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세상 읽기] 분노를 넘어 공감으로

개마두리 2012. 12. 6. 19:26

 

-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의 글

 

- 날짜 : 서기 2012년 12월 5일

 

어떤 중소기업인 모임에서 융합의 방법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 놓여 있는 칸막이가 회사 내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여러분의 회사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몇 주가 지났을까, 강연에 참석했던 한 기업인에게서 항의성 편지를 받았다. “교수님 말씀대로 해봤는데 완전히 역효과입니다.”

 

강연이 너무 인상적이었던지, 그분은 직원들 사이의 칸막이를 아예 없애버리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직원들이 오히려 뻣뻣해지고 심지어는 회사 나오기가 싫어졌다는 말까지 하더란다. 바로 답장을 드렸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너무 나가셨네요. 칸막이를 치우라는 것이 아니라 높이를 적당히 낮추시라는 취지였는데, 소통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비밀도 적당히 보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칸막이 없애기와 높이 낮추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가 소통을 억지로 ‘강제’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소통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다. 아무리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개인 비밀은 보호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 욕구다.

 

칸막이를 어깨 높이 정도로 낮추자는 제안은 개인 비밀 보호와 정보의 공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성공적인 전략일 수 있다. 고개만 들면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칠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공간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칸막이 없애기가 당혹스러운 규칙이라면 칸막이 낮추기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여 자연스럽게 관행을 변화시킨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남성 소변기 아랫부분에 파리 스티커를 부착하여 소변이 튀는 양을 현저히 줄인 사례는 남성의 승부욕을 활용한 효과적인 해결책이었다. “당신이 머문 자리는 아름답습니다”와 같은 멋진 문구들을 아무리 써 붙여 놓아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던 게 남성들 아니었던가!

 

(이하 생략)

 

-『한겨레』서기 2012년 12월 5일자 기사

 

* 옮긴이(잉걸)의 말 :

 

이 글에 나오는 칸막이와 관련된 법칙은 인종과 인종 사이, 지역과 지역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종교와 종교 사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아예 문을 잠그면 숨 막혀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담을 없애고 문과 창문을 모조리 열어젖히면 도둑질과 약탈을 막을 수 없다.

 

결국 결론은 이거다. 반(半)은 닫고 나머지 반(半)은 열어 두라는 것이다. ‘나’를 지키면서 ‘남’의 것을 받아들여야 내가 멸망하지 않고(또는 남을 멸망시키지 않고)함께 살 수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과유불급[過猶不及])는 말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