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희망

▩“요람서 무덤까지 모든 게 협동조합으로 해결 가능합니다”

개마두리 2012. 11. 24. 22:09

 

‘축구의 메카’ 영국 맨체스터는 ‘협동조합의 고향’이기도 하다. 170여년 전 설탕에 모래를 섞고 저울 눈금을 속여 버터를 파는 사업자의 횡포에 시달리던 맨체스터 로치데일 주민들은 “조합원의 재정, 사회적 여건을 개선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손수 가게를 차렸다. 3층 짜리 작은 잡화(雜貨) 가게가 현대 협동조합의 ‘거대한 씨앗’이 된 것이다.

 

올해 맨체스터에서 열린 협동조합 박람회에는 우리나라의 농협을 비롯해, 영국/프랑스/캐나다 등 선진국은 물론 케냐/나미비아/브라질/중국/불가리아 등 모두 40여개 나라 참가자들이 전시관을 차리고 자신만의 특색있는 제도를 선보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협동조합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폴린 그린 국제협동조합연맹 회장은 “유엔이 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가 끝나가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슬로건 아래 지난 1년 동안 질적/양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이번 박람회에서 영국은 가장 넓은 전시 공간을 확보하고 다양한 모습의 협동조합을 선보였다. 영국의 협동조합은 국민 10명 중 2명꼴인 1350여만명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여러 영역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조합원과 매출이 4년 새 각각 20%정도 늘어났다. 같은 기간 영국의 경제 성장률이 1.7%에 머무는 상황에서 일궈낸 성과다.

 

영국 최대 생활협동조합인 ‘코오퍼러티브 그룹’은 식품, 은행, 약국, 장례, 관광, 자동차판매, 법률상담, 말기 케어(‘죽기 전에 돌봄’이라는 뜻인가? - 옮긴이), 부동산, 농업, 전자제품, 침구, 의류 등 생활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업을 진행해 해마다 수십 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20년 전만 해도 영국 생협은 테스코 등 대형마트에 밀려 쇠퇴하는 공룡이었다. 생협(‘생활협동조합’을 줄인 말 - 옮긴이)별로 구매와 물류 기능 등이 나뉘어 있고, 브랜드 관리나 투자 전략 등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00년과 2007년 두차례 영국 주요 생협이 합병하고 2009년엔 중견 유통기업을 매수했다. 일정 수준의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고서는 쇠퇴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 생협은 ‘몸집 불리기’와 함께 △이익의 지역사회 환원 △조직의 민주주의 강화 등 ‘체질 개선’도 함께 진행했다. 렌 워들 코오퍼러티브 그룹 의장은 “비전이 없는 곳에 사람은 모이지 않는다. 우리는 협동조합이라는 비전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데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현재 코오퍼러티브 그룹은 영국 5위권 식품 유통업체로 성장해, 유통 대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다.

 

이번 박람회는 ‘공정무역’을 주요 주제로 삼았다. 지역을 뛰어넘어 지구적 차원의 협동을 추구하는 것이다. 칠레/파나마/페루/우간다/아르헨티나/인도/남아공/말라위/케냐 등 13개국은 공정무역 전시관을 공동으로 차렸다.

 

꿀과 커피, 바나나, 와인(과실주[果實酒] - 옮긴이), 땅콩, 캐슈너트, 초콜릿 등이 협동조합을 통한 공정무역으로 거래되고 있다. 예컨대 커피를 재배하는 케냐의 농부들이 협동조합을 꾸려 생산한 유기농 커피가 영국 코오퍼러티브 생협을 통해 공정무역 방식으로 수입돼 소비자들에게 전달되는 식이다. 생산자는 헐값이 아닌 제값을 받을 수 있고, 소비자는 착취가 아닌 정당한 가격에 질 좋은 제품을 살 수 있다. 양쪽 다 명분과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윤리적소비 양식이다. 페루에서 온 커피 생산자 에프세란사 디온소는 “연간 생산량의 절반 정도는 유기농으로 생산해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특히 공정무역 방식으로 수출해 꽤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생협과 아름다운 가게 등을 통해 초콜릿과 커피 등이 소량 수입되고 있지만, 영국 생협에서는 와인/커피/초콜릿/바나나 등 매우 다양한 품목의 공정무역 제품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영국에서도 공정무역이 대중적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는 못하고 있다고 했다. 코오퍼러티브 그룹 관계자는 “바나나 옷을 입고 쇼를 하는 등 공정무역 홍보 활동을 많이 하고 있지만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람회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골칫거리가 되어 버린 금융의 미래도 엿볼 수 있었다. 캐나다 퀘벡의 금융 협동조합인 데자르댕 그룹과 프랑스 신용협동조합 등이 전시공간을 차리고 활동을 알렸다. 프랑스 신용협동조합인 크레디 코오페라티프 그룹은 스스로 ‘이로운 은행’이라 칭한다. 주로 작은 기업체와 그 직원, 사회주택 제공자 등에게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은행은 주식시장에 상장되지 않은 채, 민주주의와 지역사회 기여라는 협동조합의 가치를 내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캐나다의 데자르댕은 20세기 초 무려 3000%가 넘는 고리채에 시달리던 서민을 대상으로 낮은 금리의 상품을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현재는 자산이 200여조원이 넘고 연간 순 이익도 수조원에 이른다. 캐나다 퀘벡 인구의 70%를 조합원으로 둘 정도로 지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들 말고도 각국의 협동조합이 저마다의 다양한 협동을 선보였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여관과 호텔들이 모여 만든 여행 협동조합이 참가했다. 소규모 숙박시설 2000여개를 묶어, 다른 곳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아프리카의 공화국인 나미비아와 남아공에서는 수공예품 협동조합이 박람회에 참석했고, 브라질에서는 농업협동조합이 참석했다. 브라질 농업부의 페드로 보르헤스는 “브라질에서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제약이 없어 무척 활발하게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번 박람회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시관을 차린 농협은 김치/주스/차(茶)등 다양한 가공식품을 선보였다. 시식도 할 수 있도록 해 허기지고 목마른 탐방객들이 많이 찾았다. 신성식 아이쿱생협 경영 대표는 “협동조합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맨체스터/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한겨레』서기 2012년 11월 9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