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단편]당신을 선출한 죄

개마두리 2012. 11. 6. 17:56

 

(전략)

 

기원전 128년(지금으로부터 2142년 전 - 옮긴이) …… 저는 로마 인이었습니다.

 

저의 집은 굉장한 저택이었는데, 플라피움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저택에는 굉장히 넓은 정원이 있었습니다. 사흘 전, 그 정원에 손님들이 아주 많이 왔지요. 발루스투스, 유리우스 페루스, 솜페이우스, 티세론, 그 외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 대부분 제 친구들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모두 처음 듣는 이름일 테지만요. 이참에 그들이 누군지 짧게 설명해 드리지요.

 

발루스투스는 유명한 검투사입니다. 얼마 전 콜로세움에서 이름난 검투사와 대결을 벌였지요. 손에 땀을 쥐게 한 그 대단한 결투를 여러분이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검투사가 등장하는 순간,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답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지요.

 

발루스투스는 집정관들이 앉아 있는 특별석으로 돌아서더니 경외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존경하는 집정관님.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할 당신의 노예가 인사드립니다!”

 

그 순간, 관중들이 얼마나 크게 환호를 하던지! 그렇게 대단한 환호는 나체쇼를 하러 무대에 올라온 무용수나 받을 법한 것이었습니다.

 

두 명의 검투사는 정확히 세 시간 반 동안 결투를 했습니다. 결국 발루스투스가 상대편을 바닥에 넘어뜨렸지요. 바닥에 쓰러진 검투사의 심장이 반짝반짝 빛나는 청동 갑옷 아래서 얼마나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던지 정말이지 볼 만했답니다.

패배한 검투사는 집정관 쪽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었습니다. 그것은 죽이지 말아 달라는 표시였습니다.

 

흥분한 관중들은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죽여라, 죽여라라라라라라!!!!”

 

… (중략) …

 

집정관은 사자 발톱 같은 손을 금실로 장식한 벨벳 쪽으로 내민 채 싱긋 웃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숙였습니다. 그것은 발루스투스에게 보내는 신호였습니다. “적을 끝장내라!”라는 뜻이었지요. 발루스투스는 창을 높이 쳐들어 바닥에 있는 적의 가슴에 내리꽂았습니다. 제 친구 발루스투스는 이렇게 용감무쌍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친구 유리우스 페루스는 용맹한 장군입니다. 저와 전장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헬레니즘 왕정을 무너뜨린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솜페이우스는 노예 출신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철학자이자 능력 있는 의사랍니다. 주인의 병을 말끔히 치료해 준 덕분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지요. 솜페이우스는 뛰어난 지성으로 트리부나 의회의 원로원 의원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티세론. 그는 로마에서 으뜸가는 마차 경주자였습니다. 지금은 시와 희곡을 쓰고 있지요.

 

그날, 우리 집에서 열린 잔치는 아주 대단했습니다. 하프(수금竪琴 - 옮긴이)와 기타 등 온갖 악기들이 연주되었고, 무용수들은 근사한 춤을 선보였습니다. 먹을 것이 넘쳐났지요. 그 잔치의 주인공은 발루스투스였습니다. 그는 콜로세움에서 결투를 한 뒤 사흘 동안 내리 침대에 누워 있었답니다. 그의 침대 옆으로 고급스런 요리가 수도 없이 날라져 왔습니다. 술과 과일 역시 넘쳐났고요.

 

발루스투스는 몇 차례나 토하면서도 쉼없이 먹고 마셨습니다. 그렇게 먹어 대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아주 굉장한 잔치였지요. 모두들 사흘 내내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지고 말았어요. 우리는 사흘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답니다.

 

저는 목욕을 하고 몸에 향수를 바른 뒤, 하얀색 토가(고대 로마의 남성들이 입었던 낙낙하고 긴 겉옷)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이웃인 플레비우스의 집으로 갔습니다. 플레비우스는 저와 같은 정당에 속해 있습니다. 정당에서 그는 굉장히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답니다.

 

저를 보자 그가 말했습니다.

 

“내일 사냥이나 같이 갑시다.”

 

“내일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오늘은 뭘 하면 좋을까?”

 

“경기장에나 갑시다. 아주 대단한 말 경주가 있다던데.”

 

“플레비우스, 그건 피곤해서 내키지 않는데 …….”

 

“그럼 좋은 연극이 있다던데 대(大)극장에나 갈까요?”

 

우리는 대극장으로 갔습니다. 헤사피아누스의 코미디가 상연되고 있더군요. 저는 그 저질스런 놈을 아주 경멸합니다. 그놈의 혀를 확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헤사피아누스는 끔찍한 독설가입니다. 그가 올리는 연극은 매번 원로원을 비방하거나 쿠리아 의회, 아니면 집정관을 조롱해 왔습니다. 저는 몇 번이고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저놈을 당장 끝장냅시다. 연회 때 독이 든 포도주를 건네 주자고요.”

