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힌두스탄 : 네루
힌두스탄 – 강의 땅(민족), 또는 힌두교도의 땅을 가리키는 이 페르시아식 명칭은 때때로 인도(정식 국호 ‘바라트 연방 공화국’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전체를 지칭하는(가리켜 부르는 – 옮긴이) 말로, 때로는 북부 인도 전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돼왔다.
벵골이나 봄베이(오늘날에는 ‘뭄바이’로 불리는 도시 – 옮긴이), 때로는 펀자브 주민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보다 제한적인 의미(뜻 – 옮긴이)는 북쪽이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상류 갠지스(바라트 현지에서는 ‘강가’로 부르는 가람[강] - 옮긴이)와 줌나강이 적셔주는 광대하고 비옥한(넓고 기름진 – 옮긴이) 평야를 가리킨다.
인도 아대륙 중심부에 자리잡은 힌두스탄에는 힌두교도들이 소중히 여기는 도시와 기념물들(예컨대 비나레스와 마두라, 알라하바드의 순례 도시들)과 이슬람 교도(모슬렘[올바른 명칭은 ‘무슬림’ – 옮긴이])들의 그것(아그라, 델리, 러크나우에 있는 예전의 모슬렘 도읍들)이 산재해 있다(흩어져 있다 – 옮긴이).
(서기 – 옮긴이) 19세기 말에 영국이 힌두스탄을 정복하기까지 6세기에 걸친 모슬렘들의 이 땅에 대한 지배는 힌두 문화와 모슬렘 문화를 혼합하고(뒤섞고 – 옮긴이), 힌두스탄 말로 알려진 독특한 혼합 방언(사투리 – 옮긴이)을 만들어냈다. 힌두스탄 말은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 – 아랍계 어휘들로부터 흡수한 단어(낱말 – 옮긴이)들을 융합한(녹인 – 옮긴이) 것이다.
네루 가문의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는 이처럼 힌두스탄에서 힌두 – 모슬렘의 융합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근대 서구의 이념과 제도에 대해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네루 가문(집안 – 옮긴이)은 원래 카슈미르에서 온 브라만 계급이었다. 카슈미르는 13세기에 모슬렘(들의 – 옮긴이) 정복이 이뤄진 뒤 모슬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1716년께에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정확한 명칭은 ‘파르시[farsi]’ - 옮긴이) 학문으로 유명했던(이름을 날렸던 – 옮긴이) 네루 가문의 일부가 무굴제국 황제 ‘파루크시야르’의 초청으로 델리(오늘날의 뉴델리. 당시에는 무굴 제국의 도읍이었다 – 옮긴이)에 와서 살게 되었다. 힌두스탄이 18세기에 전쟁과 침략으로 혼란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불구하고’는 빼야 문법/어법과 맞다 – 옮긴이) 네루 가문은 자신들의 학문적 전통을 지켰으며, 새로운 정복자들(영국인들 – 옮긴이)이 19세기 초 이 땅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자와할랄 네루의 증조부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왕실이자 델리의 왕으로 격하된 무력한 ‘샤 알람’ 황제의 궁정 담당 법률 고문으로 간택했다.
페르시아어 및 영어 지식은 네루 가문에 효자 노릇을 했다. 1857년 반란과 시민 봉기(힌두스탄에 집중돼 있었으며, 벵갈과 마드라스, 봄베이에는 거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가 그들의 델리 터전을 휩쓸어가버렸으나 그들은 곧 아그라와 북부 인도의 도시들에서 법률 업무에 종사할 수 있었고, 그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그곳에서 드문 상품 가치를 갖고 있었다.
