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는 부각하고 어두운 역사를 감추고 싶은 것은 민족국가의 숙명이다(실은, 종교단체나 특정 인종이나 지역사회나 기업도 이건 마찬가지다 – 옮긴이). 국민(또는 시민 – 옮긴이)이 자국 역사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국가 존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역사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풀이 – 옮긴이)이 작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주변국과의 마찰도 불사하고 추진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 수정주의’, ‘역사 왜곡’이라 부른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우경화하고 있는(우경화‘하는’ - 옮긴이)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은 해당 사례의 대표적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돕는 것이 ‘한국’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부 기관이 앞장서서 일제 강점기(올바른 이름은 ‘대일[對日] 항전기’ - 옮긴이) (근대 왜국의 한국 – 옮긴이) 수탈의 증거를 조사 한 번 없이 파괴하려는 것이 현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 경향신문 』 이 연속 보도한 ‘인천 일본 육군 조병창(造兵廠. 병기[兵]를 만드는[造] 공장[廠] - 옮긴이)’[이하 ‘인천 조병창’ - 옮긴이]이다.
철거 위기에 직면한 인천 조병창(이게 세 해 전의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옮긴이)을 지키려는 것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토론회, 기자회견, 시위 등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인천 조병창을 힘겹게 지키고 있다.
하지만 개발 논리는 이들의 의지를 무겁게 짓누른다. ‘역사’보다 귀한 것은 현 시대 사람들의 ‘이익’이라는 논리가 모든 문제의식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존’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어쩌면 조병창이 아닌 ‘피해국의 자존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을 돕는 사람 중에는(中에는 → 가운데는 : 옮긴이) ‘일본인’ 기쿠치 미노루 중국 허베이(하북[河北] - 옮긴이) 외국어대 교수가 있다.
기쿠치 교수는 국내 문화유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름이다. (그는 – 옮긴이) 일본 ‘군마’현 매장문화재 조사사업단에서 34년간 일하며 일본 내 전쟁유적 보존에 앞장섰다. “일본인이 남의 나라를 침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이미 국경을 초월해 있다(뛰어넘은 지 오래다 – 옮긴이). 또, “일본인의 전쟁기억이 한국,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과 다르다.”는 (그의 – 옮긴이) 비판은 역사문제를 감정이 아닌 객관적 시각으로 봐야 할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인천 조병창 철거에 반대해 국내(한국 안 – 옮긴이) 강연에도 나서고 있는 기쿠치 교수와 지난 10월 26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 김찬호 기자(아래 ‘기자’ - 옮긴이) : 일본인의 ‘전쟁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는 것은 어떤 의미(뜻 – 옮긴이)인가?
- 기쿠치 교수(아래 ‘기쿠치’ - 옮긴이) : “일본에서 ‘전후 70년’을 이야기할 때는 일본 본토(내지)[정확히는, 구주(九州 : 규슈) 섬과 사국(四國 : 시고쿠)섬과 본주(本州 : 혼슈) 섬 – 옮긴이]와 본토 외 지역(외지)을 구분해 말한다.
본토의 경우 (서기 – 옮긴이) 1944년 (양력 – 옮긴이) 6월부터 본격화된(본격화‘한’ - 옮긴이) 미군 B-29 폭격기에 의한 공습 피해 기억이 주가 된다. 1945년 3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전(유구[琉球]에서 벌어진, 미군과 근대 왜군의 전쟁. 이 전쟁 때 수많은 유구 유민들이 근대 왜군에게 ‘첩자’나 ‘미군에게 협력하는 자’라는 의심을 받고 죽임을 당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강요당했다 – 옮긴이),
육해군 항공기에 의한 특공작전 그리고 본토 결전 준비(미군이 구주/사국/[도쿄를 포함한]본주 섬으로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해, 근대 왜국 정부와 군대가 자기나라 국민들에게 싸울 것을 명령한 일. 왜국 군부는 학교 건물도 군사기지로 쓰려고 했고, 소총이나 기관총을 들고 덤비는 미군에 맞서 “죽창”이나 “석궁”을 써서라도 싸우라고 명령하고 훈련도 시켰다. 그리고 열도 곳곳에 동굴을 파서 그곳을 격납고로 삼아 전투기를 숨기기도 했다 – 옮긴이) 등도 대표적인 전쟁기억이다.
