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단편]민주주의 영웅 되기, 참 쉽죠?

개마두리 2012. 11. 10. 21:06

내 할아버지는 유명한 사탕 제조업자였다. 개암사탕을 할아버지보다 더 맛있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탕 가게를 물려받았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실 때 매우 부지런한 분이었다. 우리 사탕 가게 바로 옆에 있는 구리 제품 가게 주인이 자기 손님의 당나귀를 우리 가게 앞에 매어놓자, 아버지는 홧김에 구리 제품을 가게에 들여놓았다. 이웃 가게와 경쟁하려고 말이다. 그러자 구리 제품 가게 주인도 아버지에 대한 분풀이로 자기 가게에서 사탕을 팔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우리 가게 맞은편의 포목상(布木商 : 베나 무명 같은 옷감을 파는 상점 - 옮긴이) 주인에게도 화가 났다. 포목상 주인이 우리 가게 쪽으로 구정물을 쏟아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였다.

 

“이웃 사람 하나는 내 가게 앞에 당나귀를 매어두질 않나, 다른 하나는 구정물을 버리질 않나, 도대체 내 가게를 뭘로 보는 거야? 어디 두고 보자!”

 

아버지가 외쳤다.

 

성난 아버지는 포목상 주인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이스탄불에서 옷감을 몇 보따리나 주문했다. 그 뒤 우리 가게에서는 사탕 뿐 아니라 구리 제품과 옷감도 팔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아버지는 우리 가게 왼편에 있는 신발 가게 주인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그래서 이스탄불에서 신발을 몇 상자나 주문했다. 최신 유행 스타일의 멋진 신발이 우리 가게에서 팔려나갔다. 아버지는 이스탄불에 갈 때마다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사 왔다. 마을에서 라디오를 처음으로 판 곳도 우리 가게였다. 우리 가게에는 실부터 바늘까지, 먹을거리에서 옷가지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우리 나라에 필요한 물건이란 물건은 우리 가게에 다 있었다. 나는 가게에 새롭게 갖다 둘 물건을 딱히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새로이 벌일 만한 사업의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았으므로, 나는 다른 것을 시도해보자는 마음으로 작가가 되기로 했다. 내게는 천부적인 작가의 재능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글을 많이 썼다. 공책 세 권 분량의 시를 썼고, 지역 신문 한두 곳에 내가 쓴 시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시골 구석이라 아무도 내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스탄불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내 시를 보내보았다. ‘고민 상담’ 코너 담당자에게서 답장이 왔다. 내 시가 아주 마음에 드니 조금만 수정해서 보내주면 잡지에 실을 수도 있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사탕발림이었다. 이스탄불의 잡지사 사람들도 내 시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나라가 발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스무 쪽이 넘는 글을 써서 어느 신문사에 보냈다. 만약 그 신문사에 내 글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필자로 만들어주리라.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신문에 네 글이 실렸던데!”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 신문을 한 줄도 남김없이 구석구석 다 읽었는데 어떻게 내 글을 못 봤지! 나는 태연한 척하며 친구에게 물었다.

 

“가끔 신문에 글을 쓰기는 해. 신문사 몇 곳에서 매일 글을 써 달라고 하는데도,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내 글을 어느 신문에서 봤는데?”

 

친구는 들고 있던 신문의 5면에 실린 ‘독자들과 함께’라는 꼭지를 보여주었다. 나의 스물두 쪽짜리 글이 다섯 줄로 줄어들어 있었다. 내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고, “한 시민은 우리 나라가 발전하려면 읽고 쓰는 사람이 늘어나야 하며 사탕무를 재배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라는 문장 다음에 그 다섯 줄이 게재된 것이다. 그것도 내가 쓴 그대로가 아니라 그들이 짜깁기해 꾸며낸 글이었다. 글에 오류가 있다고 항의 편지를 쓰려다가, 자칫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앞으로 내 글이 전혀 실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 그만두었다. 다섯 줄도 실린 거라면 실린 거야. 차차 여섯 줄, 예순 줄로 늘어나겠지.

