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역사가 잊어버린 억울한 선구자들

개마두리 2011. 12. 12. 18:06

 

1. 우리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을 맨 처음 통과한 뱃사람이 포르투갈 사람인 바르톨로메오 디아스라고 배웠다. 그러나 그보다도 2088년 전에 아프리카 바닷가를 한바퀴 빙 돌고 온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오늘날의 레바논에 살고 있던 페니키아 사람들이다.

 

“기원전 600년경, 이집트의 파라오 네초(Necho. 다른 자료에는 ‘네코’라는 이름으로 나옴 - 옮긴이) 2세가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사막에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는 대신(이 생각은 서기 185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설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수에즈 운하는 수천 km의 뱃길을 줄여 주었다), 이집트의 동쪽 해안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를 한 바퀴 빙 돌아 북쪽으로 항해하기로 했다.

 

생각이야 나무랄 데 없었지만, 당시에 그는 아프리카가 얼마나 큰지조차 몰랐다! 물론 그는 나랏일을 핑계삼아 직접 나서지도 않았다. 대신에, 돈을 주고 페니키아 선원들과 그들의 배를 샀다. 그래서 여행이 시작되었다.

 

페니키아 선원들은 자그마치 1년을 항해한 뒤에야 아프리카 남단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서쪽 해안을 따라 위로 올라오는 데 다시 1년이 걸렸다(총 25, 000㎞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들의 성공을 믿어 주지 않았다!”

 

― 애니타 개너리의 책인『바다가 바글바글(원제 Odious oceans)』에서

 

(참고로 말하자면 이 글 아래에는 네코 2세가 수엽이 텁수룩하게 자란 페니키아인 선원 두 명에게 “2년 동안 엽서 한 장 안 보냈다는 게 말이 돼?”라고 말하는 삽화가 나온다. 아마 페니키아인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쳇, 괜히 갔다 왔네!’라고 투덜거렸겠지! - 옮긴이)

 

2. 우리는 19세기 말 미국의 발명가인 ‘알렉산더 그라함 벨’이 전화를 최초로 발명했다고 배웠다. 그러나 아래에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그는 - 전화를 만든 사람이기는 하지만 - ‘최초의 발명자’가 아님이 확실하다.

 

------------------------------------------------------------------------------------------------

 

연합뉴스 2003.6.3(화) AM 11:09 뉴스검색 검색 | 상세검색

 

<최초 전화발명가는 이탈리아인>

 

(서울=연합뉴스)

 

이탈리아가 전화 발명가로 알려진 벨보다 먼저 전화기를 발명 한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메우치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고 기념식을 개최했다고 BBC 인터넷판이 2일 보도했다.

 

오늘날 전화를 사용하는 이탈리아인들중 전화 발명가의 이름을 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안토니오 메우치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1835년 고향 피렌체를 떠나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몇년간 쿠바에서 일한 뒤 1850년 뉴욕에 도착해 이탈리아를 통일한 가리발디 장군의 친구가 됐다.

 

메우치는 이후 평생을 빈곤속에서 살다가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메우치는 일터에서 병상에 누워지내는 아내와 통화하기 위해 `텔렉트로폰'이라고 명명한 기구를 발명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1871년 특허를 냈지만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해 상용화하는데 실패했다.

 

5년뒤 스코틀랜드 출생의 미국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현재 우리가 전화기로 알고 있는 기구를 특허 출원하는데 성공했다.

 

로마에서 열린 전화발명 축하행사에 참석한 매사추세츠통신연구소의 과학자 니 컬러스 네그로폰티는 발명품을 통해 돈을 버는데 실패한 것은 메우치만이 아니라고 회상했다.

 

그는 "벨의 가족들중 누구도 돈을 벌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벨의 후손들중 부자 는 없었다"면서 벨도 역시 빈민으로 생을 마쳤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탈리아는 최근 메우치를 전화 발명가로 공식 인정하는 것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으며 카를로 참피 이탈리아 대통령은 통신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전화와 라디오가 모두 이탈리아인에 의해 발명됐다고 치하했다.