자와할랄(바라트 연방 공화국의 첫 번째 수상이자, 바라트의 독립투사였던 ‘자와할랄 네루’ 말이다 – 옮긴이)의 아버지 ‘마티랄’은 처음에는 페르시아어와 아랍어를 배웠지만, 당시 그 지역 수도 알라하바드에서 영국이 운영하던 고등학교와 무이르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자와할랄은 집에서 영국인 개인 교수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1905 ~ 1912년의 7년간(원문에는 “5년간”이라는 말이 나오나, 서기 1912년은 서기 1905년으로부터 일곱 해가 흐른 뒤이지 다섯 해가 흐른 뒤는 아니므로, 이렇게 고쳤다 – 옮긴이) 영국에 유학하면서 거의 전적으로 영어로 된 교육을 받았다. 이는 19세기말 예전의 힌두 – 무슬림어를 제치고 새로 등장한 힌두 – 영어 통합어의 특징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벵갈 지역(오늘날의 방글라데시 공화국과 바라트의 벵갈 주를 합친 땅 – 옮긴이)에 이미 확립돼 있던 영어 – 힌두어 공생 관계(이는 영국의 바라트 침략과 점령과 정복과 지배가 동인도 지역인 벵갈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옮긴이)와는 달리 네루 가문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융합은 완전히 세속적인 것이었다.
인도 국민회의(원래는 ‘자치를 위한 조직’으로 세워졌으나, 나중에는 독립투쟁을 펼치는 단체가 되었고, 바라트가 독립한 뒤에는 오랫동안 바라트의 여당이었다 – 옮긴이) 지도자로서 네루 가문이 품고 전파시켰던(퍼뜨렸던 – 옮긴이) 민족주의의 형태도 자연히 그와 같은 것이 됐다.
마티랄은 1919년(이 해에 한국에서 3.1 혁명이 일어났다 – 옮긴이)과 1928년에, 그리고 자와할랄은 1929년(이 해에 미국에서 경제대공황이 일어났고, 그 공황은 곧 온누리를 휩쓸었다 – 옮긴이), 1936년, 1937년(이 해에 중일전쟁이 일어나 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와 근대 왜국[倭國]이 싸우기 시작했다 – 옮긴이)에 각각 인도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아버지와 아들(마티랄 네루와 자와할랄 네루 – 옮긴이)이 1920년 마하트마 간디(본명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을 지닌 존칭이다 – 옮긴이)가 제창한 비폭력과 비타협 운동을 수용한(받아들인 – 옮긴이) 것은(까닭은 – 옮긴이) 운동의 종교적 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운동이 정부(영국 정부 – 옮긴이)에 반대하고 정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공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타랄의 관점은 다스와 관점과 유사했다(비슷했다 – 옮긴이). 그는 다스가 1925년 델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자와할랄은 한편으로 자신이 바푸(아버지)라 불렀던 간디에 정서적으로 이끌리는 걸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27년 볼셰비키 혁명 10주년을 맞아 잠시 모스크바에 갔을 때 만났던 ‘로이’와 같은 좌파 지식인들에게 지적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차 타고르(시집 『 기탄잘리 』 로 유명한 그 타고르 시인이 맞다 – 옮긴이)에게도 끌렸으며, 특히 인도(바라트 – 옮긴이)를 세계 모든 문제에 끌어들이려 했던 타고르의 시도에 경도(傾倒. ‘기울어 넘어짐’ →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거나 열중함 : 옮긴이)돼갔다.
자와할랄 네루의 남다른 경력을 일별(一瞥. 한번[一] 흘낏 보다[瞥] : 옮긴이)해보자. 1920년대에 그는 처음 아버지 후견 아래 국민회의 사무총장이 됐다가 30년대와 40년대 초엔 간디의 대리자, 그리고 명백한 후계자가 됐으며 결국 1947 ~ 1964년간 독립된 인도의 총리가 됐다. 우리는 네루의 사고 속에 국제 문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것이 때때로 인도 국내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을 가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거듭 세계적 관점에서 인도 문제를 보려고 했다. 이는 그가 세계관 형성 시절에 생활한 영국 하로우와 트리니티 칼리지, 케임브리지,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직전 세계적 긴장이 높아가던 시기에 7년간 있었던 런던 법학원에서의 경험 등을 통해 몸에 익힌 영국 상류 계급의 전 지구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케임브리지 시절에 나에게 정치적 영향을 준 책들 가운데는 ‘메리디스 타운센드(Meridith Townsend)’의 『 아시아와 유럽 』 이 있었다.”고 네루는 자서전에 썼다. 19세기 후반 4반세기(1세기의 4분의 1, 그러니까 스물다섯 해 – 옮긴이)에 씌어진 이 글 속에는 ‘아시아적 정신’과 같은 상투적 문구(글귀 – 옮긴이)와 ‘동양(East )’에 관한 개괄 등이 가득 들어 있다.
