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제하(諸夏)사] ‘중원’의 복잡함을 비판하고 ‘서융’의 간략함을 칭찬한 유여(由余)

개마두리 2024. 8. 13. 22:00

서융(西戎) : 제하[諸夏]의 서북쪽인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동남부와 영하(寧夏) 회족 자치구에 살던, ‘한족(漢族)’이 아닌 겨레를 일컫는 말.

 

융왕(戎王. ‘서융의 임금. 참고로, []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천자만 쓸 수 있는 명칭이었으므로, 서융의 힘이 셌고, 그래서 이른바 중원이 이들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은 진()에 유여(由余)를 사신으로 보냈다. 유여의 선조는 (서주[西周]/동주[東周]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므로, ‘진짜 중국이자, ‘진짜 중원이라고 볼 수 있는 옮긴이) ()나라 사람(그러니까, ‘진짜 한족[漢族]’ - 옮긴이)인데, () 지역으로 달아났으므로, 유여는 진()나라 말을 할 줄 알았다. 융왕은 ([]의 군주인 옮긴이)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유여를 보내 진()나라를 살피게 한 것이다.

 

진 목공은 유여에게 ([]나라의 옮긴이) 궁실과 (그곳에 옮긴이) 쌓아놓은 재물을 보여주었다.

 

유여는 이러한 궁실과 재물을 귀신에게 만들어내라고 해도 귀신을 힘들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만들라고 하면 백성들 또한 고달플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목공은 그의 말을 이상야릇하다고 여기며, (그에게 옮긴이) “중원(中原. 여기서는 화북 지방 옮긴이)은 시, (옮긴이), (예의 옮긴이), (음악 옮긴이), 법도(법과 제도 옮긴이)로 나라를 다스리는데도 늘 난리가 일어나는데, 지금 융족(戎族)은 이러한 것들이 없으니,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오? (그 일이 옮긴이) 어렵지 않소?”하고 물었다.

 

유여는 웃으며

 

이것이 바로 중원 땅에 난리가 일어나는 까닭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의 성인(聖人. 슬기와 덕이 뛰어나, 길이길이 우러러 받들어 본받을 만한 사람/임금이나 왕비 같은 지배자 : 옮긴이) 황제(黃帝. 본명은 헌원[軒轅]’. 공손 씨족 출신이다. ‘중화권한족들은 자신들을 황제의 후손으로 부른다 : 옮긴이)께서 예악과 법도를 만드신 뒤로 몸소 남보다 앞장서서 행하여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시어 겨우 나라가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임금들은 날로 교만하고 음락(飮樂. [술을] 마시며[] 즐김[] - 옮긴이)에만 빠졌습니다.

 

그들은 법률제도의 힘을 믿고 백성들의 잘못을 캐묻고 꾸짖으며 (그들을 옮긴이) 감독하니, (그런 임금 옮긴이) 아래의 백성들은 아주 지치고 쇠약해져서 임금을 원망하며 (임금과 나라에게 옮긴이) 어짊과 올바름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른바 중원에서 옮긴이)위아래가 서로 다투고 원망하며 서로 자리나 나라를 빼앗고 (상대방을 옮긴이) 죽여서 멸족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까닭은 모두 이러한 것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융()(서융인 옮긴이)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충성으로 그 윗사람을 받들므로, 한 나라의 정치가 사람이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것같이 잘 다스려지지만, 잘 다스려지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참된 성인(聖人)의 다스림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 () 목공(穆公. 본명 영임호[嬴 任好]’) 34(서기전 625)에 일어난 일

 

- 사기(史記) 』 「 진본기( 秦本紀 ) 의 기사

 

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나는 이 글이 중화사상과 한족(漢族)’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인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나라 사람들을 공격하는 지나(支那) ‘한족(漢族)’(크게 보면, 대만과 홍콩과 화교 사회를 비롯한 온 중화권한족)과 맞설 때 쓸만한 병기(兵器)가 될 것이라고 여겨 이 글을 여러분에게 인용/소개한다.

 

중화사상/화이 사상을 부정하고 고상한 야만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이미 2649년 전, 그러니까 춘추시대에 있었다는 점이 놀랍고, 그것도 ()나라 사람의 후손이자 진짜로 한족(漢族)’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그런 목소리를 냈다는 점도 놀라우며, 청일전쟁에서 져 중화사상의 정당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서기 1894년보다 2519년 전에 중화사상의 뿌리 자체를 부정한 목소리가 나왔다는 점도 놀랍기 그지없다.

 

서기 18 ~ 19세기에 서구 사회에서 고상한 야만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나온 점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읽어보면, 문명의 결점과 해악을 비판하고 이른바 야만족이나 미개인으로 불린 사람들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나온 건 어느 문명사회나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이며 이 글을 맺는다.

 

- 단기 4357년 음력 710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