외지의 경우에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부터 남태평양 최대의 격전지 중(가운데 – 옮긴이) 하나인 과달카날전, 전후 시베리아 억류 기억 등이 대표적이다. 즉, 전쟁을 직접 겪은 일본인들(왜인[倭人]들 – 옮긴이) 대부분은 (자신들이 – 옮긴이) ‘전쟁의 희생자’라는 감정기억 인식이 강하다.”
- 기자 : 이는 피해국인 한국,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전쟁기억’과는 상당이 다른데.
- 기쿠치 : “한국은 1910년부터 시작된 36년(만으로는 35년 – 옮긴이)간의 식민지 지배 기억을 갖고 있다(나아가 서기 1894년부터 서기 1909년까지 진행된 근대 왜국의 근세조선/대한제국 침략도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다 – 옮긴이).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인간의 존엄을 박탈했으며 언어(말 – 옮긴이)와 이름도 빼앗아갔다는 기억이다. 폭력적 지배와 토지수탈, 황민화(皇民化. ‘황국신민화’를 줄인 말. 다른 말로는 ‘왜국화[倭國化]’로도 부를 수 있다. 근대 왜국 정부와 총독부가 자신이 점령/정복/지배한 식민지들에서 원주민에게 - 자신의 문화와 갈마와 정체성을 버리고 - 왜인이 될 것을 강요한 정책이다 – 옮긴이) 정책에 의한 조선어(‘한국어’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 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강제 동원(노예노동 강요 – 옮긴이), 위안부(근대 왜군[倭軍] 성[性]노예. ‘일본군 성노예’ - 옮긴이)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도 1931년 만주사변(‘만주<침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정확하다 – 옮긴이) 등(같은 – 옮긴이)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기억이 있다.
일본인의 피해자 인식은 당시 일본 정부(근대 왜국 정부 – 옮긴이) 특히 군부에 대한 혐오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인이 아니라] 일본인 가운데 – 옮긴이) 일부(가 – 옮긴이) ‘(우리[일본인]는 우리가 – 옮긴이) 가해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에 불과한(지나지 않는 – 옮긴이) 것이 현실이다.”
- 기자 :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 기억을 둘러싼 국가별(나라별 – 옮긴이) 간극은 커지는 것 아닌가?
- 기쿠치 : “그와 관련해 국가(나라 – 옮긴이) 차원의 토론회도 진행된 바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국가 차원의 합의를 기다리기보다, 시민 사회 차원에서 각 지역에 남은 전쟁 유적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활동부터 시급히 시작해야 한다.
일본의 패전 이후 70여 년이 지났다. 이 세월은 전쟁을 직접(몸소 – 옮긴이) 체험한(겪은 – 옮긴이) 세대가 남긴 ‘기억’이 풍화되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다(나도 그 사실이 걱정되고 염려된다 – 옮긴이).
결국 비극을 반복하지(되풀이하지 – 옮긴이) 않기 위해서는, 전쟁 실상을 다음 세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방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전쟁기억’이 새겨져 있는 일본 각지와 해외의 ‘전쟁유적’을 보존하고 활용해야 한다.
전쟁유적은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부(한국식 이름 ‘간도’. 다른 이름은 ‘만주’다. 나는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만주’도 ‘중국 동북’도 아닌 제 3의 이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제안은 나중에 다른 글을 올려 상세하게 설명하겠다 – 옮긴이)에 수많은 전쟁유적이 남아 있고, 출토된 유물들은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문화재로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각국에도 일본군에 의한 현지 주민 학살 기림비가 있다.
전쟁유적은 근대 일본의 역사와 아시아 각국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유적이다. 역사를 가해와 피해의 양면에서 바라보게 하고, 아시아 전체의 움직임 속에서 고민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전쟁유적이다.”
