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단편]진짜 도둑과 녹슨 주석

개마두리 2013. 11. 11. 12:21

까마득히 먼 옛날, 내세울 것 없는 자그마한 나라에 파디샤(이슬람 국가에서 임금이나 지배자를 일컫는 말 - 인용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무척 애지중지하는 보물 창고가 하나 있었다. 창고 안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보관되어 있었다. 파디샤를 비롯한 국민들은 조상이 남겨 준 이 보물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신세지만, 우리 조상들이 이렇듯 귀한 보물을 물려주었잖아. 그게 어디라고 …….”

 

사람들은 이렇게 애써 마음을 달래며 시름을 잊곤 했다.

 

조상들이 물려준 그 보물은 이미 한두 사람의 소유가 아니었다. 국민 모두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나라 국민 모두에게 그 귀중한 물건을 자랑스러워할 권리가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것을 지키는 데 온몸과 마음을 바쳤다.

 

온 국민의 보물을 지키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가 바로 파디샤의 보물 창고였다. 수비병들은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은 채 창고를 지켰다. 보물 창고 근처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했다.

 

파디샤와 총리, 그리고 각 부처의 대신 등 지위 높은 사람들은 해마다 조상이 남겨 준 이 보물을 잘 지키겠다고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맹세를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파디샤의 마음속에 국민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지키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파디샤는 상자 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그 보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보물 창고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철통같은 경비를 선다 해도 수비병들이 감히 파디샤를 막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디샤와 총리, 그리고 대신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창고에 들어가 보물 상자가 제자리에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날 파디샤는 보물 상자를 직접 점검했다. 이 상자는 마흔 개의 방을 지나 마흔한 번째 방에 있었다. 파디샤는 마흔 개의 방문을 모두 여닫은 다음 마흔한 번째 방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도 마흔 개의 상자를 모두 열어 보고 난 뒤에야 진짜 상자를 열 수 있었다. 드디어 눈앞에 마주한 마흔한 번째 상자! 그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지키고 있었던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상자 안에는 지금껏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휘황찬란한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황금도 아니고 백금(白金. 회백색을 띄는 귀금속 - 인용자)도 아니었다. 물론 은은 더더욱 아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진귀한 보석을 보는 순간, 파디샤는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이건 내가 가져야지. 내가 훔쳐 간들 누가 알겠어?’

 

파디샤는 마치 태양에서 방금 떼어낸 것처럼 반짝반짝 타오르고 있는 그 성스런 보석을 호주머니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만에 하나, 내가 훔쳤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

 

순간 두려움이 더럭 일었다.

 

‘이걸 가져가는 대신 내가 가진 루비랑 자개, 에메랄드, 진주,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백금을 넣어 두자. 그러면 누군가가 이 상자를 열어 본다 해도 진짜 보물이 사라져 버렸다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파디샤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보석을 바꿔치기한 뒤 마흔 한 개의 상자를 닫고 마흔 한 개의 문을 걸어 잠근 다음 보물 창고에서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짐짓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행여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파디샤는 자신이 한 일을 어느 누구도 알아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하던 (그 보물을 잘 지키겠다는) 맹세 의식을 1년에 두 번으로 늘렸다. 해마다 두 차례씩 광장에 모여 그도, 국민들도 조상이 물려준 그 성스런 보물을 몸과 마음을 바쳐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총리는 아주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1년에 한 번씩 하던 맹세를 왜 갑자기 두 번씩으로 늘렸을까?’

 

총리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가 수년 동안 지켜 온 보물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총리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보물 창고로 들어가 보았다. 마흔 한 번째 방을 지나 마흔 한 번째 상자를 연 다음 드디어 그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값비싼 귀금속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백금이었다. 파디샤가 진짜 보물을 도둑질하고 대신 넣어둔 것이었다. 그 아름답고 진귀한 보석을 보고 나자 총리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다.

 

‘이건 내가 가져야지. 대신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금을 넣어 두어야겠군.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뭘. 보물이 어떤 건지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혹시라도 나중에 누군가 이 상자를 열어 본다 해도 원래가 이것이라고 믿을 테지.’

 

총리는 곧장 마음먹은 대로 행동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한 일이 들통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떨었다. 결국 그는 파디샤에게 청을 넣어(간청하여 - 인용자), 1년에 두 번으로 늘렸던 맹세 의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번으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대신(大臣) 가운데도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었다.

 

‘지금까지 1년에 두 번 하던 맹세 의식을 갑작스레 네 번으로 늘린 까닭이 뭘까?’

 

그는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 또한 어느 누구의 허락 없이도 보물 창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곧장 창고로 향했다. 마흔한 개의 방을 지나 마흔한 번째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금이 들어 있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내가 갖고 대신 은(銀)을 넣어 두어야지. 그렇게 한다 한들 그 누가 무슨 재주로 알겠어?’

