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역사)

▷◁세속오계는 불교가 아닌 신선교 전통

개마두리 2015. 11. 3. 21:40

 

우리(한국 - 옮긴이)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거나 숨기는 것들은 정말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감춰진 수많은 진실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신선교의 전통이다. 어쩌면, 신선교의 진실을 숨기는 것만큼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풍류도(風流道)나 선교(仙敎)라고도 불리는 신선교는 한민족(배달민족 - 옮긴이) 고유의 신앙 체계다. 신선교는 초월적 존재인 신선이 되기 위해 자신을 수행하는 종교다. 신선은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이룬 상태다.


신선교 의식이 산에서 거행되는 것은, (옛날 사람들에게 - 옮긴이) 산이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상징적 장소라고 인식됐기 때문이다. 흔히들 (신선교/선교를 - 옮긴이) 도교와 혼동하지만 (둘은 엄연히 - 옮긴이) 별개다. 도교에도 신선 사상이 있지만, 도교는 중국에서 (장각과 장로와 우길에 의해 - 옮긴이) 생긴 것이다. 이에 비해 신선교는 한국에서 생겼다.


중국 도교는 노자(老子) 같은 존재를 자신들의 기원으로 인정하지만(그러나 사상으로서의 도가는 춘추시대의 이이[노자]에 의해 생겨나 전국시대의 장주[장자]에 의해 다듬어졌어도, 종교로서의 도교는 그보다 후대인 동한[후한] 말기의 장각/장로가 만들어냈다 - 옮긴이), 한국 신선교는 환인(桓因)이나 단군을 자신들의 기원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도교와 신선교는 서로 별개다. 그렇기 때문에 신선교를 한국식 도교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민족의 전통 신앙은 신선교가 아니라 불교다. 물론 (한국의 - 옮긴이) 국사 교과서에서도 불교가 외래종교라는 점은 소개된다. 하지만 불교가 오래 전에 전파되어 한민족의 신앙생활에 정착했기 때문에, 교과서를 배우는 학생들은 불교가 민족의 전통 종교라고 인식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 교과서에서 신선교에 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국사』에서는 “삼국에는 도교도 전래되어 산천 숭배나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환영을 받았다.”고 함으로써 신선교의 전통을 살짝 언급하기는 했다. 하지만 신선 ‘사상’이라는 우회적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학생 독자들로서는 신선교가 한국 전통의 종교라는 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또 신선교와 도교를 뒤섞은 채 서술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신선교에 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과서에서는 신선교의 전통이 사실상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의 중요성은 여전하지만, 고대일수록 종교의 위상은 훨씬 더 중요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치 지배자와 종교 지배자의 차이는 가까워진다. 그래서 두 가지를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또 종교를 빼놓고는 사회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을 소급하면 할수록 종교의 중요성은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선교를 이해하지 않고는 고대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신선교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조선, 그리고 우리 고대 역사를 효과적으로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신선교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이처럼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신선교만 제대로 이해해도 우리 역사의 본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적 전통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신선교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반 역사서는 물론이고 교과서에서도 신선교를 중국 도교의 산물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신선교 문화가 외래 문화로 둔갑되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우리가 불교적 전통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실상은 불교가 아니라 신선교와 가까운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중 하나가,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일러줬다고 하는 세속오계다. 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 다섯 가지를 내용으로 하는 세속오계를, 우리는 불교 승려인 원광법사가 화랑도의 계율로 삼았다고 배웠다.『중학교 국사』에서는 “화랑들은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 5계(세속오계 - 인용자 주)를 지키며, 산천을 널리 돌아다니면서 무술과 도의를 닦고, 전쟁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웠다.”고 했다.