- 기자 : 전쟁유적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 기쿠치 : “<전쟁기억이 각인된 전쟁유적>이라 함은 근대 일본의 침략 전쟁과 그 수행과정에서 형성된(이루어진/만들어진 – 옮긴이) 것들을 말한다. 따라서 시대 범위로 따지면 일본의 막부(도쿠가와 막부 – 옮긴이) 말/개국 무렵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때까지가 된다.
조사 연구 지역은 일본 국내에 한정되지 않고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동남아시아, 서태평양지역(오세아니아에 속한다. 오세아니아는 2차 대전 때 미군과 근대 왜군이 싸웠던 곳이다 – 옮긴이), 즉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에 이른다.
일본을 예로 들면, 2021년 8월 기준 전쟁유적으로 국가 지정문화재 40건, 현(縣. 한국으로 치면, ‘도[道]’인 일본의 행정구역 – 옮긴이) 지정 18건, 시/구/정(町. 한국으로 치면, ‘면’ - 옮긴이)/촌 등록문화재 15건, 도 유산/시민 문화자산 11건 등 총 319건이 지정돼 있다.
1990년 오키나와현(유구[琉球] - 옮긴이)에서 처음으로 전쟁유적 ‘하에바루 육군병원’을 문화재로 지정했다. 5년 뒤(서기 1995년 – 옮긴이) ‘특별 사적/명승 천연기념물 지정기준’ 일부가 개정돼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주요 유적이 사적 지정 대상이 됐다. 이에 따라 히로시마 원폭 돔이 국가 사적이 됐고, 이듬해에는 세계유산에까지 등재됐다.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 돔으로 대표되는 피해 유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조사와 보존을 진행해 왔지만, 가해에 관한 유적, 예를 들면 당시 조선인(한국인 – 옮긴이)이나 중국인(중화민국 ‘한족[漢族]’. 그러니까 제하[諸夏] 시민 – 옮긴이)의 강제 동원 증거인 지하공장에 대해서는 대응이 소극적인 상황이다.”
- 기자 :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에는 과거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이 있지 않나?
- 기쿠치 : “최근(서기 2010년대 후반? - 옮긴이) 일본에서도 전쟁 관련 유적과 유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역사적 유적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나타나면서 크고 작은 문제도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시마네현(이 현은 독도가 자신에게 속하는 섬이자, 왜국 땅이라고 우기는 현이기도 하다 - 옮긴이)에 있는 구(옛 – 옮긴이) 일본 해군의 ‘다이샤 기지’와 히로시마시에 있는 구 일본 해군 ‘보충대 시설’ 터다.
보존을 주장하는 쪽은 ‘다음 세대에게 전쟁의 참상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라는 절실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 옮긴이)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전쟁 포기’를 담은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기자 : 일본 일각에서 ‘전쟁유적’을 ‘군사유적’으로 부르는 움직임도 있다는데?
- 기쿠치 : “(그것은 – 옮긴이) <군사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쓰며 – 옮긴이) 일본(근대 왜국 – 옮긴이)이 저지른 침략전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풀이하려는 – 옮긴이) 시도다.
이런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 전쟁을 전체 틀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 군사 부문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유적’이라고 하면 전쟁에 관련된 모든 유적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일본 메이지 시대 이후 군 사단이나 연대에 관한 유적, 연안 요새, 육해군의 공창(公娼. 관청의 허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나 그 여성들이 있는 곳 – 옮긴이)터, 기지, 포로수용소 등이 다 포함된다.
그런데 ‘군사유적’이라고 하면 전쟁과 관련된 부정적 기억은 그 꼬리표를 떼고, 오직 군사 활동만 소개하게 된다.
