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융(西戎) : 제하[諸夏]의 서북쪽인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동남부와 영하(寧夏) 회족 자치구에 살던, ‘한족(漢族)’이 아닌 겨레를 일컫는 말.
융왕(戎王. ‘서융’의 임금. 참고로, 왕[王]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천자만 쓸 수 있는 명칭이었으므로, 서융의 힘이 셌고, 그래서 이른바 ‘중원’이 이들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은 진(秦)에 유여(由余)를 사신으로 보냈다. 유여의 선조는 (서주[西周]/동주[東周]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므로, ‘진짜 중국’이자, ‘진짜 중원’이라고 볼 수 있는 – 옮긴이) 진(晉)나라 사람(그러니까, ‘진짜 한족[漢族]’ - 옮긴이)인데, 융(戎) 지역으로 달아났으므로, 유여는 진(晉)나라 말을 할 줄 알았다. 융왕은 (진[秦]의 군주인 – 옮긴이)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유여를 보내 진(秦)나라를 살피게 한 것이다.
진 목공은 유여에게 (진[秦]나라의 – 옮긴이) 궁실과 (그곳에 – 옮긴이) 쌓아놓은 재물을 보여주었다.
유여는 “이러한 궁실과 재물을 귀신에게 만들어내라고 해도 귀신을 힘들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만들라고 하면 백성들 또한 고달플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목공은 그의 말을 이상야릇하다고 여기며, (그에게 – 옮긴이) “중원(中原. 여기서는 화북 지방 – 옮긴이)은 시, 서(글 – 옮긴이), 예(예의 – 옮긴이), 악(음악 – 옮긴이), 법도(법과 제도 – 옮긴이)로 나라를 다스리는데도 늘 난리가 일어나는데, 지금 융족(戎族)은 이러한 것들이 없으니,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오? (그 일이 – 옮긴이) 어렵지 않소?”하고 물었다.
유여는 웃으며
“이것이 바로 중원 땅에 난리가 일어나는 까닭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의 성인(聖人. 슬기와 덕이 뛰어나, 길이길이 우러러 받들어 본받을 만한 사람/임금이나 왕비 같은 지배자 : 옮긴이) 황제(黃帝. 본명은 ‘헌원[軒轅]’. 공손 씨족 출신이다. ‘중화권’의 ‘한족’들은 자신들을 ‘황제의 후손’으로 부른다 : 옮긴이)께서 예악과 법도를 만드신 뒤로 몸소 남보다 앞장서서 행하여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시어 겨우 나라가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임금들은 날로 교만하고 음락(飮樂. [술을] 마시며[飮] 즐김[樂] - 옮긴이)에만 빠졌습니다.
그들은 법률제도의 힘을 믿고 백성들의 잘못을 캐묻고 꾸짖으며 (그들을 – 옮긴이) 감독하니, (그런 임금 – 옮긴이) 아래의 백성들은 아주 지치고 쇠약해져서 임금을 원망하며 (임금과 나라에게 – 옮긴이) 어짊과 올바름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른바 ‘중원’에서 – 옮긴이)위아래가 서로 다투고 원망하며 서로 자리나 나라를 빼앗고 (상대방을 – 옮긴이) 죽여서 멸족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까닭은 모두 이러한 것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융(戎)족(서융인 – 옮긴이)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충성으로 그 윗사람을 받들므로, 한 나라의 정치가 사람이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것같이 잘 다스려지지만, 잘 다스려지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참된 성인(聖人)의 다스림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 진(秦) 목공(穆公. 본명 ‘영임호[嬴 任好]’) 34년(서기전 625년)에 일어난 일
- 『 사기(史記) 』 「 진본기( 秦本紀 ) 」 의 기사
▶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나는 이 글이 중화사상과 ‘한족(漢族)’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인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나라 사람들을 공격하는 지나(支那) ‘한족(漢族)’들(크게 보면, 대만과 홍콩과 화교 사회를 비롯한 온 ‘중화권’의 ‘한족’들)과 맞설 때 쓸만한 병기(兵器)가 될 것이라고 여겨 이 글을 여러분에게 인용/소개한다.
중화사상/화이 사상을 부정하고 ‘고상한 야만’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이미 2649년 전, 그러니까 춘추시대에 있었다는 점이 놀랍고, 그것도 ‘주(周)나라 사람의 후손’이자 진짜로 ‘한족(漢族)’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그런 목소리를 냈다는 점도 놀라우며, 청일전쟁에서 져 중화사상의 정당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서기 1894년보다 2519년 전에 중화사상의 뿌리 자체를 부정한 목소리가 나왔다는 점도 놀랍기 그지없다.
서기 18 ~ 19세기에 서구 사회에서 ‘고상한 야만’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나온 점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읽어보면, 문명의 결점과 해악을 비판하고 이른바 ‘야만족’이나 ‘미개인’으로 불린 사람들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나온 건 어느 ‘문명’ 사회나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이며 이 글을 맺는다.
- 단기 4357년 음력 7월 10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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