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우리는 고려인 강제이주를 기억해야 합니다

개마두리 2005. 12. 30. 22:17

방금 전, 한국방송(KBS)의 뉴스에서 우연히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고려인(재러동포)들이 "이제는 더 이상 '강제이주'라는 말을 안 쓰겠다."고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그들(고려인) 가운데 나이 많은 사람들(그러니까 강제이주를 직접 겪은 사람들)은 '어두운 옛 기억'을 끄집어내기 싫어서 일부러 아무 말도 안 하고, 새 세대는 "이제는 어두운 과거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미래'로 나가야 한다. 다른 민족들과 조화롭게 살아야 할 것 아니냐?"면서 '강제이주'라는 말을 내다 버리기로 했다는 겁니다(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러시아어만[!]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한 몫 했다네요).


저는 그들에게 단 세 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제 정신입니까? 진심이예요? 그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라고요!!


서기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끌고 가라고 명령해서 소련 군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잘 살고 있던 고려인들 집에 들이닥쳐 총구를 들이대고 그들을 기차로 몰아넣은 일이 '강제'로 이루어진 '이주'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요? '합법적이고 자발적인 여행'?


'강제이주'라는 말을 안 쓴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달라집니까? 그들은 상처를 감추고 수술을 안 하면 (당장은 안 아프니까) 괜찮을 줄 알고 이러는 모양인데, 이건 회피일 뿐이예요! 세상에 어느 공동체가 자신의 역사를 숨깁니까? 미국 흑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납치당해 끌려온 사실을 - 부끄럽다고 - 안 가르치나요?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걸 인정하면서 WASP(앵글로색슨계인 미국 백인)들에게 반성을 요구하고 자신들의 도덕적인 우월성을 강조한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마찬가지로 고려인은 강제이주라는 '사실' 자체를 숨기지 말고 드러내야 하며, 이를 근거로 러시아 백인과 러시아 정부에게 "더 이상은 이런 일이 안 일어나게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살게 된 건 다 당신들의 책임이다."라고 이야기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잊어버리려고만 하고, 왜 묻어버리려고만 합니까? 피해자라면 더 떳떳해야 하지 않나요? 그들은 강제이주가 카자흐인의 소행이 아닌 이상, 러시아에서 독립한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을 이야기 할 때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건 생각도 안 하는 모양이군요. 언제부터 이렇게 비굴해졌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되니 한 마디만 더 합시다. 강제 이주는 - 우리말을 모르는 고려인들을 위해 - 러시아 말로 옮겨진 자료를 만들어서라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걸 잊어버리면 똑같은 일(재산을 빼앗기고 먼 곳으로 끌려가 낯선 곳에 내팽겨쳐지는 일)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기억해야 "미래"에 같은 일이 안 일어나게 막을 수 있습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면 미래가 행복할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십시오. 이상입니다.


- 동포들에게 실망한 역사학도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