최근 일본 자위대 간부학교나 방위대학교 관계자들로부터 ‘근대 군사유산은 대동아전쟁(왜국 우익이 2차 대전을 부르는 이름 – 옮긴이) 당시 우리들의 선조, 선배들이 일본을 지켜내려 했던 증거’라며, ‘지자체(<지방자치단체>를 줄인 말. 시/도/구/면/성[省]/현이 여기에 포함된다 – 옮긴이)가 각각의 군사유산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보존에 힘써주길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자위대의 인식이 근대 왜군[倭軍] - 이른바 ‘옛 일본군’ - 과 다르지 않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만약 이 조직이 다시 군대가 되면, 그땐 중세 말기의 왜구[倭寇]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倭軍]이나 근대 왜군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를 게 뻔한데, 그런데도 ‘자위대가 유사시에 한국으로 들어오는 건 안 된다는 한국인들의 인식은 대단히 편협[한때 한국 국방부 장관 후보였던 한국인(?) 교수의 주장]’한가? 마크 램지어 교수 같은 친일국가의 사냥개들과, 윤석열 왜국 조선 총독 같은 종일파[從日派. 왜국을 (종처럼) 따르는 사람. 이완용 같은 자들의 사상/성향/말/행동을 평가할 때는, ‘왜국과 친한 사람’이라는 뜻인 ‘친일파’ 대신 이 말을 쓰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들은 이런 내 질문에 당장 대답하라! - 옮긴이).
이들(자위대 간부와 방위대학교 관계자 – 옮긴이)은 오키나와의 전쟁유적이나 전국에 산재해(흩어져 있는 – 옮긴이) 있는 공습 흔적 같은 비군사시설(민간시설)을 ‘일본을 지키려 한 긍정적 군사활동’으로 변모시키고(모습을 바꾸고 – 옮긴이), 강제동원 현장(나아가 [미성년자를 비롯한] 한국인 노동자들이나 연합군 포로들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한 현장 – 옮긴이)인 지하공장 같은 유적은 지워버리려고 한다.
쉽게 말해, 군사유적이라는 시점으로는 일본 국내외에 남겨진 전쟁 당시 유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기자 : 인천에 있는 일본 육군 조병창도 전쟁유적 아닌가.
- 기쿠치 : “그렇다. 인천 조병창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알리는 주요 증거다. 일본에도 조병창과 관련된 시설이 일부 보존돼 있다. 인천 조병창이 보존된다면, 한일 양국(兩國. 두[兩] 나라[國] - 옮긴이)의 다음 세대들이 수학여행 같은 것을 통해 침략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확인하고 공부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기자 : 인천 조병창은 한국 지자체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놓였는데.
- 기쿠치 : “그토록 쉽게 파괴해 버린다면, 한국의 다음 세대에게 침략의 역사(갈마 – 옮긴이)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지 않겠나. 일본인들이 남의 나라를 침략했던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같이 중요한 시설은 꼭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내(안 – 옮긴이)에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관심을 갖고 협력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역사의 화해는 세대를 뛰어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그리고 갈마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과, 사람들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도 필요하다 – 옮긴이). 조병창 같은 건물을 남겨 한일 양국의 다음 세대가 전쟁의 참상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궁극적으로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계기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 기자 : 왜 일본에 부정적인 전쟁유적을 보존하려고 그토록 노력하나?
- 기쿠치 : “전쟁유적들이 언젠가 우리 모두가 화해(가해와 피해, 사죄와 보상)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일본이 침략전쟁과 (점령과 – 옮긴이) 식민지배로 아시아인들에게(나아가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에게도 – 옮긴이) 치유하기 힘든 고통(괴로움 – 옮긴이)을 주었다는 것부터 알릴 필요가 있다. 전쟁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 유적, 유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계속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전쟁을 말하는 장소로써, 전쟁 유적을 끝까지 지켜나가고 싶다.”
-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 『 경향신문 』 서기 2021년 양력 10월 31일자 기사
▣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평범한 한국인인 나는 이 기사에 나온 기쿠치 교수님 같은 분은 ‘왜인(倭人)’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분 앞에서는 ‘왜국(倭國)’이 아닌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을 제대로 쓸 것이며, “만약 교수님이 하시는 일이 잘 되어 한국과 일본이 전쟁유적들을 제대로 보존한다면, 저 또한 평양(조선노동당)의 일본인 납치가 잘못된 것임을 (한국 안의 조선인 망명자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겠습니다.”하고 약속할 것이다.