그런데 세속오계가 불교 승려 원광법사의 ‘작품’이라는 근거가 과연 있을까? 임전무퇴나 살생유택 같은 계율을 과연 불교 승려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까? 불교에는 불살생계(不殺生戒)라는 계율이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이다. 그러나 임전무퇴니 살생유택이니 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살상을 전제로 하는 계율이다. 살생유택은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뜻일 뿐, 살생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 것을 과연 불교 승려가 만들 수 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세속오계가 불교 승려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속오계가 원광법사의 작품이라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삼국사기』다.『삼국사기』귀산(貴山) 열전에는 신라 관료인 귀산이 추항(箒項)이란 친구와 함께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원광법사는 이들에게 “금유세속오계今有世俗五戒”라는 말을 시작으로 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말의 원문인 ‘금유세속오계’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지금 세속오계가 있다.”로 번역하기보다는, “지금 세속에는 오계가 있다.”로 번역하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이 말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원광법사가 이 오계의 창안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세속에는 오계가 있다.”는 말은 그 당시에 이미 오계가 사회적으로 규범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오계를 원광법사가 일러줬다는 기존의 인식이 잘못됐다는 점이『삼국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삼국사기』를 근거로 원광법사와 오계를 연관시켰지만, 실제로『삼국사기』안에는 그에 관한 근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비록 ‘불살생’이 원칙이라고는 하지만, 여러 나라의 불교신자들이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고기를 먹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원광법사가 현실과 타협하고 ‘살생유택’을 주장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임전무퇴라는 가르침은 원광법사가 전쟁이 계속되는 삼국시대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원광이 “불가의 오계를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거나, “지금 이 자리에서 오계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고, “지금 세속에는 오계가 있다.”고 말한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세속”과 “있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광법사는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세속”의 가르침으로서 “지금” 있는 것을 말해준 것이지, 없던 가르침을 새로 만들거나 불교의 가르침을 늘어놓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 때문에 김종성 선생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그렇다면, 오계는 어디서 창안된 것일까? 이것이 불교에서 나온 계율이 아니라는 점은 “세속에는 오계가 있다.”는 원광법사의 말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속한 불교에서 나온 계율이라면 세속을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나 또한 이 말에 동의한다. 만약 오계가 불교의 계율이라면, “지금 불가[佛家. 절이나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사회’를 일컫는 말]에는 오계가 있다.”고 말하지, “지금 세속에는 오계가 있다.”고 말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 옮긴이). 그가 세속을 운운한 것은,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 나온 오계가 세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계가 나온 곳은, 불교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신라 사회를 지배한 종교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종교는 신선교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하지만 불교 승려가 ‘세속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가르침이라면 유교나 도교도 있지 않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나도 이 글을 처음 읽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라[사군이충].”는 가르침이나 “어버이를 효로써 모시라[사친이효].”는 가르침이나 “믿음을 바탕으로 벗을 사귀라[교우이신].”는 가르침을 유교적인 것이라고 보더라도, 전쟁이나 군사나 무인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고 그것들을 부정하거나 깎아내린 유교가 “[일단] 싸움에 임하면 물러서지 마라[임전무퇴].”고 가르쳤을 리는 없고, 유교는 불교와는 달리 육식이나 적군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에, 유가[儒家]에 속한 사람들이 살인이나 [도살을 포함한] 살생에 어느 정도 제한을 두는 가르침인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일에는 가림이 있다[살생유택].”고 말할 리도 없다. 그러므로 오계는 유교와 비슷해 보이는 대목은 있지만, 유가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덧붙이자면 ‘충성’이라는 관념은 유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에도 나타나는 개념이다. 그러니 ‘사군이충’을 꼭 유교에 뿌리를 둔 계율로 볼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도교는 어떨까? 도교는 불로장생이나 무위자연을 강조하는 종교다. 그리고 도가[道家]를 받들던 사람들이나 도교 신자들은 유가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리 현실세계의 문제나 정치를 다룬 복잡한 이론을 만들지 않았고, 불교처럼 엄격한 불살생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또한 도교 신자들은 무[武]나 전쟁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도사들이 사군이충이나 살생유택이나 임전무퇴를 강조했을 리는 없다. 오계에도 불로장생이나 무위자연과 관련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오계는 도가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도 없다.


[역사를 살펴보면 불교는 늘 도교와 대립하고 갈등했으므로, 불교 승려인 원광법사가 굳이 도교의 이론을 가져와서 화랑들을 가르쳤을 리도 없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이 때문에 오계가 불교/유교/도교에 속하지 않는, 배달민족 고유의 믿음인 선교[신선교]에 속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옮긴이)  


이 점은 최치원이 난랑이란 화랑을 추모할 목적으로 작성한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도 나타난다.