타운센드는 결코 네루보다 종교적이지 못했다. 그가 말한 ‘아시아적 통일성’은 에드윈 아놀드, 케셥 천더 센, 오카쿠라, 또는 타고르가 말한 문화적/정신적 형태의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백인 유럽과 그 기독교(예수교 – 옮긴이) 문명에 대한 정치/인종/교의적 반감으로 뭉쳐진 것이었다.
타운센드는 “타고난 차이점들” 때문에 유럽이 결코 아시아를 정복하거나 영구히 지배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이 예측은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독립전쟁을 치르고 나서 독립하거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독립함으로써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 옮긴이).
일본이 러시아(로[Ro]시야 – 옮긴이) 차르 체제(로시야 제국 – 옮긴이)에 승리를 거둔 뒤 그가 예견한 아시아의 부활은 군사적/정치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은 마침내 아시아 대륙 모든 곳에서 유럽 지배를 불식시키게 될 것이었다. 인도에서 온 젊은 네루는 특히 타운센드가 자신의 이 유명한 저서 제 3판 서문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되풀이(해서 – 옮긴이) 음미(吟味. 사물 또는 개념의 내용이나 속뜻을 깊이 새기어 느끼거나 생각함 – 옮긴이)했다.
그 문제를 한번이라도 따져본 사람이라면 유럽적 의례가 있듯이 아시아적 의례도 있다는 점과, 아시아는 의당 아시아인들의 것이며 그런 권리를 실현케 해주는 어떤 사태도 모든 아시아인들을 기쁘게 해줄 것이란 점을 의심할 수 없다.
네루가 평생 다른 아시아 국가들(나라들 – 옮긴이), 특히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과의 정치적 연대를 추구한 것은 타고르가 소망한(바란 – 옮긴이) 동양(아시아 – 옮긴이) 문명 부활의 세속적/정치적 연장으로 보이는 그의 문화적 접촉 추구와 매우 근접해 있다.
네루는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1927년 브뤼셀에서 조직한 반제(‘반제국주의’, 그러니까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을 줄인 말 – 옮긴이)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Imperialism)에서 중국 정치 지도자들을 처음 만났다. 네루는 인도 대표단장으로서 크게 환대 받았으며 중국 대표단과 함께 중 – 인 양국간의(두 나라 사이에 – 옮긴이) 고대 문화 교류를 상기(想起. 지난 일을 다시 생각하여 냄 – 옮긴이)하는 결의를 초안, 발표했으며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양국의 협력을 촉구했다.
1930년대 타고르와의 대화는 네루의 중 – 인(‘제하와 바라트’, 그러니까 ‘중국과 인도’를 줄인 말. 이 글은 온 누리에서 반중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쓰인 글이라 제하를 앞에 내세웠다 – 옮긴이) 양국 우호 관계에 대한 애착을 한층 깊게 했다. 네루는 1920년대에 ‘산티니케탄’을 두 번 방문했으며 1934년에는 자신의 딸 인디라를 그곳에 보내 중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는 특히 당시 인도의 정통 영국식 교육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타고르에 빠져 있었다. 타고르가 1937년 중국연구회관(치나 바반)을 출범시켰을 때, 네루는 참석키로 약속했지만 병에 걸려 딸 인디라를 대신 보내 그 계획에 대한 자신의 후원 의지를 담은 메시지를 대독(代讀. ‘[글을] 대신[代] 읽음[讀]’ → 축사나 식사 따위를 대신 읽음 : 옮긴이)하게 했다. 인디라 네루(나중에 인디라 간디로 바뀐다)는 타고르의 지도 아래 순조롭게 성장해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했고, 결국 인도의 첫 여성 총리가 됐다.
네루는 1939년(제2차 세계대전 때 – 옮긴이) 여름에 중국(당시에는 ‘중화민국’ - 옮긴이)을 방문함으로써 타고르의(그리고 M.N. 로이의) 발자취를 뒤따랐다. 타고르는 배를 타고 갔고, 로이는 육로로 갔으며, 네루는 비행기로 날아갔다.
