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문경 '십자가 자살'로 본『카르마조프 가의 형제들』속 광신자들

개마두리 2012. 8. 27. 11:47

 

(전략)


『카르마조프 가의 형제들』(서기 1880년에 나옴 - 옮긴이)의 막장 드라마(연속극 - 옮긴이) 같은 줄거리를 들춰보면 21세기에도 끝없이 되풀이되는 철학적인 질문들이 깊게 깔려 있다. 특히 이반이 그의 동생이자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사람인 수습 수도사 알료사에게 읊어주는 자작 서사시『대심문관』을 보면 왜 21세기 한국에도 십자가 시신 사건같은 광신 행위가 나타나는지 나름대로의 '답'을 들을 수 있다.


15세기 무렵,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을 열던 대심문관이 잠시 지상을 방문한 그리스도(본명은 '예슈아 벤 요셉' - 옮긴이)를 보게 된다. 그는 예수를 체포해 가두고는 묻는다.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소?"


그가 퍼부은 말을 간단히 줄이면 이런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당신께서는 거친 벌판에서 수행할 때 악마의 세 가지 유혹 -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절벽에서 뛰어내려 다치지 않는 기적을 보여라/내게 절해서 온누리(전세계를 일컫는 순우리말 - 옮긴이)를 얻으라 - 을 뿌리치셨다지요. 이것은 당신께서 인간을 '밥'과 '기적'과 '절대권력'으로 굴복시켜 종(노예/노비를 일컫는 순우리말 - 옮긴이)으로 삼기를 바라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죠. 당신께서는 인간이 당신을(그리고 창조주를 - 옮긴이)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믿기를 바라신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나약해서 자유를 받아들이지 못해요. … (중략) … 인간은 먹을 것을 위해 자유를 기꺼이 버릴 수 있으며, 기적과 권위에 매달립니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이 인간들을 버리시겠어요?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당신을 믿는 슬기롭고 굳센 몇몇 사람들만 돌보실 겁니까? 저희는 당신의 이름으로 힘 없는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신비로운 기적'을 보이고, 권위를 세워서 그들에게 안정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이런 대심문관은 (교단과 성직자를 - 옮긴이) 종처럼 무작정 따르는 광신도를 내버려두거나 부추기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같은 극단적인 일은 아니더라도, 거의 광신적인 짓을 부추기는 교회들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런 현실을 개탄하고 본래 그리스도가 바란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을 강조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대심문관』은 권력자가 되어버린 교회를 비꼬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반은 대심문관이 위선자가 아니라, 정말로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을 구해주겠다는 바람을 품고 고민하다가 그런 전체주의적(파시스트적 - 옮긴이)인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는 '모든 운동에 앞장섰던 인간 가운데는 반드시 대심문관 같은 인간이 있었다.'고 딱 잘라서 말한다. 국민 또는 인민을 구하겠다는 바람을 품고 혁명을 일으킨 다음, 독재자가 된 모든 정치지도자에게는 대심문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하 생략)


- 문소영『중앙일보』기자의 글


(너무 어려운 말은 쉬운 낱말로 바꾸고, 문법과 어법이 어색한 부분도 고쳤으나, 내용 그 자체는 바꾸지 않았음 - 옮긴이 잉걸)


* 옮긴이의 말 :

                 

온 서른 세 해(133년) 전에 나온 물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면 참된 믿음도 없고, 어떤 믿음이나 사상을 따르는 것은 '밥'이나 '기적'이나 '칼'을 무기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는 풀이가 내게 전혀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온다. 이반의 말(이자 대심문관의 풀이)은 내 믿음을 더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밥'과 '돈'을 무기로 내게 "무릎을 꿇어!"라고 윽박지르는 박정희라는 유령과 싸울 수 있는 무기(영혼의 무기)와 전술(영혼의 전술)도 이 글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덧붙이려고 한다.

 

단,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반(反) 러시아 감정을 품고 있는 나라의 겨레들/또는 러시아나 소련 때문에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꺼내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