 

신문에 글이 실리고 나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사탕 가게에서 주사기, 신발 밑창, 소다수, 말굽 따위를 팔았을 때와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모두가 내 글이 신문에 실렸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제발 시장(市長)에 대한 불만도 쓰게나!”

 

“도로 문제도 써.”

 

“산림을 보호하자고 써!”

 

아, 그 다섯 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만약 열다섯 줄이 실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문에는 ‘기자’가 있다. 기자가 되려면 신문사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다. “귀사의 신문이 창간된 그날부터 큰 관심을 갖고 읽고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잡지사들에는 이제껏 해온 대로 “아주 어릴 적부터 글쓰기에 대한 커다란 열정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약간은 애매한 투로, “만약 원하신다면 제가 귀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에 대해 아무런 물질적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썼다.

 

어느 날, 내가 편지를 보낸 신문사 중 딱 한 군데에서 답장이 왔다. 새로 생긴 신문사인데 나라 곳곳에서 소식을 전해줄 지역 기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만약 일할 의사가 있다면 기자증을 발급해줄 테니 증명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즉시 내 사진을 보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기자증이 도착했다. 내가 한 신문사의 기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화젯거리를 찾아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기삿거리를 찾는 일로 바빠서 사탕 가게에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기자가 되었는데 사탕 가게가 눈에 들어올 리 없지 않은가!

 

첫 기사는 어느 노파가 적신월사(赤新月社. 이슬람 국가에서 적십자사[赤十字社]와 똑같은 일을 하는 기관. 적십자사와는 달리 빨간 초승달을 상징으로 쓴다 - 옮긴이)에 50리라를 기부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축구 경기에 대한 기사를 써 보냈다. 그것도 실리지 않았다. 살인 사건 관련 기사를 보냈다. 도로가 정비되었다는 기사를 썼다. 앙카라의 고위 공무원들이 우리 마을을 방문했다는 기사도 썼다. 나는 전보, 편지, 전화로 쉴 새 없이 신문사에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무슨 일에 대해 내가 일하는 신문사에 기사를 써 보냈으니 내일 읽으시오, 라고 귀띔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쓴 어떤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날 놀려대기 시작했다.

 

“하미트 씨가 지붕 기와를 바꿨다네. 기사에 꼭 쓰게나!”

 

“베키르 씨네 당나귀를 도둑맞았다네. 신문사에 전하게나!”

 

나는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가게를 돌보거나 새로 물건을 들이는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열 일 제쳐놓고 기사 쓰는 일에만 몰두했다. 고등학교 학예회에 대한 글을 썼다. 시장 선거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썼다. 비축해둔 쌀의 가격에 대해 썼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기사로 실리지 않았다. 게다가 매일 최소한 15~20리라의 전화, 전보 요금이 나갔다. 어느 정당 사람이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을 마침표 하나까지 한 시간 동안 전화로 알려주느라 내 주머니에서 전화 요금 40리라가 빠져나가기도 했다.

 

마음속으로는 오래전에 기자 일을 포기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신문기자입네 떠들며 기자증까지 보여준 터라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보낸 기사 중에 한두 편이라도 실리는 날엔 “신문사에서 애걸복걸하고 붙잡는데도 듣지 않았어, 사퇴해 버렸지.”라고 말할 참이었다. 기자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산인 가게의 물건은 점차 줄어들어 바닥날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일하는 신문사에서 편지가 왔다.

 

친애하는 아무개 기자

 

우리 신문은 이상적이고 전문적인 신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신문에 독창적인 기사를 제공해주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특히 신문에 실리는 기사는 흥미로워야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고, 기사로서의 중요성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다섯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별다를 것 없는 일이지만, 한 사람이 다섯 사람을 죽여 먹어치우는 일은 기사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또 다른 예로, 축구 경기에서 관객들이 심판을 때리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심판이 관객을 때리는 것은 특별한 일이지요. 칠순 나이에 손자까지 있는 남자가 성(性)전환을 해서 여자가 된 뒤 다섯 쌍둥이를 낳는 것과 같은 희귀한 사건은 기삿거리로 아주 가치 있는 것들입니다.