앞선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네루는 임무를 띠고 갔다. 인도 국민회의는 일본(근대 왜국[倭國] - 옮긴이)의 정복 야욕을 꺾기 위해 싸우는 중국 정부(국민당이 세운 중화민국 – 옮긴이)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1938년(중일전쟁 때 – 옮긴이)에 국민회의는 중국군을 돕기 위해 의료 지원단을 보냈다. 네루의 방문은 그에 이은 두 번째 연대 표시였으며, 그것은 국민당 정부의 초청을 받아들여 이뤄졌다. 중국 전시 수도 충칭(중경)으로 날아가기 위해 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 - 옮긴이)를 떠나기 전 네루는 타고르를 찾아갔고, 당시 78세의 연로한(年老한. 나이[年]가 들어서 늙은[老] – 옮긴이) 시인 타고르는 이 과감한 국민회의 지도자에게 ‘따뜻한 축복’을 내려주었다.
네루가 중국을 향해 출발할 당시의 기분 ― 그의 낭만적 노스텔지어(그리움/향수 – 옮긴이), 당시의 고충(그의 국민회의의 리더십 경쟁자요 벵골의 투사 ‘수바스 보제’가 간디와의 막판 접전까지 벌인 끝에 패배한 직후였다)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심지어 출발 직전에 보여준 망설임 ― 은 15년 전 중국 여행 직전 타고르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던 것과 유사한(비슷한 – 옮긴이) 심정을 상기시킨다. “나는 가기로 마음먹었다.”고 네루는 2주간의 중국 방문을 마친 뒤 썼다.
“망설였지만 사랑과 동지적 손길들이 중국에서 나를 오라고 손짓했고, 먼 옛 기억들도 내가 가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의 장기적 전망이 내 앞에 떠올랐고, 인도와 중국의 고통과 승리, 그리고 오늘의 고난은 ‘아랍인들처럼 천막을 접고 조용히 사라졌다.’ 현재는 흘러가 미래와 합류할 것이며, 인도는 살아남을 것이고 중국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자신들의 복리를 위해, 세계의 복리를 위해 힘을 합쳐 일해나갈 것이다.”
타고르가 1941년 80세의 나이로 타계(他界. ‘다른[他] 세계[界]’ → 사람, 특히 귀한 사람의 죽음 : 옮긴이)하자, 네루는 감옥에서 그를 기리는 헌사를 쓰면서 다시 한번 중국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많은 큰 인물들을 만났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두 인물은 간디와 타고르였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인도가 지금의 처지에도 불구하고(또는 그렇기 때문에) 한 세대 동안 이 두 위대한 인물을 낳았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에게 인도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확신을 주고 희망으로 가득 차게 한다. 지금의 사소한 고난이나 분쟁들은 이 경이로운 사실 –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라는 이념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사실 앞에서 매우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으로 비치게 한다. 중국도 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감명을 주었다. 인도와 중국, 어떻게 그들이 멸망할 수 있겠는가.
인도의 독립 전망이 점차 구체화함에 따라 이미 인도 국민회의 외교 부문 대변인으로 인정받고 있던 네루는 아시아 국가들의 블록 창설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40년 8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바라트 사람들 – 옮긴이)는 우리 이웃들인 중국(제하. 정확히는 중화민국 – 옮긴이), 버마(미얀마), 실론(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이란)와 하나의 동맹 관계 속에서 긴밀히 협력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할(甘受할. 달게[甘] 받아들일[受] - 옮긴이) 각오가 돼 있습니다. 우리는 영국 육군과 해군의 이른바 ‘보호’를 원치(바라지 – 옮긴이) 않습니다. 우리 일은 우리가 꾸려나갈 것입니다.”