나아가 그 분 앞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밝은 얼굴로) 내가 「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 」 라는 고대 일본의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고, 일본 중세 소설인 『 헤이케 이야기 』 를 읽어보고 싶어했으나 그러지 못했음을 털어놓을 것이며, 바쇼 시인의 하이쿠를 다룬 책을 샀다는 것도 말씀드릴 테고, 중세 일본 수필인 『 도연초(徒然草) 』 와 중세 일본의 종교 서적인 『 탄이초(歎異抄) 』 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음을 알려드리고,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석전매암])’ 선생의 검약론(“검약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를 위해서 인색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원래는 내가 – 옮긴이] 세 개 쓸 것을 두 개만으로 족하게 하는 것[그래야 나머지 한 개는 다른 사람이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을 검약이라고 한다.”는 주장)을 접한 뒤 감동을 받았음도 말씀드릴 것이며, ‘미야자와 겐지’ 선생의 동화인 『 주문이 많은 요리점 』 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사실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작가의 동화(아니, 단편소설?)인 「 두자춘 」을 읽으며 감동했다는 것도,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이 ‘협동조합을 통한 경제와 사회의 건설’을 주장하며 쓰신 책인 『 우애의 경제학 』 을 읽으며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자본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는 것도 다 털어놓으리라.
또한 그분 앞에서 “고대 말기에 일본을 약탈했던 신라 해적은 그냥 해적이었을 뿐이죠. 왜구가 해적일 뿐이듯이요.”하고 담담하게 말할 것이고, 몽골제국의 군사와 함께 일본으로 쳐들어갔던 후기 고리(高麗) 군사들이 “침략군”이라는 사실도 순순히 인정할 것이며, 서기 10세기 이후 이른바 ‘국풍화(國風化)’ 현상으로 고대 말 ~ 중세 초에 나타난 일본문화는 그 자체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 앞에서 내가 일본인 학자들이 쓴 역사책을 읽으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갈마(‘역사’)나 타완틴수유(‘잉카’) 제국의 갈마나 동로마 제국의 갈마를 배웠다는 것도 털어놓을 테고, 제국주의나 군국주의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운동(그리고 태도)도 (왜인이 아니라) 일본인 사상가나 학자나 평화운동가나 진보주의자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고 말하리라.
또한 만약 그분이 쉬고 싶어서(또는 공부나 연구나 관광을 하러) 한국으로 오신다면, 나는 그분을 손님이자 이웃으로서 반갑게 맞아들일 것이며, 그분이 좋아하실 만한 한국 음식(예를 들면, 맵지도 짜지도 않은 음식인 삼계탕이나 칼국수나 백김치나 약과나 인절미나 유과나 다식이나 동치미나 [마늘이 없는]사찰 음식이나 양반 음식이나 궁중 음식)을 대접하고, 이른바 ‘민화(나는 이것을 “천인화[天印畵]”로 부르자는 제안에 찬성하지만)’ 같은 한국의 전통 예술품을 아토(‘선물[膳物]’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로 안겨드리고, 한국 국악을 담은 CD나 DVD를 사 드리고, 서원(書院)으로 안내해 드리고, 박물관으로 안내해 드리고, 판소리나 사물놀이 공연을 보여 드리고, 광대놀음이나 탈춤 같은 공연도 보여 드리고, 설악산이나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도 보여 드릴 것이다(그리고 그 분이 악덕 상인에게 바가지를 쓰지 않도록, 철저하게 그 분을 도울 것이다!). - 나아가 그분에게 율곡 선생의 책인 『 동호문답 』 과, 퇴계 선생의 책인 『 자성록 』 과, 연암 선생의 책들과, 배달민족의 본향풀이(‘신화’)를 담은 책과, 배달민족의 옛날이야기들을 담은 책과, 이규보 선생의 글들을 담은 책과, 현대 한국 우화집인 『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와 역시 현대 한국 우화집인 『 숲 』 도 안겨 드릴 것이다 -
덧붙이자면, 만약 기쿠치 교수님이 지진이나 홍수나 화산폭발이나 해일로 큰 피해를 입으셨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서 재건을 도울 것이고, 그 분을 위한 구호품을 드릴 것이며, 그분을 위해 약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교수님이 하루빨리 회복하여 일상으로 돌아가시기를 빌 것이다(그것도 마음 속으로만 비는 게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리라).