 

제 친구 솜페이우스는 이렇게 대꾸하더군요.

 

“로마는 공화국일세. 공화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 모든 사람에게는 원하는 대로 표현할 자유가 있어.”

 

저는 정말이지 헤사피아누스가 매우 거슬렸습니다. 제가 집정관이었다면 당장 그 녀석을 곡예단(曲藝團. 서커스단 - 옮긴이)의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져 온몸이 갈가리 찢기게 했을 겁니다. 그의 시체를 뜯어먹는 상상 속 호랑이에게조차 거부감이 들 정도로 저는 그 작자가 몹시 못마땅했습니다. 더러운 녀석 같으니라고!

 

저는 시민들의 태도도 퍽 불만스러웠습니다. 그 작자가 희곡을 쓴 연극이 상연될 때마다 대극장을 꽉꽉 채울 정도로 모여들었으니까요. 관람객들은 대개 평민들이었습니다. 귀족은 드문드문 있을 뿐이었지요.

 

그날 공연에서도 헤사피아누스는 우리 정당을 풍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속였다나요? 뭐, 노골적으로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빙빙 돌리고 꼬아서 얘기해도 눈치를 챌 수는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대극장은 박수와 함성으로 떠나갈 것 같았습니다. 아주 못마땅한 광경이었지요. 저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제 집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노예가 황급히 제 앞으로 뛰어오더군요.

 

“무슨 일이냐?”

 

“주인님, 큰일났습니다. 군인들이 카바키우스 도련님을 체포하러 왔답니다.”

 

제 아들을 체포하러 온 군인들의 지휘관은 다름 아닌 제 친구 유리우스 페루스였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페루스? 무엇 때문에 내 아들을 체포하려는 거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네. 들리는 소문으로는, 자네 아들이 시를 썼다고 하더군. 그 시에 ‘로마로 가는 길이 닫혔다.’라는 구절이 있다던데.”

 

“그게 무슨 잘못인가? 하수구를 온통 파헤치는 바람에 모든 길목이 막힌 건 사실이잖나?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잘못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도 잘 모르겠네.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라 해도 대놓고 얘기하면 죄가 되는 수가 있잖은가? 메르시메키우스가 어쩌다 살해되었는지 기억하게나. 로마가 공화 정치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로마는 공화국이다.’라고 외쳤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네. 나도 정확한 체포 이유는 모르겠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자네 아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네.”

 

“페루스, 도대체 이 명령을 누가 내린 건가? 어서 말해 주게. 주피터(라틴어로는 유피테르.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다 - 옮긴이)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난 그 작자를 찾아서 반드시 죽이고 말겠네.”

 

저는 칼집에서 단검을 꺼냈습니다. 페루스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서양에서는 서기 14세기부터 낡은 옷감이나 나무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으므로, 이 소설에 나오는 종이는 케메트[이집트]의 파피루스로 만든 ‘파피루스 종이’라고 봐야 한다 - 옮긴이)를 제게 내밀었습니다.

 

“자, 자네의 적은 바로 이 문서라네. 명령은 여기에 적혀 있어. 마르스를 걸고 맹세하건대, 내 의지로 자네 아들을 체포하는 것은 절대 아닐세.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그저 내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것뿐이네.”

 

“그래, 임무는 임무지. 한 가지만 묻겠네. 자네에게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도대체 누군가?”

 

“자치구장(自治區長) 폴라키우스라네.”

 

저는 토가를 휘날리며 폴라키우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다 길목에서 철학자 친구 솜페이우스와 마주쳤습니다.

 

“베베리우스, 어딜 그리 황급히 가나? 지옥의 신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 같군.”

 

“플루토가 가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자치구장 폴라키우스를 지옥으로 보내 버릴 작정이네. 그가 내 아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네.”

 

“폴라키우스가 뜬금없이 그랬을 리가! 그도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았을 걸세.”

 

“내가 누군가? 이래 봬도 가장 순수한 혈통의 로마 귀족이 아닌가, 솜페이우스?”

 

“그래, 자네는 가장 순수한 로마 인이지. 로마 혈통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고귀하디고귀한 로마 인이지.”

 

“내가 이 땅의, 이 농장의, 이 노예들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지 않나?”

 

“물론이지, 베베리우스.”

 

“그놈들을 뽑아 준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일세!”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이건 부당하지 않나?”

 

“몹시 부당하지.”

 

“그렇다면 이 부당한 일을 저지른 죄인이 분명 있을 거네. 주피터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난 반드시 그를 찾아내어 기필코 죽이고 말겠네.”

 

“그렇게 맹세하지 말게나. 만약 진짜 죄인을 찾는다 하더라도 자네가 그를 죽일 수는 없을 걸세. 자네의 단검은 죄인의 심장을 겨누는 대신 자네 칼집으로 도로 들어갈 걸세.”