“나라에 현묘(玄妙. 도리나 기예가 깊어서 매우 미묘함 - 옮긴이)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부른다. 이 교를 만든 기원은『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불교 같은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신라인의 삶을 지배한 종교는 풍류도 즉 신선교였다. 이것의 기원이 신선 선仙자가 들어간『선사』라는 제목의 책에 실려 있다는 데서도, 신라인들을 지배한 종교가 신선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선교가 신라의 세속을 지배한 보편적인 종교였고, 이 종교 수행자들의 계율이 원광법사가 말한 오계였던 것이다. 우리는 오계를 불교와 관련시켜 이해했지만, 실제로 이것은 신선교의 계율이었던 것이다.


신선교와 관련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 다른 문화로 둔갑된 사례가 많다는 점은, 우리가 불교 승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신선교 승려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라 향가 중에 <제망매가(祭亡妹歌)>란 것이 있다. 죽은 누이를 제사지내는 노래라는 뜻인 <제망매가>를 지은 사람은 흔히 불교 승려로 알려진 월명사(月明師)란 인물이다. 그런데 8세기 때 사람인 월명사는 실은 신선교 성직자였다. 이 점에 대한 증거는 명확한 편이다.


『삼국유사』「감통」편에 따르면, 경덕왕(景德王) 19년 4월 1일(양력 760년 4월 20일) 신라에서 태양이 두 개 출현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두 개의 태양이 관측된 이때의 현상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오늘날에 발견되는 유사한 현상을 근거로 추론은 할 수 있다. 2011년 4월과 5월에 강원도 대관령 상공에서 두 개의 해가 관측된 적이 있다. 이것을 두고 강원지방기상청 대관령기상대에서는 대기 중에 떠 있는 미세한 얼음 조각이 태양빛에 굴절 반사되어 보이는 ‘환일(幻日. “허깨비 해”/“가짜 해” - 옮긴이) 현상’이라고 말했다. 대기 중의 얼음이 태양빛에 굴절 반사되는 바람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2015년 1월 경상북도 청송에서도 발견됐다. 같은 시기에 몽골에서는 세 개의 태양이 관측되기도 했다.


현대 과학에서는 이것을 환일 현상으로 풀이하지만, 이런 지식이 없었던 경덕왕 대의 신라인들은 두 개의 태양을 보고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천문관측을 담당하는 일관(日官)은 불교 승려의 도움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자고 왕에게 건의했다. 이 건의에 따라 경덕왕은 월명사에게 도움을 구했다. 혼란을 수습하는 행사를 위해 불교 노래를 지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러자 월명사는 “저는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향가나 알 뿐이지, 불교 음악 같은 것에는 서툽니다.”라고 대답했다. 즉 자신이 국선도 즉 신선교에 속해 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오로지 신선교에만 속한 것은 또 아니었다. 불교 음악을 전혀 못한다고 하지 않고 불교 음악에 서툴다고 했다. 좀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월명사가 신선교를 주로 (신봉 - 옮긴이) 하면서 불교도 함께 (신봉 - 옮긴이) 하는 복합적인 종교인이었음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불교 승려를 겸한 신선교 성직자였던 것이다.


(무교[巫敎]의 성직자인 무당들이 무교 고유의 신들 뿐만 아니라 예수나 석가모니나 공구[공자]도 신으로 모시고 굿을 하는 것을 이에 빗댈 수 있을까? 아니면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가 ‘귀신들[神]과 붓다[佛]를 함께 모시는 일’, 그러니까 ‘신불습합’을 내세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 옮긴이)  


이런 모습을 우리는 고려 시대의 유명한 승려인 묘청(妙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묘청은 북벌을 주장하며 혁명을 일으켰다가 김부식에게 패배한 승려다(묘청과 김부식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서 설명 하겠다. 나는 김선생과는 달리 이 문제만큼은 묘청이 무모했고 김부식의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내 글에서 밝히겠다 - 옮긴이).


『고려사』「묘청 열전」에 따르면, 그는 평양에 팔성당이란 신선교 건물을 세운 뒤에, 그곳에 여덟 선인(仙人)인 ‘팔선’의 초상화를 안치했다. 불교 그림이 아닌 신선들의 그림을 안치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신선교 승려의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신선교나 화랑도를 하면서 불교 승려를 겸한 사례는 원광법사 뿐 아니라 전밀(轉密)/안상(安詳)/범교(範敎)/원효(元曉)/도선(道詵)/서산(西山)/사명(四溟)대사 같은 유명한 승려들한테서도 발견된다.