그러나 넷우익이나 재특회나 혐한 서적을 쓰는 작가들이나 (평소에는 아무런 의견을 안 드러내면서, 막상 선거 때는 자민당에 표를 던짐으로써 한국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대다수 왜인(倭人), 아니, 왜구(倭寇)들에게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굴 생각인데, 여기까지 읽느라 힘드셨을 분들을 위해 그 생각을 줄여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난 그것들 앞에서 그것들을 ‘왜구(倭寇)’라고 부를 것이고, 그게 안 되면 ‘왜인(倭人)’이라는 명칭을 쓸 것이며, ‘일본’ 대신 ‘왜국(倭國)’이라는 나라 이름을 쓰는 것을 고집하겠다.
그리고 그것들 앞에서는 “너희가 왜구의 납치,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왜군의 노예사냥, 2차 대전 때의 성노예/노예노동을 인정/사죄/배상하지 않는 한, 나도 평양 시민들한테 ‘이른바 <일본인 납치>는 배상하지도, 사죄하지도 마세요! 그건 이미 <다 끝난 옛날 일>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말할 거야!”하고 딱 잘라 말할 것이며,
나아가 마비키나 요바이 같은 야만스러운 옛 왜국 문화를 큰 소리로 강조하며 “이런 쓰레기 같은 문화를 지닌 나라를 존경하느니, 차라리 독사를 존경하는 게 낫지!”하고 덧붙일 테고,
“너희가 왜구를 ‘해외 웅비의 사례’로 가르치길래, 나도 우리 동족인 한국 학생들 앞에서 신라 해적을 그렇게 가르치기로 했어. 그리고 너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을 ‘조선 <정벌>’로 가르친다며? ‘출병’이라는 말만 쓰지, ‘침략’이라는 말은 안 쓴다며? 그래서 나도 후기 고리(高麗) 군사들과 몽골제국 군사들이 왜국으로 쳐들어간 건 ‘진출’이라고 가르치기로 했어. 딱 너희가 한 그대로 되돌려 줄 거야.”하고 큰 소리로 떠들 테며,
“수오미(핀란드의 정식 국호)나 도이칠란트는 존경할 수 있는데, 너희 나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존경을 못 하겠어. 그 두 나라보다 훨씬 형편없잖아? 너희한테서는 아무것도 배울 게 없어.” 하고 말할 생각이다.
만약 그것들이 반한(反韓)/혐한 시위를 하려고 한국에 온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것들에게 “돌”을 던지며 꺼지라고 소리지를 생각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말해 두겠다(몇 해 전, 왜국 우익이 길거리에서 “여러분, 만약 [왜국의] 길거리에서 한국인을 보면, 그것들에게 <돌>을 던지세요!”하고 큰 소리로 떠든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난 그것들이 그렇게 떠드는 움직그림을 유튜브에서 봤고, 아직까지 그걸 기억한다!).
설령 혐한하고 반한 감정을 드러내는 자가 왜국 왕족이라 하더라도, 난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거칠게 말할 테며, 그 다음에는 “돌”을 던질 거라는 걸 이 자리를 빌어 확실하게 말하리라. 내게는 배달민족의 존엄성이 중요하지, 침략자들의 우두머리인 자의 명예나 권위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시리라 믿으며 이만 펜을 내려놓는다.
- 단기 4357년 음력 5월 22일에, (평소에 목숨 걸고 자기 나라 정부와 우익에 맞서 싸우신) 일본인들과, (왜구[倭寇]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부와 우익과 왕실이 시키는 대로 혐한/반한을 일삼고 자기 나라의 침략전쟁이나 야만적인 관습도 합리화하는) 왜인은 구분하고 싶은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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