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밤송이에 절한 호랑이

개마두리 2017. 5. 3. 23:58

호랑이(虎랑이. 순수한 배달말로는 ‘범’이나 ‘줄범’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는 산 속의 임금이다. 이놈은 포식하면 2~3일이고 4~5일이고 안 먹고 잠만 잔다. 자다가 시장기가 돌면 일어나서 또 먹이를 찾아 돌아다닌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줄범은 - 옮긴이) 시장기가 몰려와 먹을 것을 찾느라고 살살 다니고 있었다. 해는 아직 서산으로 넘어가지 않아 동네로 내려갈 수는 없고 해서 산언덕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고기 냄새가 났다.


눈앞에 쪼그마한 것이 기어가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두루뭉술한 것이 먹음직해 보였다. (그래서 줄범은 - 옮긴이) 시장한 김에 이놈을 덜컥 깨물었다. 글쎄, 깨물고 보니 세상에 이런 건 처음 먹어 본 것이었다. 아마 고슴도치였던 모양이다. 먹을 수는 없고, 입 안에 온통 피가 나고 아파 죽겠어서, 도로 탁 뱉고 밤나무 밑으로 뛰어가서 앉아 입에서 나오는 피를 핥고 있었다.


그때 무엇이 위에서 툭 떨어지더니, 콧잔등을 때리고 앞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보니까, 아까 먹다가 혼이 난 것 하고 (생김새가 - 옮긴이) 똑같은 것이었다. 밤송이였다.


“아이고, 아까는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먹지 않겠습니다.”


호랑이는 밤송이를 보고 자꾸 절을 하였다.


-『한국구전설화』(임석재 선생이 모은 설화들을 실은 책)에 실린 배달민족의 옛날이야기


-『한국의 우언』(김 영 엮음, 이우일 그림, 현암사 펴냄, 서기 2004년)에서 퍼옴


* 옮긴이의 말 :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줄범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기분이 나아졌는데, 왜냐하면 가장 힘이 센 짐승이라는 줄범이 작고 힘이 약한 짐승인 고슴도치에게 호되게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도 약한 사람들이라는 고슴도치들이 힘센 놈들이라는 줄범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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