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양주동(梁柱東, 서기 1903년 ~ 1977년) 박사는 생전에 『 삼국사기 』 「 신라본기 」 < 유리 이사금 > 조에 나오는 ‘가배(嘉俳)’라는 낱말의 뜻을 풀이한 적이 있다.
양 박사는 한가위의 옛말인 “‘한가배’는 ‘한가봇’, 즉 ‘절반’의 뜻”이라 풀이했는데, “팔월 보름이 일년의 절반에 해당되는 까닭에 이렇게 불렀으리라는 것이다(이영희 교수).”
그리고 “다른 설에 따르면 나라 안 여자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길쌈 경기를 시켰다 해서 ‘절반’의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이영희 교수).”
나는 양 박사의 모든 학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봇’이 ‘절반(折半)’을 뜻하는 낱말이라는 그의 학설에는 적극 동의하며, 비록 그가 한가위를 ‘가배’로 부른 까닭은 제대로 맞추지 못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가 옛 배달말이자 순수한 배달말이고, 고대어/중세어이기도 한 낱말을 다루었다는 사실은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가배’가 ‘가봇’이고 그것이 ‘절반’이라는 뜻이라는 양 박사의 학설에 찬성하는가? < 유리 이사금 >조에 가배가 유리 이사금이 서나벌(徐那伐)의 6부(部)를 둘로 나누어 길쌈 경기를 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 나라를 둘로 나누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절반’씩, 그러니까 ‘반(半)’씩 나누었다는 뜻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반씩 나뉘어서 길쌈을 하고, 누가 옷감을 더 많이 짰는지 겨루는 대회, 이것에 ‘절반’을 뜻하는 고대어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그러니까, ‘가배’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은 양 박사가 아니라 “나라 안 여자들을 절반으로 나누어 길쌈 경기를 시켰다 해서 ‘절반’의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고 주장한 사람이 제대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가배’는 ‘반(半)/절반’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이자, 옛 배달말이고, 고대어이자 중세어인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적으면, 여러분은 “그렇다 하더라도 의문은 남네요. ‘가배’가 아니라 왜 ‘가봇’이 ‘절반’이라는 뜻이죠?”하고 물으리라. 당연하다. 나도 그 의문을 풀지 못해서 오랫동안 이 글을 쓰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발음의 변화를 다룬 법칙과 또 다른 순수한 배달말 낱말이 그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 보자.
옛 문헌 자료와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배달말은 ‘ㅇ’ 발음을 ‘ㅂ’ 발음으로 대체하거나 그 반대로 ‘ㅂ’ 발음을 ‘ㅇ’ 발음으로 대체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가 ‘서울’이라 부르는 도시는 수 세기 전에는 ‘셔블’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블’이 세월이 흐르면서 ‘울’로 발음이 바뀐 것이다.
일단 이 사실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이번에는 배달말 낱말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자. 한국인을 비롯한 배달민족은 ‘중앙(中央)’이나 ‘복판’이나 ‘중심’이나 ‘~중(中)[예 : “그중에 가장 쉬운 것”]’을 순수한 배달말인 ‘가운데’로 부른다. 그러니까, ‘중앙’이나 ‘중’이나 ‘중심’은 순수한 배달말로는 ‘가운데’인 것이다. 이 낱말은 오늘날에도 쓰인다.
그런데 왜 배달민족은 ‘중앙’/‘중’을 ‘가운데’로 부를까? 그것을 알려면, 일단 이 낱말을 뜯어볼 필요가 있다. 일단 ‘데’는 ‘곳/장소’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운데’는 ‘가운 + 곳’이라는 뜻으로 분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운’은? 여기서부터 아까 살펴보았던 발음의 변화와 ‘가배’의 뜻이 중요해진다. 오늘날 ‘가운’으로 부르는 말이 수 세기 전까지만 해도 원래 발음이 ‘가분’이었다면(실제로, 경상남도의 노인들은 ‘가운데’를 ‘가분데’에 가깝게 발음한다. ㅇ 발음을 ㅂ 발음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가운데’는 ‘가분 + 데’가 된다. 그리고 옛말에는 ‘ㅗ’ 발음과 ‘ㅜ’ 발음이 혼동되어서 쓰였으므로(예 : “~했소”를 “~했<수>”로 말하는 것), ‘가분’은 원형이 ‘가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본’이라는, 추정 복원한 말이 양 박사가 말한 ‘가봇’과 꽤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본’의 ‘ㄴ’은 ‘~인’/‘~한’의 받침이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본’은 ‘가봇인’이 줄어들어서 만들어진 말이 된다. 따라서 ‘가운데’는
‘가봇인 데’ → ‘가봇인 곳’ → ‘절반인 장소’
라는 뜻이 된다. 이 풀이가 설득력이 있는지 알아보려면, ‘가운데’라는 말의 뜻을 파헤쳐야 하는데, 이 부분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한 종이의 중앙에 점을 찍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점에서 종이의 끝까지 가는 직선 거리는 종이 변의 ‘절반’이 된다. 그리고 그 거리와는 반대쪽으로 종이의 다른 끝까지 가는 직선 거리도 또한 종이 변의 ‘절반’이 된다. 그 점은 왼편과 오른편에서 보았을 때, 각각 종이의 ‘절반인 곳’에 자리한 점이 되는 것이다. 그 ‘절반인 곳’이 바로 ‘가봇인 데’, 그러니까 ‘가운데’이며, 따라서 ‘절반’/‘반’은 순수한 배달말이자 옛 배달말로 ‘가봇’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봇’이 ‘절반/반’임은 ‘가배’뿐 아니라 ‘가운데’라는 낱말과 그 낱말의 발음이 바뀐 과정에 대한 고찰로도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라는 이야기고, 따라서 나는 ‘가봇’이 ‘절반/반’을 뜻하는 우리 옛말이라는 양 박사의 학설에 동감하게 되었다.
‘가봇’이 기록에는 ‘가배’로 나타나는 까닭은, 원래 발음은 ‘가봇’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봇’과 발음이 완전히 같은 한자는 없기 때문에 한자(정확히는 ‘이두’나 가차[假借 : 뜻이 다르나 소리는 같은 한자를 빌려서 발음이나 말을 적는 방법])로 쓸 때 ‘배(俳)’나 ‘배(排)’자를 골라서 썼고, 그래서 ‘가배’라는 발음이 굳어졌다는 가설을 덧붙인다(이는 제하[諸夏 : 수도 북경(北京)]에서 ‘컬러’로 발음하는 ‘콜라[cola]’라는 영어 낱말을 한자의 한 갈래인 간체자로 적을 때, 발음을 정확하게 적지 못해서 ‘가락[可樂]’이라고 쓰고 ‘커러’로 읽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정확한 발음은 ‘가봇’이고, ‘가배’는 한자의 한계 때문에 비뚤어진 발음이라는 이야기다.
오환족의 한 갈래로 보이는 박(朴)씨족이 세운 나라인 서나벌을 다룬 기록에 이 말(가봇/가배)이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말은 원래 오환 말로 보이며, 박씨족이 코리아(Corea) 반도로 내려와 뿌리내리면서 – 그리고 신라가 서기 7세기 중반에 마지막 승자가 되어 코리아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손에 넣음으로써 – 코리아 반도 곳곳으로 퍼져 명절의 이름이 되고 배달말 낱말이 되었음이 분명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글을 맺는다.
- 단기 4357년 음력 11월 29일에, ‘우리 한국인들은 좀 더 많은 배달말 낱말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야 하며, 나아가 그것을 다시 쓰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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