 

“난 틀림없이 맹세했네. 두고 보게.”

 

저는 곧장 단검을 손에 쥐고서 토가를 휘날리며 폴라키우스에게 달려갔습니다.

 

“단지 사실을 얘기했다는 이유로 내 아들을 체포하라고 한 게 바로 네놈이냐?”

 

“저는 죄가 없습니다. 여기, 지방 의회장이 보낸 공문이 있습니다.”

 

저는 다시 지방 의회장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상부의 명령을 이행했을 뿐이오. 로마 주지사 즈바리우스한테서 명령을 받았다오.”

 

저는 주지사 즈바리우스에게로 뛰어갔습니다.

 

“자네가 내 아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나?”

 

“아닐세, 베베리우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젊은이가 체포되어 나도 심히 유감일세.”

 

“그렇다면 누가 범인인가? 사람들은 내게 수많은 종잇조각과 건물을 가리켜 주었네. 사실을 얘기했다는 이유로 이 문서들이, 이 대리석 벽들이 내 아들을 체포하라 명령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이 단검으로 종잇조각을 찔러야 하나? 아니면 건물 벽을 부숴야 하나? 말해 주게, 내 적은 도대체 누구인가?”

 

즈바리우스는 저에게 수십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여기 있네. 트리부나 의회의 명령이라네. 문서 위쪽에 원로원의 승인이 있잖나?”

 

저는 원로원의 의원들에게 득달같이 달려갔습니다.

 

“내가 대체 누군가? 로마를 위해 피를 흘린 베베리우스 아닌가?”

 

“어서 오시게나, 로마의 영웅! 우리 당에서 가장 훌륭한 위원으로 손꼽히는 베베리우스!”

 

“영웅이고, 훌륭한 위원이고 다 집어치우시지! 자네들이 내 아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나?”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나? 집정관께서 명령을 내리셨다네.”

 

“집정관이라고? 아무리 집정관이라도 이 부당함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네!”

 

저는 단검을 들고 집정관 옥타미루스에게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집정관님이 바로 저의 적이십니까?”

 

저는 대뜸 이렇게 소리질렀습니다.

 

“베베리우스, 제정신인가? 나는 왕이 아니라네. 독재자는 더더욱 아니고! 자네도 알다시피 로마는 공화 정치를 하고 있잖은가? 여기, 자네 아들의 체포 영장이 있네.”

 

“또 종잇조각입니까? 이 종잇조각이 제 아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나요? 누구라도 내 앞에 나타나란 말이야!”

 

“이 명령은 원로원에서 내려졌다네. 의원들의 결정으로 영장이 발부된 걸세.”

 

저는 바람처럼 뛰어다녔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놈의 적을 찾아야만 했으니까요. 그러다 그 재수 없는 놈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러니까 원로원을 상대로 풍자와 조롱이 담긴 연극 대본을 쓰던 헤사피아누스 말입니다.

 

“헤사피아누스, 내 아들이 시(詩)에다 ‘로마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네. 이건 부당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 몹시 부당하지.”

 

“이 부당한 일을 한 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모두들 체포 명령이 씌어진 수많은 종잇조각만 보여 주더군. 말 좀 해 보게나. 내가 이 종잇조각들을 찢어 발겨야 하나? 이 부당한 일을 저지른 자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헤사피아누스가 되묻더군요.

 

“그자를 잡아서 뭘 어찌하려고?”

 

“주피터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놈을 죽여 까마귀 밥으로 만들어 줄 걸세.”

 

헤사피아누스는 철학자 솜페이우스처럼 말하더군요.

 

“죄인을 찾는다 해도 자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걸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두고 보게. 난 맹세를 했어. 난 지금 이 종잇조각이 처음 발부되었던 곳을 찾고 있어.”

 

“그건 두말할 것 없이 원로원이지.”

 

“맞아, 원로원이야.”

 

“원로원의 의원들이 누구지?”

 

“우리 정당의 위원들이지.”

 

“그들을 누가 선출했지?”

 

“내가 선출했지!”

 

“그런데 죄인을 어디서 찾고 있나?”

 

저는 단검을 빼들어 제 심장에 꽂았습니다. 저의 하얀색 토가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습니다. 저는 바야흐로 죄인을 찾아 죽였습니다.

 

(이하 생략)

 

* 출처 :『개가 남긴 한마디』(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이종균 그림, 도서출판 푸른숲 펴냄, 서기 2008년)

 

* 집정관(執政官) : 통령(統領)이라고도 함. 로마가 제국이 되기 전, 그러니까 공화국일 때 로마를 다스리던 가장 높은 관직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이다. 호민관과 마찬가지로 투표로 뽑았다.

 

* 원로원(元老院) :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조직. 로마의 집정관과 호민관(護民官.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나 부통령[副統領])과 함께 로마 공화국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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