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근대사]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선생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중인(中人) 오경석

개마두리 2024. 5. 6. 22:29

박제가(朴齊家) : 근세조선의 실학자. 서기 1750년에 태어나 서기 1805년에 세상을 떠났다. 양반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했고, 연암 박지원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에 대한 이해력을 키웠다. 땅에 매달리는 대신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라가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레를 쓸 수 있는 큰 길을 닦고, 배를 만들어 그것으로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며, 화폐 사용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쓴 책으로는 북학의(北學議) 가 있다.

 

중인(中人) : 근세조선의 신분제도에서 두 번째 서열이자, 양반과 상민(常民) 사이에 속한 중간 계층. 의관(의원)/역관(통역사)/향리(지방의 토착 관리)/화원(畫員 : 화가)이 이에 속했다.

 

오경석(吳慶錫) : 근세조선의 역관이자 개화사상가/금석학자. 서기 1831년에 태어나 서기 18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는 유구[琉球] []이 근대 왜국[倭國]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고 완전히 멸망해 근대 왜국의 식민지가 된 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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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이 북경(北京)(‘한족[漢族]’ -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청년들 가운데 동방과 남방 출신의 양무파(洋務派. 서기 1861년에서 서기 1894년까지 청나라에서 양무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청나라를 바꾸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옮긴이) 개혁사상가들을 주로 사귄 것은 박제가의 영향 때문이다.

 

오경석이 역과(譯科. 역관을 뽑는 과거 옮긴이) 시험에 합격하도록 지도해 준 스승은 역관 이상적이지만, (그의 옮긴이) 아버지 오응현은 박제가의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옮긴이) 후손들에게 박제가의 저술을 읽도록 했다.

 

오경석 또한 국내(근세조선 옮긴이) 학자 가운데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서재에 그(박제가 선생 옮긴이)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걸어 놓고 그의 책을 읽었다.

 

추사에서 이상적으로 내려오는 중인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추사(‘김정희선생의 호 옮긴이)의 스승이 바로 박제가였으니, 이 집안에서 박제가의북학의(北學議) 를 교과서로 받드는 것도 일리가 있다.

 

(중략)

 

신용하교수는 오경석을 우리나라에서 (서기 옮긴이) 1853 ~ 59년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한 선각자라고 평가했는데, 오경석은 1840년부터 시작된 아편전쟁(올바른 이름은 1차 영 청 전쟁. 서기 1592년에 일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이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면 안 되듯이, 이 전쟁도 아편전쟁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 옮긴이)1851년에 수립된 태평천국의 난(여기서 ‘~의 난은 빼야 한다 옮긴이) 때문에 청나라가 망해 가는 모습을 북경 현장에서 보고,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옮긴이) 국내(근세조선 옮긴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해국도지(海國圖志. 청나라의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인 '위원'이 서기 1844년에 쓴 책으로, 서양의 지리와 서양 각국의 정치/경제/인구/종교를 설명한 지리서 - 옮긴이) , 영환지략(瀛環志略. 청나라의 지식인 서계여[徐繼畬]’가 지은 세계 지리책. 서기 1850년에 간행되었다 옮긴이) , 박물신편(博物新編. 근대 서구 유럽의 자연과학 지식을 한문으로 번역해서 청나라에 소개한 책. 이 책의 원서를 저술한 사람은 영국인 벤저민 홉슨([Benjamin Hoson]이다 - 옮긴이) , 양수기제조법(揚水機 製造法. 물을 퍼 올리는 기계를 만드는 법을 담은 책 - 옮긴이) ,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근대 서양의 생물학을 한문으로 옮겨서 소개한 책 - 옮긴이)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왔다(사서 가져왔다 옮긴이).

 

(오경석 선생의 옮긴이)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고 옮긴이) 묻자, 오경석이 북촌(한양의 동네 이름 옮긴이)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근세조선에 옮긴이)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경석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이 유대치와 박규수를 통해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 허경진, 조선의 중인들 , 155 ~ 156

 

→ 『 조선의 중인들 ( ‘허경진지음, ‘()알에이치코리아펴냄, 서기 2015)에서

 

(허경진 :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서기 2015년 현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펴낸 책으로는 [ 한국의 한시 ] 시리즈 / 한국의 읍성 /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 한시 이야기 / 조선평민열전 / 허균 평전 /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의 한국 고서들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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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개마두리)의 말 :

 

나는 지금까지 후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실학자는 다산(茶山)뿐이라고 여겼는데, 이 글을 읽은 지금(그러니까, 서기 2024년 양력 56)은 그 인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실학자인 박제가(朴齊家) 선생도 후세 사람인 오경석 선생에게 영향을 끼치셨기 때문이다.

 

박 선생은 서기 1805년에 세상을 떠났고, 오 선생은 그로부터 스물여섯 해 뒤인 서기 1831년에 태어났으므로, 전자는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의 책과 그것에 담긴 사상을 통해 후자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는 (확대해석하자면) ‘실학자가 개화사상가를 만들어낸 사례로 들 수 있으며, “실학이 실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중인을 개화사상으로 이끈 길라잡이구실을 했다.”고 풀이(‘해석’)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모든 실학이 근대 사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실학자들의 사상 가운데 일부는, 그것을 접한 사람들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개화파가 되게 하는 데 한 몫을 했다.’고는 말할 수 있으리라.

 

다산의 책이 동학 혁명의 교과서가 되었다면, 개화파인 오경석 선생의 교과서였던 박제가 선생의 북학의(北學議) 배달민족이 근대로 가는 데 도움을 준 책들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근세조선의 실학은 가봇(“절반”)의 실패였지만, 나머지 가봇은 성공이었던 학문으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 글은 내게 그런 확신을 더욱 단단하게 굳혀준 글이고,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내가 이 글을 소개하는 까닭은 또 있다. 박제가 선생이 위대한 실학자이신 연암 선생에게 학문을 배운 뒤 또 다른 실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학자가 다른 위대한 학자를 만든 셈인데,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 이 사례는 훌륭한 학자는 또 다른 훌륭한 학자를 만든다.”는 말(이 말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다)의 근거가 될 것이다(이런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플라톤이었고, 플라톤의 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였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이 글을 소개하는 또 다른 까닭(이자 마지막 까닭), 이 글이 인문고전을 읽은 사람은 자신의 두뇌를 일깨우며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박제가 선생은 실학자였고, 동시에 북학의 라는 훌륭한 인문고전을 남기신 분이었다. 그런데 그 북학의 를 교과서로 삼고 여러 번 읽었던 사람(오경석 선생)이 근세조선의 성리학자들과 양반들이 추구하던 쇄국과 소중화 사상에서 벗어나 개화사상을 추구하는 사상가로 거듭났다. 그렇다면, 이 글이 소개하는 일은 인문고전 독서의 쓸모 있음을 입증하는 사례로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 사실을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아니, 강조하고 싶다.

 

부디 이 글과, 내가 이 글에 덧붙인 글인 옮긴이의 말 이 여러분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를(그리고 도움이 되기를) 빈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 단기 4357년 음력 328일에, ‘이제 근세조선의 실학은 재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것들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는 계승되었음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나아가 한국 사회가 <위대한 학자가 다른 위대한 학자를 만들어낸 사실>에서 스승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문고전 독서가 개화사상가를 만들어낸 사례>에서 인문고전 독서의 중요성을 깨닫기를 바라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