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말

‘항구’를 뜻하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

개마두리 2024. 12. 29. 19:51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묻자. 오늘날 (한국인을 비롯한) 배달민족은 바닷가에 있는, 배가 드나드는 곳항구(港口)’로 부른다. 그렇다면 고대나 중세에 살았던 배달민족의 조상들도 항구라는 말을 썼을까? 그렇지는 않다.

 

근대 이전에는 도시()’ 대신에 ()’라는 말을 썼고, ‘백과사전대신에 유서(類書)’라는 말을 쓴 것처럼, 고대나 중세에는 항구라는 말 대신에 다른 낱말을 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항구는 한자말이고, 배달민족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한자말 보다는 순수한 배달말로 된 낱말/표현을 많이 썼기 때문에(예를 들면, 한국인들이 한 세대 전인 서른 해 전에는 넓을 광[]’자가 들어간 한자말인 광어[廣魚]’ 대신에 순수한 배달말 낱말인 넙치를 많이 썼던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수 세대 전에는 감기대신 고뿔이라는 순수한 배달말을 써서, “남의 염병이 내 고뿔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을 만들어낸 사실도 이를 입증하는 예로 들 수 있다) 한자를 잘 안 쓰거나 잘 알지 못했을 대부분의 배달민족은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고대 ~ 중세의 배달민족은 항구를 뜻하는 말로 무엇을 썼을까? 그것을 알려주는 단서가 하나 있다. 바로 이영희(李寧熙)’ 교수의 책에 실린 글이다. 그 글을 일부 인용할 테니 한번 읽어 보시라.

 

포항시의 고대 지명은 근오기(斤烏支)’. 북위 36도인 영일만 근오기에서 똑바로 동쪽으로 가면 일본의 오키(隱岐[은기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おき)’ 섬에 이른다. 이 섬의 위치 역시 북위 36도다. 여기서 곧바로 남하하면 일본 고대 부족 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이즈모(出雲[출운 옮긴이])’ 국으로 가 닿는다. 이즈모 역시 이름만 무쇠의 산지였다.”

 

- 이영희, 노래하는 역사 , 109

 

“‘근오기오기’, 크게 오가는 항구라는 뜻이다.”

 

- 이영희, 같은 책, 110

 

이 글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다면, 고증을 철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우선 포항이 어떤 곳인지부터 간단하게 살펴보자. 포항은 경상북도 바닷가에 있는, 영일만을 낀 항구다. 그렇다면 예부터 항구였을 테고, 그 도시의 옛 이름도 항구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포항의 옛 이름은 근오기. 여기서 고대나 중세에는 된소리가 거의 없었다는 학설대로라면 오늘날의 과 같은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다. 여기까지는 나와 이 교수의 생각이 거의 같다(다른 점이 있다면, 이 교수는 크게로 풀이하나, 나는 그것을 으로 풀이한다는 것 뿐이다).

 

문제는 오기인데, 오기가 무슨 뜻일까? 이 교수는 오가는 항구라는 뜻이라고 풀이했으나, 나는 그 풀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기오가는이 따로 붙지 않은 항구라는 말 그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기항구라는 뜻을 지닌 고대(또는 중세)의 배달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의문이 생긴다. 옛 사람들은 왜 항구오기로 불렀을까? 그것을 알려면, 먼저 다른 석학(碩學. 학식이 많고 학문이 깊은 사람)의 설명을 빌려야 한다. ‘손성태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3천 개 이상 되지만, 우리말처럼 의성어와 의태어가 발달한 언어는 없다. 유독 우리말에 의성어나 의태어가 많은 것은 고대 우리 선조들의 말이 아직 발달하지 못하여 주변의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부족하여(모자라서 옮긴이), 동물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표현하거나 사물의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하여 그것을 가리키는 명사 대신에 사용했기(썼기 옮긴이) 때문이다. 이는 우리민족(배달민족 옮긴이)의 중요한 언어 습관이자 특성이기도 하다.”

 

- 손성태, 우리민족의 대이동 , 249

 

그러니까 원래는 명사가 아니라 의성어나 의태어였던 말들이, 나중에는 명사처럼 쓰였고, 이는 배달말의 특성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는 동사였거나 복합어였던 말들도 나중에는 명사가 되어 쓰이게 되었고, ‘오기도 그런 말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그런가? 그것을 알려면 항구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교수와 손 교수의 설명을 머리에 담은 채, 이제 항구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자.

 

항구는 바닷가에 자리 잡은 곳이다. 그리고 배가 들어오는 곳이자, 동시에 머무르던 배가 다른 곳으로 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배뿐 아니라, 배가 싣고 온 사람과 물자도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다. 그러니까, 항구는 배/사람/물자가 오고 가는 곳인 것이다. 오고 가는 곳오가는 곳으로 줄일 수 있고, 또는 ‘(안으로) 오고, (밖으로) 간다.’는 말의 명사형인 오고 가기’/‘오가기로 줄일 수도 있다. 오가기를 조금 더 줄여보면, ‘오기라는 낱말이 나온다. 이는 열고 닫는 문여닫이로 줄여서 부르는 것과 같다. ‘온다간다라는 두 동사가 합쳐져 명사형인 말이 되었고, 그것이 나중에는 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오기항구라는 뜻을 지닌 순수한 배달말이자 옛 배달말이며, 포항의 위치로 볼 때, ‘오기는 진한어()나 신라어(해상신라를 세운 석[]씨족의 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덧붙인다.

 

만약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인인 당신에게 한국에는 한자말이 많던데, 그런 말이 아니라 중화권한족(漢族)’들에게서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순수한 한국어는 있느냐? 하다못해, 예전에 쓰인 말이라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있다.”고 대답하시라. 그 사람이 그런 말로는 어떤 게 있느냐?”고 다시 한 번 묻는다면, 그땐 “‘오기라는 말이 있다. 그건 옛 한국어로 항구라는 뜻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자와 관계없는 순수한 한국어도 많이 썼다.”고 말하라.

 

덧붙이는 글 :

 

여기까지 글을 쓰다 보니, 의문이 떠오른다. 포항 뿐 아니라 다른 항구 예를 들면, 목포나 인천이나 부산이나 흥남이나 천진도 오기로 불렸을까? 오기는 진한어나 신라어뿐 아니라, 다른 언어(예를 들면, 가야어/마한어/백제어/변한어/남부여어)에서도 쓰인 낱말이었을까?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했지, 언어학을 전공하진 않았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설명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이 부분은 영 자신이 없으니, 옛말을 연구해서 따로 글을 쓰던가, 아니면 후학 또는 다른 역사학도에게 연구를 부탁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그 부분은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빈다.

 

참고 자료

 

― 『 중학교 사회과 부도 ( ‘류재명/장준현/정선/백경미/김복남지음, ‘()천재교과서펴냄, 서기 2013)

 

― 『 노래하는 역사 ( 작은 제목 이영희의 한/일 고대사 이야기 Ⅰ 」. ‘이영희지음, ‘조선일보사펴냄, 서기 2001)

 

― 『 우리민족의 대이동 ( 작은 제목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 : 멕시코 편 . ‘손성태지음, ‘코리펴냄, 서기 2014)

 

- 단기 4357년 음력 1129일에, ‘우리 한국인들은 좀 더 많은 배달말 낱말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야 하며, 나아가 그것을 다시 쓰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