 

귀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과 이해를 바탕으로 발간되는 우리 신문을 대표하는 기자인 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감안해 일해주실 것을 희망하고 요청합니다. 귀하의 성공을 기원하며 …….

 

편지를 읽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 내가 보낸 기사들이 왜 신문에 실리지 않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신문사 입장에서 보면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사건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기사로서 중요하다는 것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기자로 일하는 신문사에서도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삿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유의 소식이 아니면 싣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신문에 실릴 만한 중요한 기삿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느라 가게 일은 아예 뒷전으로 미루었다. 하지만 놀랄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한데 다른 기자들은 어떻게 일을 할까? 그런 기사를 어디서 찾아 싣는거지?

이렇게 커다란 주(州)에서 신문에 실릴 만한 사건이 며칠씩이나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신문들이 우리 주에 대해 기사 한 줄 싣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기삿거리를 찾아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나는 점차 찻집, 길거리, 시장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누구를 만나든 “자네가 쓴 사설을 읽었네!”,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든 “신문에 나온 자네 글을 읽었네.”라며 놀려대는 통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설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창가에 앉아 있는데, 불현듯 기자로서의 영감이 떠올랐다. 맞은편 들판에서 갓 새끼를 낳은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 양 떼 사이에 당나귀 두 마리가 있었다. 나는 그 당나귀들을 보고 느낀 점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전보로 그 글을 신문사에 보냈고, 그 기사는 다음 날 신문 3면에 실렸다.

 

당나귀가 양을 낳았다

 

어제 우리 마을에서 스물여섯 살 된 수컷 당나귀가 양 두 마리를 낳았다. 새끼 양 한 마리는 나이팅게일(새 이름 - 옮긴이)처럼 지저귀는데, 다른 한 마리는 벙어리에다 귀머거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컷 당나귀는 꼬리로 양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마을 노인들 말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는 유례없는 일이니 이를 행운과 길조로 여길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제야 체면을 차린 셈이었다. 성공은 사람이 일하는 데 힘을 실어준다. 내가 뒤이어 보낸 소식도 신문 1면에 실렸다.

 

하늘에서 생선이 쏟아져 내리다

 

어제 우리 마을에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듯 삼치와 전갱이가 맹렬히 쏟아져 내렸다. 삼치는 마리당 6,7킬로그램 정도 되었으며, 그 생선들 틈에서 살라미 소시지와 소시지가 든 샌드위치도 나왔다. 두 시간 정도 내린 생선 비는 곡식과 과실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기상청은 만약 비가 계속 내린다면 올해 가뭄 피해가 있으리라 예측하고 있다. 관련 기관은 생선 비에 대비해 공중에 그물을 칠 계획이라는 희소식을 전했다.

 

나는 일을 쉽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신문에 기고한 소식 중에 가장 하찮은 것들로는, 어떤 사람이 자기 말을 뒷발로 걷어찬 이야기, 한 남자가 이웃의 씨황소를 머리로 들이받은 사건, 개구리를 낳은 여자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내가 기고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우리 주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정상적인 출산을 하지 못했다. 소들은 머리가 여덟 개인 송아지, 꼬리가 둘 달린 말을 낳았고, 여자들은 반은 물소, 반은 낙타를 닮은 괴상한 생명체를 낳았다. 우리 주에는 성전환을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여든 살에 죽은 남자가 자식이 여섯, 손자가 서른 명인데도 숫총각이었다는 사실이 시체를 닦는 간이침대에서 밝혀졌다고 썼다. 항상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축구 경기에 대해 썼다.

