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희망

▩대학서 쫓겨나는 인문사회과학, 협동조합에 둥지 튼다

개마두리 2013. 4. 3. 22:47

- 대학 ‘기업화’에 연구자들 고사위기

 

- 지식 공동생산/강의로 경제자립 꿈꿔

 

- 김세균 교수 ‘노나메기’ 조합 추진에 대학의 인문학 박사 연구자들도 준비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연구/강의 협동조합이 뜨고 있다. 대학들의 ‘기업화’ 경향 속에 인문학과 사회과학 등 순수학문 분야 정원과 강좌 등을 줄이면서 이들 학문과 연구자들이 대학 안에서 ‘고사(枯死. 말라죽음 - 옮긴이)’ 위기에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모색이다. 연구자(강의자)들과 수강자들이 출자를 하고 조합원으로 참여해서 시직을 순환시키는 학문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가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노나메기재단 설립추진위원회는 지난달 30일 ‘노나메기 지식순환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2차 준비모임을 열고 국내 다른 협동조합들의 활동, 국외 대안지식운동 사례 등을 공유했다. 조만간 조합 설립을 위한 사업계획, 발기인대회 등에 대한 의논에 들어가기로 했다. 김 명예교수는 “지식의 공동 생산과 공유, 집단지성의 향유를 목적으로 한 협동조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나메기 지식순환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조합이 주체가 돼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설립할 계획이다.

 

올 하반기 시범강좌 형식으로 시작해 내년부터는 본격 강좌를 개설하는 것이 목표다. 대학교수, 연구자들은 전문지식을 제공하고, 시민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김 명예교수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문화예술 등 수준 높은 교양교육을 2년 과정으로 제공하는 대학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의 인문학 박사과정 연구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인문(학) 협동조합’(가칭)의 준비모임도 지난달 30일 2차 모임을 가졌다. 준비모임에 참여하는 임태훈 성공회대 외래 교수(교양학부)는 “대학이 자본의 논리에 종속돼가면서 순수학문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연구자들이 대학 안에 정규직 교수/강사로 채용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줄어들고 있다.”며 “연구자들이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하고 연구와 강의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근거지로 인문(학) 협동조합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하반기 중에 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임 교수는 “농촌 폐교 등을 활용하고 지역민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도농인문학을 비롯해 실버인문학(Silver, 그러니까 노인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인문학인 듯함 - 옮긴이), 인문학 대안화폐, 쌍방향 웹인문사전 등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설립된 연구 협동조합도 있다. 지난달 22일 ‘급진 민주주의 연구조합 데모스’(데모스)는 서울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데모스는 2008년 성공회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된 ‘급진 민주주의 연구모임’으로 시작해 5년여 활동 끝에 조합으로 전환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를 비롯해 18명의 교수, 대학원생 등이 조합원으로 참여했다. 장훈교 데모스 운영위원장(성공회대 박사과정 수료)은 “30~40대 연구자들에게는 생계도 중요한데, 대학이나 정부 지원 프로젝트에 의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제도권 밖에서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인문학 연구자들이 ‘데모/프레카리아트/공공지식인’이라는 주제로 집담회(集談會.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 - 옮긴이)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순수학문 연구자들이 점점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계급)’화하는 현상과 대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고병권 수유너머아르(R) 연구원은 “대학은 서양에서 13세기까지 길드(조합)였다. 대학이 자본에 종속되면서 대학 이전의 역사로 가는 것 같다. 지식인들이 대학 바깥에서 살아내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협동조합들은 수유너머, 아프콤 등 기존의 대안적 연구모임들의 활동과 비슷하지만, 대중강연, 출판, 교육사업 등을 통한 경제적 자립 방안에 대해 좀더 고민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인문(학) 협동조합 준비에 관여하고 있는 권명아 동아대 교수(국문학)는 “연구자들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그러면서도 구성원들간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제도를 찾다 보니 협동조합을 추진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나메기 지식순환 협동조합 준비에 참여하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영상학)는 “협동조합은 적극적인 참여를 다짐하는 조합원들을 확보하고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형태의 모임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협동조합은 공동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합원들의 출자로 자금을 마련하고, 조합원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는 민주적 운영방식의 사업체로, 세계적으로 일자리 창출과 지속 가능한 성장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5명 이상의 발기인만 있으면 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한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서울시가 협동조합도시를 선언하는 등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협동조합이 생겨나고 있다.

 

-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한겨레』서기 2013년 4월 3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