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씨 뿌리기

개마두리 2017. 5. 4. 22:52

동고자(東皐子)가 바위 틈에 집을 짓고, 산골짜기를 일구어 논밭을 만든 뒤 농사(農事. 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이’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를 지었다(“농사[農事]짓다.”는 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이 하다.”다 - 옮긴이). 하지만 몇 해가 지나도 곡식이 여물지 않자, 농기구를 던지면서 탄식하였다.


“다른 사람의 땅은 모두 풍년이 드는데, 내 땅만 유독 흉년이 드니, 어째서 하늘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건가?”


녹피옹(鹿皮翁)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왜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오? 땅은 각각 성질이 달라 기름지고 거친 차이가 있소. 한 지경(地境. 여기서는 ‘일정한 테두리 안의 땅’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안에서도 높은 곳에는 기장을 심는 것이 마땅하고, 가운데 땅에는 피가 알맞으며, 낮은 땅에는 벼가 마땅하지요.


드넓은 천하를 가지고 말하자면, 위천(渭川. 문맥상 황하[黃河]의 큰 지류[支流]인 위수[渭水]로 보인다.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조서 산에서 흘러나와 산서성(陝西省)의 중부에서 황하와 합류한다. - 옮긴이)에는 즈믄(1천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 옮긴이) 무(畝. ‘이랑’이라는 뜻. 사방 둘레가 100보[步]인 땅을 1무라고 부른다 - 옮긴이)인 대나무 밭이 있고, 연(燕)나라[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 옮긴이]와 조(趙)나라 땅[오늘날의 북중국 내륙인 지금의 산서성 북부와 중부/하북성 서부와 남부 - 옮긴이]에는 대추나무 즈믄 그루가 있지요.


촉(蜀)땅(오늘날의 중국 사천성 - 옮긴이)에는 생강과 토란이, 형(荊) 땅(오늘날의 남중국 내륙인 중국 호북성/호남성. 서주 시절부터 장강[長江] 남쪽을 ‘형’이라고 불렀고, 초나라가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말은 초[楚]나라를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 옮긴이)에는 귤나무가 각기 땅 성질에 맞게 자라고 있지요(나는 1년 전, 제주특별자치도의 감귤나무가 남중국에서 건너와 뿌리를 내린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이 맞다면 감귤의 원산지는 장강 내륙이고, 그것이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퍼지다가, 나중에는 사람들이 배에 감귤나무나 감귤의 씨앗을 싣고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왔다고 봐야 한다. 아마 고대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한다 - 옮긴이).


땅에 알맞게 씨를 뿌려야 뿌린 씨가 결실을 맺는 법입니다. 땅과 작물의 성질을 무시한 채 한 해 내내 부지런히 일하며 온 힘을 쏟더라도 얻는 것이 없겠지요. 그대는 벼가 물이 많은 진흙땅에 알맞은데도 메마른 언덕에 볍씨를 뿌렸소. 벼가 흰 가루가 생길 정도로 쉽게 말라 버렸지만, 개울이 막혀 물을 댈 수가 없었지요. 그러니 남들은 다 풍년인데 나만 흉년이라고 한탄하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소?


그대는 그저 산수(山水. 경치 - 옮긴이)의 즐거움만 알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이익은 생각지 않은 것이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리석은 줄은 모르고 하늘만 탓하고 있으니, 그래야 되겠소?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세운 계획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그대 같은 사람들이오.”


- 성현(서기 1439년에 태어나 서기 1504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 그러니까 조선 초기의 사람이다) 선생의 책인『부휴자담론』(이종묵 교수가 서기 2002년에 배달말로 옮김)에 나오는 우언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부휴자[浮休子]라는 사람의 담론’이라는 뜻)


-『한국의 우언』(김 영 엮음, 이우일 그림, 현암사 펴냄, 서기 2004년)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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