신선교와 관련시키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사례로 고구려 조의선인, 신라 화랑도, 고려 재가화상 등을 들 수 있다. 조의선인/화랑/재가화상은 모두 신선교의 전통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였다(이 말대로라면 신선교는 고조선 때부터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의선인과 재가화상이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옮긴이). 조의선인은 이름에서부터 신선교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화랑이 신선교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충분히 밝혔다(단, 나는 화랑이 원래 신선교와는 별개였고, 오계를 받아들인 다음에야 선교와 이어졌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 까닭은 나중에 따로 쓸 글에서 밝히겠다 - 옮긴이). 다음은 재가화상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단의 간부인 서긍(徐兢)의『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재가화상은 평상시에는 종교 수행자의 모습을 띠다가 비상시에는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검은 비단으로 된 허리띠를 둘렀다. 이 때문에 이들은 고구려 조의선인의 후예로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신선교와 관련시키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화랑이 사라지고 나서 재가화상이 나타난 것이, 고려의 지배층이 신라와 관련된 것을 부정하고 재가화상을 새로 두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화랑이 재가화상으로 이름만 바꾼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도저도 아니면 제 3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데, 고려 조정이 화랑을 부정한 대신, - 고구려의 뒤를 잇겠다는 뜻으로 고려라는 이름을 골랐듯이 - 조의선인의 뒤를 잇는 재가화상을 만든 것은 아닌지.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연구해야 한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은 “하지만 신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221년 동안 고구려와 관련된 전통이 부정되었을 텐데, 왕건이 어떻게 조의선인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었겠느냐?”고 물을 텐데, 나는 고구려라는 이름이 220년이 흐른 뒤에 되살아날 수 있었다면 조의선인이라는 제도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하겠다.


아니면 고구려 유민이 세웠고, 고구려의 뒤를 이었으므로 신라 땅에 살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과는 달리 고구려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었던 발해 사람들이 후삼국 시대에 남쪽으로 건너오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조의선인 제도를 고려 사람들에게 전했고, 고려 조정이 이를 다듬어 재가화상 제도를 만든 것은 아닌지.


이 모든 것은 가설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히 추리해서 주장하는 바이다 - 옮긴이)


조의선인/화랑/재가화상 같은 신선교 수행자들은 한민족의 국난 극복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런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발견된다.『고려사』최영(崔瑩) 열전에 따르면, 최영은 “당태종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우리나라가 승군 3만 명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파했다.”고 말했다. 고구려에서 승군이라 할 만한 존재는 조의선인 군대였다. 최영의 말은, 연개소문(淵蓋蘇文)과 양만춘(楊萬春) 등이 당태종의 군대를 격퇴할 당시에 고구려군의 주력이 되어 승리를 얻어낸 장본인이 바로 조의선인 부대였다는 진술이다.


『고려도경』에서는 고려가 거란족 요나라의 침공을 격퇴한 것은 재가화상들의 참전 덕분이라고 말했다. “전에 거란이 고려에게 패배한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라고 한다.”고 서긍은 말했다. 이것은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거란 군대를 격퇴할 당시 승리의 주축을 이룬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문맥을 볼 때, 서긍은 이 이야기를 고려 사람들에게 들은 듯하다. 고려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재가화상들의 참전으로 거란족을 물리쳤다는 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고려사』김경손(金慶孫) 열전에는, 항상 검정 옷을 입고 다니는 수행자 김경손이 열두 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몽골군 대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서 몽골군을 격퇴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려 조의선인의 전통을 이어받은 재가화상들이 세계 최강 몽골과의 전투에서 초인적인 전투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종교적 수행자들이 비상시에 나라를 지키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7년 전쟁 - 옮긴이) 때 사명대사 같은 이들의 활약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정부의 집중적 탄압 때문에 신선교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됐지만, 우리는 조선 시대 지배층은 선비들 사이에서도 신선교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선비들의 머릿속에는 공자/맹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예부터 이어져온 신선 사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점은 선비들의 시나 대화에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선교의 전통을 빼놓으면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문화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런 점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종교를 빼놓고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역사 교과서에 담긴 것은 알맹이 없는 껍질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출처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김종성 지음, (주)위즈덤하우스 펴냄, 서기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