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섬과 나무의 역사

개마두리 2011. 12. 13. 18:53

 

1. 제주도는 원래 나무가 많은 섬이었다(삼을라가 한라산 중턱이 아닌 ‘제주시 이도 1동 - 바다와 가깝다 - ’의 삼성혈에서 나타난 까닭도, 울창한 숲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 13세기에 몽고군(나는 12~14세기의 몽골인은 ‘몽고蒙古인’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몽골인은 ‘몽골Mongol인’으로 부른다)이 쳐들어와 삼별초를 깨뜨린 뒤, 숲을 불태우고 목마장(牧馬場. 말을 기르는 목장)을 만든 다음부터는 ‘풀밭(:초원)이 많은 섬’으로 바뀌었다.

 

서기 1276년(충렬왕 2년)에 들어온 “몽고말 160여 마리와 소, 나귀, 양, 낙타(‘양’과 ‘낙타’는 원나라가 제주도에서 물러난 뒤 사라진 듯하다)”는 제주도의 식물을 ‘열심히, 부지런히’ 먹어치웠고, 목장은 원나라가 제주도에서 물러난 뒤에도 꾸준히 늘어났다(조선 왕실이 처음에는 말 온[100] 마리를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4~500마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섬은 강우량이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지방과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그 물을 가두지 못했고, 빗물은 땅 밑으로 빠져나가 버렸다(이는 열대 강우림의 나무가 사라지면 흙이 금방 빗물에 씻겨 내려가 환경이 빠른 속도로 파괴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러니 ‘뭍’에 사는 사람들이여, 조랑말이 한라산 밑에 있는 탁 트인 풀밭에서 풀을 뜯는 모습을 ‘낭만적인 풍경’으로 여기지 말지어다!

 

2. ‘마오리’족은 유럽계 이민자들이 ‘뉴질랜드’라고 부르는 섬을 ‘아오테아로아(“흰 구름이 길게 드리워진 곳”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이 섬은 서기 1769년 영국인이 건너오기 전까지는 “울창한 삼림”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양을 들여와 키우기로 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그들은 유럽의 양이 이 섬의 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유럽의 풀씨를 들여와 뿌렸는데, 이 풀들은 곧 온 섬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 풀들은 곧 숲그늘이라는 벽에 부딪쳤고, 유럽인들은 그늘을 없애려고 숲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 결과 예전에 울창한 수림을 이루던 곳이 오늘날 드넓은 풀밭이 되었다. 오늘날 양 6천만 마리가 노니는 ‘뉴질랜드’의 풍광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뉴질랜드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은 징그러울 정도로 넓은 풀밭에 양만 가득하다는 것인데, 그 풀밭이 예전에는 빽빽한 숲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골프장 건설 못지 않은 자연 파괴다.

 

3. ‘모아이’라는 석상을 세운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유럽인이 ‘이스터’라고 부르는 섬을 ‘라파 누이(“큰 라파”라는 뜻)’라고 부른다. 그들은 서기 690년 이전(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서기 5세기 경)에 이 섬으로 들어와 평균 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석상들 600여기와, 고유의 글자를 새긴 ‘롱고롱고(rongorongo. “영창詠唱”이라는 뜻)' 목판, 돌로 만든 제단(높다란 벽이 잘 다듬어져 있고 돌들은 모자이크처럼 정밀하게 맞춰져 있음)을 만들었다(석조물들은 하지/동지/춘분/추분에 맞춰진 고도로 복잡한 천문학적 배열을 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라파누이 섬 사람들은 지적 수준이 아주 높았던 듯하며, 또 이런 일을 하려면 사회조직이 발달해야 하므로 라파누이에는 유럽인이 오기 전에 중앙집권국가가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모아이를 세울 때 섬의 통나무를 베어 굴림대로 썼고, 석상을 제대(祭臺)로 갈 때까지 붙들어 매는 썰매도, 석상을 제대에 올릴 때 쓰는 틀도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가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렸으면 좋았으련만 - 그들은 이웃 마을보다 석상을 ‘더 크게, 더 많이, 더 높이’ 만드는 일에만 신경썼지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결과 한 때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20m 이상 자라는 곳이었고, 숲이 우거진 곳이었던 이 섬은 서기 1600년경 나무가 완전히 사라진 곳이 되어버렸고(지금도 숲이 되살아나지 않고 있다), 섬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집 대신 “동굴이나 갈대 오두막”에서 살아야 했으며, 카누를 만들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단거리 항해만 가능한 갈대 보트로 만족해야 했다. 또 숲이 사라지자 땅도 거칠어져서 고구마의 수확량도 줄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내전을 일으켰고, 서기 18세기에는 식인을 일삼고 다른 마을의 석상을 뒤짚어엎는 야만인으로 굴러떨어졌으며, 서기 19세기 초 페루와 미국의 노예상인들이 왔을 때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붙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그들은 망망대해에 뚝 떨어진 섬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웃에게 도와달라고 하거나 다른 섬으로 달아날 수도 없었다.

 

‘지구’라는 또다른 라파누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모아이(그 석상들 안에는 포항제철소와 알자지라 방송국, 그라민 은행, 꾸리찌바시도 들어간다)가 깨져서 땅에 나뒹굴고, 그대들의 후손이 서로 죽고 죽이는 ‘미래’를 바라지 않는다면 모아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라!

 

* 참고 자료

 

―『제주도』(뿌리깊은나무 펴냄, 서기 1992년)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주경철, 문학과지성사, 서기 1999년)

 

―「환경과 역사」(송상용 한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