 

늘 수치스러운 일과 재앙만이 신문에 실렸다. 여러분이 신문에서 읽은 비행접시(UFO - 옮긴이)나 날아다니는 담배가 관측되었다는 기사는 모두 내가 쓴 것이다. 거짓 기사를 쓰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우리 주에 화성인이 몇 명 내려오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쓰든 신문에 실렸다. 그것도 제 1면에. 내가 쓴 많은 기사가 대서특필되곤 했다.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기사를 꾸며내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외출해 라크(튀르키예의 전통 술. 주로 물에 타서 마신다 - 이난아 강사의 주석) 한 병을 마시고 대마초 세 대를 피우면 기상천외한 영감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유산인 가게는 이미 오래전에 파산했다. 하지만 나는 기자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보수로 일했지만 나중에는 신문사에서 알아서 돈을 지급해주었다. 신문에 실리는 기사 한 꼭지당 50쿠루시(튀르키예의 돈 단위. 100쿠르시가 1리라다 - 이난아 강사의 주석)였다. 그러다 차차 1리라, 2리라, 5리라로 올려주었다. 그 뒤로 다른 신문사에서 기사당 10리라를 제안했다. 또 다른 신문사에서는 20리라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기사당 20리라를 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제공한 기사 덕분에 신문 판매 부수가 날로 늘고 있었다. 나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더 많은 거짓 기사들을 썼다.

 

독자들은 싫증을 빨리 낸다. 아무리 흥미롭고 새로운 기사라도 금방 그 영향력을 잃는다. 그들은 매일 더 흥미진진한 기사를 기다린다.

 

처음에는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목 졸라 죽이는 것에 관심을 갖지만, 며칠이 지나면 이런 기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럴 때는 살인자가 자기 아내를 잘게 토막 냈다고 써야만 한다. 독자들은 이내 이런 것에도 익숙해져 싫증을 낸다. 그러면 이번에는 (살인자가 - 옮긴이) 아내의 살을 고기 다지는 기계에 넣었다고 꾸며대야 한다. 이런 기사를 세 번쯤 읽으면 독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이게 뭐 대단하다고? 예사로운 일이잖아. 이런 걸 왜 신문에다 쓰고 난리야.”

 

그러면 나는 살인자가 기계로 다진 아내의 살점으로 미트볼을 만들어 안주로 먹었다고 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꾸며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꾸며대도 시간이 지나면 독자들은 또다시 시들해진다. 그러면 신문사는 내게 “제발 더 흥미진진하고, 더 특이한 기사를 보내요.”라고 전화를 해댄다.

 

나는 꽤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존경을 표했다. 어디를 가든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가장 좋은 자리로 나를 앉혔다. 그들이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두려워해서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등 뒤에서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수군거린다. 나를 화나게 하면 내가 자신들을 모욕하는 기사를 쓰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기사를 부인하더라도, 독자들은 거짓말과 안 좋은 소식을 믿는 경향이 있다. 꾸며낸 저질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자신들도 그랬기 때문에, 나를 끔찍이 두려워하고 겉으로라도 내게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열여섯 살 소녀가 서른 살짜리 남자를 산으로 납치했고, 여든 살 노파가 열 살짜리 소년을 집에 감금했다는 기사를 신문사에 보낸 날이었다. 고위 공무원이 우리 주를 방문했다. 신문에 기사를 꾸며대기 좋은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그 고위 공무원이 마음에 들어, 옳은 기사를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유명 기자이니 신문사도 어쩌다 한 번 보낸 옳은 기사를 싣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날은 어찌 되었든 간에,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거짓말 한마디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사를 썼다. 정당 문제, 국내 문제 등에 관해 거짓말을 쓸 수는 없었다.

 

내가 기자가 되어 쓴 바른 기사가 처음으로 신문에 실린 날, 나는 체포되었다. 지금 나는 교도소에 있다. 여러분도 각 신문에 “교도소에서 머리카락이 잘린 민주주의의 영웅”이라는 기사와 함께 실린 내 사진을 보았을 것이다. 내 직업을 배반한 벌을 받은 셈이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영웅이 되었다.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단 한 가지가 부족했는데, 지금 그것을 채워가고 있다.

 

* 출처 :『일단, 웃고나서 혁명』(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푸른숲 펴냄, 서기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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