1947년 3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불과(겨우 – 옮긴이) 5개월(다섯 달 – 옮긴이) 앞두고, 네루는 델리에서 아시아 관계 회의(The Asian Relations Conference)를 열었다. 참가 대표들에게 행한 그의 영어 개막 연설은 타고르의 글보다 더 많은 관용 어구들을 사용해 아시아의 단결과 위대성을 고취(鼓吹. ‘북을 치고[鼓] 피리를 붊[吹]’ → 힘을 내도록 격려해서 용기를 북돋움 : 옮긴이)하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연설은 “오랫동안의 침묵 끝에 아시아는 돌연 세계사에서 중요한 존재로 다시 등장했습니다(나타났습니다 – 옮긴이).”는 말로 시작됐다. ‘이 역동적인 아시아’, ‘강력한 대륙’을 찬미하면서 네루는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들을 통합하기 위한 인도의 특별한 주장에 대해 언급했다.
인도가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도로 하더라도, 인도는 아시아의 수많은 세력들의 자연스런 중심이며 초점입니다. 지리는 일종의 강제적 요소로, 인도는 지리적으로 서부와 북부, 동부, 그리고 동남부 아시아가 만나는 접점에 위치하고(자리하고 – 옮긴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의 역사는 그 이웃 아시아 나라들과의 오랜 관계의 역사입니다. 문화의 물줄기가 서부와 동부에서 흘러와 인도로 흡수됐습니다. [……] 동시에 문화의 물줄기는 인도에서 아시아 먼 지역으로 흘러나갔습니다. 여러분이 인도를 알고 싶다면 여러분은 아프가니스탄과 서부아시아(정확히는, 이란 – 옮긴이),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에 가봐야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수많은 민족들에게로 흘러들어가 영향을 끼친 인도 문화의 활력을 보여주는 장엄한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에 찬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부활하고 단결된 아시아의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네루의 연설 끝맺음 속에서 마치 타고르의 말을 듣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원자 무기(원자폭탄 – 옮긴이) 시대에 아시아는 평화를 유지하는 효과적인 역할(구실 – 옮긴이)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아시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평화는 이룩될 수 없습니다. [ …… ] 아시아의 영혼과 사고는 온통 평화로운 것이며 아시아의 세계 무대 등장은 세계 평화를 위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인도 중심의 아시아 국가 관계 설정을 꿈꾼 네루의 소망이 겪은 부침을 열거(列擧. 여러 가지 예나 사실을 낱낱이 들어 말함. → 늘어놓음 : 옮긴이)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네루 소망의 성패를 가른 핵심은 인도의 가장 가깝고도 강력한 두 이웃인 중국 및 파키스탄과의 우호 협력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1964년 5월 네루가 17년간 총리와 외무장관을 역임한 뒤 타계했을 때, 이들 두 강력한 이웃은 반(反)인도 협정을 맺었고, 네루의 아시아 정책은 무너졌다.
독립된 인도와 파키스탄이 1947년 분리 건국한 뒤 왜 그처럼 나쁜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문제는 독립 전 수십(몇십 – 옮긴이) 년간(해 동안 – 옮긴이) 뒤엉킨 힌두 – 모슬렘 정치사 전체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이 특수하게 얽힌 역사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분석해 낼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가장 적절한 관점은 지적인 측면, 특히 20세기 힌두 – 모슬렘 지식인들이 인도, 동양, 그리고 서구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들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다. 다양한 지역적 배경과 종교적/세속적으로 다양한 신념을 지닌 힌두 지식인들이 품고 있던 이들 생각은 이제 충분히 설명했다.
인도 아대륙(亞大陸. ‘대륙[大陸]에 버금가는[亞] 땅’ → 대륙으로 보기에는 작지만, 섬으로 분류하기엔 큰 땅. 대륙에서 작은 부분이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 옮긴이)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다른 말로는, ‘무슬림’ - 옮긴이)가 각각 지배적인 지역으로 분리 독립시키는 데 성공한 인도 이슬람 교도 지식인들의 관점은 그들의 이념적 영웅인 펀자브의 ‘무하마드 이크발’ 경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표출됐다.
- 이상 『 동아시아, 문제와 시각 』(정문길/최원식/백영서/전형준 엮음, ‘(주)문학과지성사’ 펴냄, 서기 1995년)에서 뽑음('발췌')
- 단기 4357년 음력 11월 11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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