끌었[ 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에스파냐 사람들을 비롯한 유럽인이 고문서의 새로운 독자가 되면서, 그들이 고문서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책의 모양을 유럽식으로 바꾸고 라틴 알파벳으로 적은 글을 함께 집어넣은 것이다)

 

, “스페인 식민지 시대(서기 1521 ~ 1821. 에스파냐 정복 이후 옮긴이)의 고문서가 대부분 유럽 독자를 위해 제작되었다는(만들어졌다는 옮긴이) 것에 주의해야(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하는데, 그 책들이 때로는 유럽 독자의 흥미에 맞춰 사실보다 과장되거나 (사실을 옮긴이) 왜곡했을 수도 있기 때문(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사실이나 진실을 캐내는 일 자체를 안 할 수는 없다. 메히까 제국의 갈마와 문화와 사회와 본향풀이를 아는 데, 고문서만한 사료[史料]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고증하고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유물이나 유적이나 사람 뼈/짐승 뼈/식물의 씨앗 따위와 견주어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은 버리고, 올바른 것임이 밝혀진 부분은 받아들여야 한다)

 

한마디만 더 하고 이 글을 매듭짓자. “현재(서기 2022옮긴이) 고문서의 제목은 대부분 소장자나 보관처 등의 이름을 붙였지만(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메히까 제국 사람들이나 그 유민들이 만든, 메히까 제국을 다룬 고문서인데도 유럽 사람들의 성씨(: 멘도사)나 유럽의 땅 이름이 들어간 이름이 붙은 건 이 때문이다 – 개마두리], 최근에는 고문서의 내용을 반영한 새로운 이름을 함께 사용하기도(쓰기도 옮긴이)[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 한다(나는 이것이 아주 바람직한 바뀜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메히까 제국의 갈마를 유럽 중심주의와 근세/근대의 제국주의에서 구해 내는 일이고, 나아가 그것에 제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디 앞으로는 모든 메히까 고문서에 유럽 사람들의 성씨가 유럽의 땅 이름 대신, “고문서의 내용을 반영한 새로운 이름이 붙기를 빈다 – 개마두리).

 

참고 자료

 

- 아스테카 :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 소책자 )

 

- 우리민족의 대이동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멕시코 편) ( ‘손성태지음, ‘코리펴냄, 서기 2014)

 

- 밀림속의 신비한 문명탐험 ( ‘루이르네 누지에지음, ‘이건숙옮김대흥펴냄, 서기 1990)

 

- 단기 4357년 음력 318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