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크로포트킨이 서기 19세기의 유럽사회를 비판한 글

개마두리 2012. 9. 7. 01:09

 

국가가 사회 기능을 모두 병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방종하고 편협한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국가에 대한 의무가 늘어나면서 시민들은 서로에 대한 의무를 확실히 덜게 되었다.

 

길드(중세 유럽의 동업조합同業組合 - 옮긴이) 내에서 - 누구든지 길드나 공제 조합에 소속되어 있던 중세에 - 두 ‘조합원’은 병든 동업자를 번갈아 가면서 돌보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가까운 빈민 병원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미개인 사회에서는 분쟁으로 비화된 두 사람 사이의 싸움에 끼어들어 돌이킬 수 없는 결론(예컨대 살인 - 옮긴이)에 도달하지 않게 막지 않으면 그 사람도 살인자로 간주되었지만, 국가가 모든 것을 보호한다는 이론에 의해서 구경꾼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어졌고 사건의 개입 여부는 경찰관의 소관 사항이 되었다.

 

한편 야만인들의 땅에서 사는 호텐토트인(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인 ‘코이코이’족 - 옮긴이)들 사이에서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싶은 자가 있는지 없는지 세 번 큰 소리로 외치지 않고 먹으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는데, 현재 점잖을 빼는 시민들이 하는 짓이란 고작 가난한 자들에게 세금을 물리고 굶주린 사람들을 더 굶주리게 하는 일뿐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곤궁함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법이나 과학,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이론이 오늘날의 종교가 되어 버렸고 그 이론의 유효성을 의심하면 위험한 유토피아주의자가 되고 만다.

 

과학은 득의양양하게 만인에 대한 개개인의 투쟁이야말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중심원리라고 외치고 있다. 생물학은 동물계의 점진적인 진화를 이러한 투쟁의 탓으로 돌린다. 역사도 같은 노선을 취한다. 그리고 고지식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 경제학자들도 근대의 산업과 기계의 진보를 같은 원리의 ‘놀라운’ 효과에서 찾으려 하였다.

 

목사가 설파하는 종교는 바로 일요일에만 이웃과 자선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개인주의를 다소 누그러뜨리는 그런 종교다.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출처 :『만물은 서로 돕는다』(원제 :『상호부조론』.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 르네상스 펴냄, 서기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