 

hoonkim@yna.co.kr

 

------------------------------------------------------------------------------------------------

 

그래도 벨은 역사서에 이름이라도 실렸지, 메우치 아저씨는 그러지도 못했지 않은가? 정말이지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 우리는 서기 16세기 초 유럽인이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 아메리카로 끌고 가면서부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교류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임스 W. 로웬 교수가 모은 자료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즈텍이 세워지기 이전에도 유럽계/아프리카계와 만났고, 서기 1311년경부터 서기 1460년경까지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제국(帝國)들과 아이티, 파나마, 브라질의 원주민들이 배를 타고 교역했으리라고 하니, 이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책을 읽어보자.

 

"멕시코의 다른 지역에서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 옮긴이)들은 코카소이드계(코카소이드. 유럽계 - 옮긴이)와 니그로계(니그로이드. 아프리카인 - 옮긴이) 얼굴인 듯 보이는 사람의 작은 도기조각과 돌조각을 만들었다. 많은 테라코타(소조. 점토로 빚은 것을 불로 구운 조각 - 옮긴이) 조각상을 수집한 알렉산더 본 워세노는 ‘인디언들이 흑인이나 백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어떤 인종적 특징도 놓치지 않고 흑인과 백인의 얼굴을 완벽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모든 기초적 논리나 예술적인 경험과는 모순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짓말』(평민사 펴냄)에서

 

“컬럼버스 이전에 아메리카를 탐험한 사람들의 목록을 적어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토론을 전개시키기 좋은 흥미있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 컬럼버스가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 아라와크족(아이티의 원주민. 쿠바와 아이티 섬에 살고 있었다 - 옮긴이)이 끝에 ‘구아닌’을 바른 창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인디언들은 이것을 남부와 동부의 흑인 교역상에게서 얻었다고 했는데, 구아닌은 금, 은, 동의 합금으로 서부 아프리카인들이 “구아닌”이라 부르며 선호하는 금(金) 합금과 같은 것이다.

 

이슬람 국가의 역사가들은, ‘만사 바카리 2세(Mansa Bakari Ⅱ)의 통치 기간 중 서기 1311년경, 서부 아프리카의 말리 왕국으로부터 서쪽으로 항해한 탐험을 기록해왔다. 14세기와 15세기에 때때로 좌초된(가라앉은) 아프리카 선박이 - 아마도 대서양 횡단 교역의 잔재물들이리라 - 카포베르데 제도(아프리카 서쪽의 군도 - 옮긴이)로 흘러 들어왔다. 서부 아프리카와 접촉했을 때 아프리카 교역상이 서기 1440년대 중반에 브라질을 방문했던 사실을 듣고 알게 되었던 포르투갈인들은 토르데실라 조약에서 교황의 “경계선(교황이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이 차지할 수 있는 식민지를 정한 경계선 - 옮긴이)”을 더 서쪽으로 옮기도록 주장하였다.

(게다가 - 옮긴이)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생한 질병의 흔적이 브라질에서 발견되는 컬럼버스(콜롬버스 - 옮긴이) 이전의 시체에서 나타나고, 세 번째 여행에서 선장을 수반했던 컬럼버스의 아들 페르디난드는 동부 온두라스(중앙 아메리카의 동북부 지역 - 옮긴이)에서 만났거나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피부색이 검거나, 여러 면에서 못생겼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프리카인이라 추정된다.

 

파나마에 도착한 첫 번째 유럽인은 - 발보아와 그의 회사 - 인디언 마을에서 흑인노예를 봤다고 보고하고, 인디언들은 이들을 가까운 흑인 공동체에서 포획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계 멕시코인들의 구전역사는 콜럼버스 이전에 서부 아프리카로부터의 횡단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는데, 이것뿐 아니라 다양한 자료에서 추출한 데이터를 보면, 컬럼버스 이전에도 서부 아프리카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항해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 위와 같음

 

그러니 이제 ‘콜럼버스가 최초로 신대륙을 발견했다.’거나, ‘아메리카에 온 최초의 아프리카인은 노예였다.’는 말은 그만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