 

대신은 자신의 생각을 곧 실행에 옮겼다. 그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 역시 자신의 도둑질이 들통나지 않도록 묘안을 짜냈다. 국민들에게 조상들이 물려준 진귀한 보물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1년에 네 번씩 행하던 맹세 의식을 열두 번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달마다 광장에 모여 다짐을 했다. 최후에 살아남은 한 사람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남아 있을 때까지 그 소중한 보물을 지키자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그 나라의 수비대장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맹세 의식을 거행하는 것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뭔가가 있어. 아무래도 그 성스런 보물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그는 마흔 한 개의 방을 지나, 마흔 한 번째의 상자를 열었다. 그 역시 조상이 물려주었다는 그 보물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걸 갖고, 대신 청동(靑銅)을 넣어 두어야지(청동은 땅에 묻힌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녹슬었을 때에만 검푸르게 보이고, 원래는 황금처럼 노랗고 빛이 나기 때문이다 - 인용자). 설마 들키기야 하겠어?’

 

그도 곧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두려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도둑질이 발각될까 봐 겁이 난 나머지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 그는 자신이 그 보물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하던 맹세 의식을 1주일에 한 번씩 하자고 건의했다.

 

그런데 보물 창고를 지키는 수비병 역시 눈치가 몹시 빠른 사람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왜 1주일에 한 번씩 맹세를 하는 거지? 그래야 할 까닭이라도 있는 건가? 보물 창고에 있는 그 보물을 한번 봐야겠어.’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마흔 개의 방을 지나 마흔한 번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서 반짝이는 청동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걸 가져야지. 대신 쇠를 넣어 두면 누가 알겠어?’

 

수비병은 마음먹은 대로 실행했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영 불안했다. 그는 보물 창고를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날마다 홀로 맹세 의식을 치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국민 가운데 한 사람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온 국민이, 조상들이 물려준 고귀한 보물을 몸과 마음을 다해 지키겠노라고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그 보물은 오늘도 보물 창고에 아주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도대체 그것이 어떤 물건일까요? 우리는 그 보물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 겹겹의 방과 층층의 상자를 열고 조상들이 물려준 보물이 무엇인지, 우리가 지키고 있는 보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이 말은 즉각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파디샤를 비롯해 차례로 보물을 훔친 사람들 모두가 불안에 휩싸였다. 진짜 보물 대신 그 자리에 가짜를 놓아두었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 혼자만 그 속임수를 썼다고 생각하며 끙끙댔다. 그들은 자신의 도둑질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봐 두려워 한없이 마음을 졸였다.

 

그러다 결국은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 보자고 주장한 사람을 몰래 붙잡아서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 씌웠다.

 

“세상에!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신성한 보물을 어디 감히 너 따위가 보자고 하느냐?”

 

그들은 그에게 불경스런 죄를 지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국민들도 성스러운 보물을 모독했다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을 공격했다. 하마터면 그는 몰매를 맞을 뻔했다.

 

파디샤가 강력하게 선언했다.

 

“법에 따라 저 사람에게 죄에 합당한 중벌을 내리겠다.”

 

그를 처벌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법령을 발표하고 특별 재판을 열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옮아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직접 봐야겠어.’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짐짓 내색하지 않았다. 섣불리 떠들었다가 먼젓번 사람처럼 죽임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몰래 보물 창고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파디샤와 총리, 대신들을 포함한 다른 도둑들이 자신들이 한 짓이 드러나지 않도록 예전보다 훨씬 더 삼엄하게 창고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긴 끝에 어렵사리 보물 창고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온 국민에게 그 성스런 보물을 보여 주겠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오다가 그만 창고를 지키는 수비병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그의 손에는 녹슨 주석이 들려 있었다. 성스런 보물을 마지막으로 훔쳤던 사람이 그 자리에 대신 놓아두었던 것이었다.

 

수비병은 그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주석을 보고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건 성스런 보물이 아니야!”

 

수비 대장도 이렇게 외쳤다.

 

“이게 아니야!”

 

대신도 “이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파디샤의 차례가 될 때까지 모두들 “이게 아니야!”를 연달아 외쳤다.

 

손에 녹슨 주석을 들고 있던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이것이 성스런 보물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십니까? 이게 아니라면 대체 어떤 거지요?”

 

그의 예리한 질문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모두들 신성한 보물 대신 자신들이 놓아두었던 물건들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녹슨 주석을 들고 나온 사람을 목 졸라 죽인 다음,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마흔 한 번째의 상자를 닫고 마흔 한 개의 방문을 잠갔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자, 그들은 성스런 물건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법령을 선포했다. 이 법령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조상들이 남겨 준 보물을 지키기 위해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 맹세를 해야 했다. 이 맹세를 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성스런 보물이 거듭해서 도둑을 맞은 끝에, 결국에는 녹슨 주석으로 둔갑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개가 남긴 한마디』(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이종균 그림, 푸른숲 펴냄, 서기 2008년)에서

 

* 인용자의 말 : ‘우리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라는 것도 이 이야기에 나오는 녹슨 주석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짜 보석(전통과 문화가 있어야 할 필요성 또는 그 시대의 상황)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그것이 점점 값어치가 떨어지는 귀금속들(시대와 상황에 맞지 않는 허례허식)으로 바뀌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녹슨 주석(불필요악)이 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곳에서는 아랫사람들에게 강요되는 덕목(예컨대 ‘국산품 애용’이라던가)이 윗사람들에게는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이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조상의 보물을 훔치거나 보면 안 된다.’는 법이 “국민”에게만 적용되었지 그 “보물”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듯이 말이다.

 

혹시 우리는 주석을 보석이라고 잘못 알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지킬 가치가 없는 것을 마흔 한 개의 문과 마흔 한 개의 상자에 집어넣고 자물쇠를 채워서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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