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신분증

개마두리 2012. 10. 12. 19:05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오

 

신분증 번호는 5만 번이오

 

아이들은 여덟

 

여름이 가면 아홉째가 나온다오

 

그래서 당신 화난단 말이오?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오

 

채석장에서 땀 흘리는 동무들과 함께 일하오

 

그리고 내 아이들은 여덟 명이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빵 조각을 얻어내오,

 

그리고 옷가지와 공책도

 

바위로부터…

 

그리고 나는 당신의 대문으로부터 자선을 구걸하지 않소

 

또한 비굴하지도 않소

 

당신의 현관 앞에서

 

그래서 당신 화난단 말이오?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요

 

나는 성도 없이 이름뿐인 놈이오

 

나라 안의 모든 것이

 

들끓는 분노 속에서 살고 있는 그런 나라에서

 

참고 참는 사람이오

 

나의 뿌리는 … 내려졌소

 

세월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영겁이 열리기도 전에

 

그리고 측백나무와 올리브나무 보다 먼저

 

… 그리고 풀들이 무성하기도 전에

 

내 아비는 … 쟁기의 가족이오

 

행세하는 양반이 아니오

 

그리고 내 할아버지는 농부였소

 

가문도 … 혈통도 없는!

 

그는 내게 책읽기보다 먼저 태양의 긍지를 가르쳤소

 

그리고 나의 집, 과원(果園)지기의 초막은

 

나무막대와 갈대로 만들어졌소

 

그래 내 처지가 마음에 드오?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요

 

 

 

내 머리 색깔은 … 검은 색이고

 

내 눈 빛깔은 … 커피색이요

 

그리고 내 특징은 :

 

나의 머리에 이깔을 두른 쿠피야가 있소

 

그리고 내 손바닥은 바위처럼 딱딱하오

 

누구든지 닿기만 하면 할퀸다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올리브기름과 자아타르요

 

그리고 나의 주소는 :

 

나는 잊혀진 외딴 마을 사람이오

 

마을의 거리들은 이름도 없소

 

그리고 … 사내들은 모두 … 들판과 채석장에 있소.

 

그래서 화난단 말이오?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요

 

당신은 내 조상의 과원(果園)을 빼앗았소

 

그리고 나와 내 아들들 모두가

 

경작하던 땅도

 

그리고 우리에게는 … 그리고 나의 자손 모두에게는

 

이 돌들밖에 남긴 게 없소 …

 

그런데 그마저

 

듣기로는 …

 

당신들의 정부가 가져간다고!?

 

그렇다면!

 

기록하시오 … 맨 첫머리에

 

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소

 

누구도 약탈하진 않소

 

그러나 나는 … 내가 배고팠다하면

 

나는 나의 것을 빼앗은 자의 살을 먹을 것이오

 

조심하시오 … 조심하시오 … 나의 배고픔을

 

그리고 나의 분노를!!

 

- '마흐무드 다르위쉬' 시인의 시

 

*출처 :『팔레스타인 문학의 이해』(송경숙 지음,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펴냄, 서기 2005년)

 

"시인의 개인적 경험이 소재가 된 이 시는, 1948년 이스라엘(시온주의자들의 괴뢰정권 - 잉걸) 건국 직후에 주변의 아랍 국가들로부터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완전히 격리되어버린 채 이스라엘 내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아랍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다소 정치적 웅변조인 이 시에서 우리는 이 시가 자연스럽게 쓰인 즉흥시임을 감지할 수가 있다. 이 시는 다르위쉬가 성인이 되어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하여 이스라엘 당국에 갔을 때, 시인과 담당 장교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스라엘 장교가 국적을 물었을 때, 시인은 '나는 아랍인이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스라엘인이오.'라는 대답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장교가 시인의 말을 무시하고 재차 물어보자 시인은 '기록하시오, 나는 아랍인이오.'라고 단호히 선언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를 떠난 후 이 구절은 계속 시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고 결국 이 시가 완성되었다."

 

- 송경숙,『팔레스타인 문학의 이해』, 138쪽.

 

* 쿠피야 : ‘조 사코’ 화백의 만화인『팔레스타인』(글논그림밭 펴냄)에는 '케피예'로 나오는 머리수건. 아랍인 남성이 쓰는 머리수건이다. 목도리처럼 두르기도 한다. 검은 무늬가 수놓아진 것과 빨간 무늬가 수놓아진 것이 있다.

 

* 자아타르 : 야생 백리향의 일종.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자라며 그 잎을 말려 빻은 뒤 빵에 묻혀서 먹는다. 시온주의자(시오니스트)들은 약초라는 이유로 아랍인들이 이 풀을 뜯는 것을 막고 있다(이 시를 우리말로 옮긴 송경숙 한국 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어과 교수의 주석).

 

*마흐무드 다르위쉬 :

 

서기 1941년 팔레스타인 출생. 서기 1971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된 고향을 떠나 튀니지, 카이로, 니코시아(키프로스의 수도 - 잉걸), 파리 등지를 떠돌며 창작 및 정치 활동을 했다.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가담해 활동하면서 잦은 감금과 투옥을 당했다.

 

서기 1996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으나, 이스라엘 당국이 고향집으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아,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인 요르단 강 서안의 라말라에서 살고 있다.

 

십대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서기 1960년 첫 시집『날개 없는 새』를 펴낸 이후『올리브 잎새들』,『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낯선 여인의 침대』등 30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했다. 로터스 상, 레닌 평화상, 래넌 재단이 수여하는 문화자유상과 프랑스 정부가 주는 예술문학 훈장을 받았다. 그의 시들은 35개 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으며, 이 시선집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사실, 그의 시는 서기 2007년 이전에도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다. 다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 잉걸).

 

-> 시인의 시집인『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의 표지에 인쇄된 글

 

(마흐무드 다르위쉬 시인은 서기 2008년 8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은 그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 잉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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