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위선의 ‘다문화주의’

개마두리 2012. 11. 8. 21:05

- 김형완(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의 글

 

- 날짜 : 2012.04.23

 

-『한겨레』기사

 

- 이주민에게 언어·풍속 가르치는 건 다문화주의 아닌 동화정책

 

고대사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민족은 바이칼호 부근에서 시원한 일군의 종족이 북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한 축을 형성하고, 다른 한편 남아시아의 한 무리가 남중국해를 따라 북진해 중국의 화북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진출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이 서로 뒤섞여 한민족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호란과 왜란 등 한반도 남북으로부터 무수한 외침을 겪으면서 대규모의 이주와 혼혈의 사달이 거듭 벌어졌기 때문에, 한민족의 혈통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마구 뒤섞인 셈이 되었다. 순혈의 단일민족은커녕 온갖 ‘잡탕’식 혼혈의 역사를 거쳐 온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반만년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주의의 환상 속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다. 이 순혈주의가 은연중에 ‘민족적 우월성’으로 둔갑하고, 여기에 난데없는 애국심까지 끼어들면서 ‘정당화’를 넘어 무슨 대단한 자부심으로 표출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착각과 왜곡은 급기야 매우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인종적 배타성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최근 국내 거주 이주민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그 방증이라 하겠다. 우리 안에 인종차별이라는 또 하나의 ‘게토’(ghetto)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다문화주의’를 주창하며 나서고 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여러 정책을 강구하고 있다. 물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선 언어의 질서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다문화주의라는 용어가 개념 없이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문화주의정책이란, 말 그대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여 서로 다른 문화가 한 사회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다. 예컨대 한국으로 온 이주민이 굳이 한국의 언어나 풍속, 관행에 따르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문화주의정책은, 이주민을 ‘낯선 이질적 존재’로 간주하여 특별한 관리와 통제를 통해 우리식 단일문화로 동화시키려는 ‘외국인정책’과는 그 격이 사뭇 다른 것이다.

 

외국인정책은 반드시 인종적 서열화와 사회적 배제라는 숱한 인권문제를 야기한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시라. 이주민을 위한 한글교실을 열고는 다문화정책이란다. 결혼이주여성에게 한국의 전통양식과 세시풍속을, 한복 입는 법을, 심지어는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치며 다문화정책이라고 호들갑을 떤다. 이러한 것들은 전형적인 동화정책이지, 다문화주의정책이 아니다.

 

한국에 온 베트남 이주민이 베트남어로 표기된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볼 수 있는가. 파키스탄어(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용어’인 우르두어 - 옮긴이)가 지원되는 지상파 방송이 방영되고 있는가. 일반학교에서 몽골 이주민의 아이들이 몽골어로 교육을 받고 있는가. 다문화정책은 이처럼 엄청난 자원이 투자되어야 비로소 실현 가능한 것이다.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미 십수년 전부터 사실상 ‘다문화주의정책’을 포기하고 ‘이주민정책’으로 선회한 데도 바로 이런 배경이 있다. 비록 내국인과 똑같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주민에 대한 시민권적 개방체제만이라도 잘 갖추면 인권침해 소지가 다분한 ‘외국인정책’만큼은 극복할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우리는 과연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에 동의하는가. 혹시 그 존엄성의 주체를 ‘모두’가 아닌, ‘우리’라는 특정한 범주에 속한 사람에게만 한정하지는 않는가. 보편적 인권이 시민권이라는 강고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데 무슨 염치로 다문화사회를 운위할 수 있겠는가. 인권의 보편성은 세계시민으로 가는 길이다. 국경을 넘어, 민족을 넘어, 인종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