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풀뿌리 제국주의 일본

개마두리 2012. 9. 3. 08:41

 

일본엔 ‘회한(悔恨) 공동체’라는 말이 있다. 1967년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환산진남)가 만들었다.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 절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낀 지식인들을 가리킨다. 자유주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들의 감정적 유대쯤 된다.

 

이와는 영 다른 ‘회한 공동체’도 있다. 회한의 내용물이 완전 반대다. 왜 우리는 전쟁(2차 대전 - 옮긴이)에 졌나, 왜 우리는 전승국(영국과 미국 - 옮긴이)의 재판을 받아야 했나, 왜 우리는 그토록 피해를 당했나 …… . (그런 회환의 - 옮긴이) 밑바닥엔 ‘다음엔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반발심리가 있다. 이게 일본 우익의 사고방식이다. 요즘 우리에게 핏대 올리는 일본 정치인들은 죄다 이쪽 편이다.

 

그들에겐 침략에 대한 기억이 없다. 19세기 말(더 정확하게는 서기 1877년 - 옮긴이) 그들의 군국주의 선조 때부터 그랬다. 침략과 전쟁을 어쩔 수 없는 상황론으로 몰고 갔다. 육군 대장과 총리를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산현유붕)가 오스트리아 학자 로렌츠 폰 슈타인에게 배워 만든 ‘주권선 - 이익선 논리’가 대표적이다. 주권선은 일본 영토를, 이익선은 주권선의 안전과 직결(直結. 바로 이어짐 - 옮긴이)되어 있는 주변지역, 즉 조선을 가리켰다. 야마가타는 1890년 12월 총리 시정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주권선을 지키는 것만으론 결코 충분치 않고, 반드시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남보다 먼저 조선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킬 때도 침략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만주사변의 공모자인 관동군(關東軍. 옛 일본군을 구성하는 부대 가운데 하나 - 옮긴이) 참모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석원완이)는 “일본의 만몽(滿蒙. 만주[滿洲]와 몽고[蒙古 : 몽골]를 줄인 말 - 옮긴이) 지배는 중국인 자신에게도 행복”이라고 했을 정도다. 당시 군국주의자들의 생각이 대개 그랬다.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인식이었다.

 

하지만 상황론(‘그 때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주장 - 옮긴이) 뒤에 숨기엔 일본인들의 알리바이가 너무 약하다. 일본 대중들 사이엔 20세기 초부터 침략열망이 뚜렷했다. 언론도 대중의 호전성을 부채질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기화로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칭다오(청도 - 옮긴이)를 일본군이 함락시켰을 때의 일이다. 지금의 아사히(朝日. 조일) 신문의 도쿄 본사였던『도쿄아사히신문』은 1914년 11월 8일자에 일본군의 승전보를 전하며 ‘유절쾌절(愉絶快絶)’이라고 썼다. 유쾌해 죽겠다는 뜻이다. 남의 나라 땅을 차지한 걸 두고 미치도록 즐겁다며 ‘광희(狂喜. “미칠 만큼 즐거움” - 옮긴이)’라고도 했다. 또 대부분의 일본 언론이 중국과 국제사회의 반응을 무시한 채 칭다오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당시 일본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만주 침략 이후엔 일본 열도에서 “만주에라도 가 볼까.”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일본에선 먹고살기 힘드니 ‘신대륙’에서 새 터전을 찾아보자는 뜻이다. 실제 대규모 이민이 이뤄졌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궁핍을 벗어나려고, 막연한 이상향을 찾아서 … (원래 야운쿠르[아이누의 정식 호칭] 족이나 길랴크 족의 땅이었던 북해도北海道와 사할린 남부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만주 이민은 서기 1930년대에, 북해도와 사할린 이민은 서기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 옮긴이).

 

그렇게 민초들의 꿈은 침략으로 차지한 남의 나라 땅으로 향했다.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 ‘다니가와 간’은 이를 두고 “한 조각 한 조각이 침략행위”라고 했다.

 

여기에다 우익 선동가들은 미국과 한판 붙자고 부추겼다. 밤의 별을 담은 성조기(星條旗. 미국의 국기 - 옮긴이)와 떠오르는 해를 그린 욱일승천기(해가 떠오르면서 사방에 햇살을 비추는 모습을 담은 깃발.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군의 깃발로 쓰였다 - 옮긴이)가 싸우면 반드시 태양이 암흑을 이긴다고 단언한 사람(오카와 슈메이)도 있었다. 황당한 선동이었지만, 대중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런 선동과 여론, 그리고 개인사들이 쌓이고 쌓여 ‘풀뿌리 제국주의’를 이룬 셈이다. 그 집단적 책임은 A급 전범(戰犯. 전쟁범죄자戰爭犯罪者를 줄인 말 - 옮긴이) 몇 명 처단했다고 면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수많은 일본인은 스스로를 전쟁의 피해자로 생각한다. 우익은 이에 편승해 때만 되면 공세적 내셔널리즘(Nationalism. 민족주의 - 옮긴이)을 부추긴다. 반성을 자학(自虐. 자기학대自己虐待를 줄인 말 - 옮긴이)으로 몰아세운다. 100년 전(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22년 전 - 옮긴이)의 군국주의자들과 뭐가 다른가.

 

그렇다고 아주 절망할 필요는 없다. 현대 일본은 의외로 다양하고, 나름 원심력이 작용하는 사회다. 우익의 목소리가 (일본의 - 옮긴이) 언론을 뒤덮지만, 그게 일본의 전부는 아니다. 독도 문제에 관심 없는 사람도 많고, 종군위안부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도 적잖다. 그럼 남은 희망은 하나, 다양성과 원심력을 지키려는 일본인들의 건전한 양식뿐이다. 이를 회복하는 건 그들의 일이고, 옆에서 외치고 촉구하는 건 우리의 일이다.

 

- 남윤호『중앙일보』정치부장의 글

 

-『중앙일보』서기 2012년 9월 3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