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무도(無道)한 나라, 서진(西晉)의 자멸사(自滅史) - 『 서진 흥망사 강의 』 를 읽고

개마두리 2024. 3. 25. 22:16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흔히 삼국지 라고 불리는) 는 우리나라는 물론이오, //일 삼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문학작품일 것이다.

 

필자(이 글을 쓰신 분인 ‘cipo2094’ 옮긴이 개마두리. 아래 옮긴이’) 또한, 어린 시절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 고우영 삼국지 를 닳고 닳을 정도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실제 삼국시대가 (서기 옮긴이) 280년 서진의 천하통일로 막을 내리는 반면, 문학작품 삼국지에서는 삼국시대의 중기에 해당하는 제갈량의 북벌과 그의 요절(234)까지만 자세히 다룰 뿐, 삼국지의 주연들이 모두 퇴장한 중, 후반부의 역사는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다.

 

따라서 많은 독자들은 소설 삼국지에선 전혀(조금도 옮긴이) 등장하지 않던, ‘서진(西晉)’이라는 나라에 의해 뜬금없이 통일이 성립되는 삼국지 후반부에 대해 의아함과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문장에서 불구하고는 빼야 배달말의 문법/어법에 맞는 문장이 된다 옮긴이) 우리나라에는 서진의 흥망사를 제대로 다루는 역사서가 출간된 적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독자들의 오랜 지적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책이 등장했으니 바로 난카이 대학의 쑨리췬 교수가 저술한 서진 흥망사 강의 이다. 본서는 중국의 인문학 토크쇼인 백가강단(百家講壇) 에서 쑨리췬 교수가 했던 서진사 강의를 기록하여 책으로 출간한 작품이다.

 

중국 고대사의 권위자가 일반 청중들의 수준에 맞춰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지금까지의 학문적 성과를 잘 반영하였기에 서진의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딱 들어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서(本書. 이 책 옮긴이)에서 묘사하는(그리는 옮긴이) 서진은 바로 무도(無道)한 나라. 다른 통일왕조와는 달리, 서진 황실과 지배층은 오로지 권력과 부에 대한 욕구만 있을 뿐, 국가 통치에 필요한 뚜렷한 사상이나 가치관, 목표 등이 전무(全無. 하나도 없음 옮긴이)했다. 이는 서진의 지배층이 (오랜 전란으로 인해 무너진 기존의 사상과 가치관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 가치관을 내세워 백성들의 자발적인 충성과 복종을 끌어내기보다, 탄압과 권모술수를 통해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서진 지배층은 여러 유혹에 대한 백신역할(구실 옮긴이)을 할 사상적, 도덕적 가치관이나 기준이 없는 상태에 놓여있었으며, 조금의 유혹에도 쉽게 타락해버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건국 초기엔 천하통일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조정과 지배층의 기강이 유지되었으며, 지나친 방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통일(삼국 통일/제하[諸夏] 통일 옮긴이)’을 이룩하여 사정이 바뀌자, 훗날 서진의 자멸을 가져올 3가지의 문제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첫째, 지배층의 배금주의(拜金主義)와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 - 유일한 목표였던 천하통일을 달성하자, 긴장의 끈을 놓은 채, ‘승자의 혼미(昏迷 정신이 헛갈리고 흐리멍덩함, 또는 그런 상태 옮긴이)’에 거나하게 취해버린, 서진 지배층의 정신적 공백을 채운 것은 바로 사치와 향락이었다.

 

이러한 지배층의 도덕적 방종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졸부 귀족인 석숭(石崇)과 왕개(王愷)의 사치 경쟁이었다. 이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얻은 부를 세상에 자랑하고자, 터무니없는 사치 경쟁을 벌여 세간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더 가관인 것은 지배층의 방종을 억눌러야 할 책임을 지닌 진 무제 사마염(司馬炎)마저도 이들을 말리긴커녕, 오히려 사치 경쟁에 직접 끼어들어 이를 부추겼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황제까지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자, 지배층의 타락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는 귀족들의 술자리에서 손님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손님을 접대하던 시녀를 주인이 그 자리에서 참살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 뚜렷한 통치 이념과 가치관이 부재했던 서진의 지배층은, ‘정신적 공백배금주의황금만능주의로 채운 채, 사리사욕만을 챙겼으며,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백성들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만행을 건국 초기부터 자행해 왔던 것이다.

 

둘째, 언론 자유 탄압으로 인한 자정 능력의 상실 - 서진 지배층의 만행에 대해, 당대부터 세간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서진 정권은 (건국 이전인) 사마의(서진을 세운 사마염의 할아버지이자, 제갈량의 맞수 옮긴이) 시절부터 정권에 조금이라도 비판을 가하는 자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지식인층은 사마씨 정권의 패악에 대해 내심 불만만 품고 있을 뿐,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출했다간, 순식간에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요, 가족과 친지의 목숨마저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실망한 일부 지식인들은 더러운 속세를 떠나 자연에 은둔한 채, 형이상학적인 학문 논쟁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들의 대표주자가 바로 죽림칠현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언론의 역할인) ‘사회 비판과 정화에 앞장서야 할 지식인들이 은둔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서진 정권은 자정 능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셋째, 이민족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서 비롯된 민족갈등의 심화 - 서진 정권은 가치관의 공백에 따른 도덕적 방종 외에도 큰 문제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배타적인 민족 정책에서 비롯된 민족갈등 문제였다.

 

후한 말, 기후변화로 인해 유목 생활이 어려워진 북방 이민족들은, 한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몽골초원에서 옮긴이) 관중과 중원으로 대거 이주하였고,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족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아오고 있었다.

 

그 결과, 서진 시기에 이르면 이민족들은 혈통만 다를 뿐, (한족과 마찬가지로) 농업에 종사하는 정주민족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단, 이에 대해서는 다른 목소리도 있다. 뵈 족[‘티베트’] 계통/중앙아시아인/튀르크계/몽골계 민족들이 제하[諸夏]의 남북조시대 말기까지 계속 자신들의 말이나 음식문화나 장례식 같은 전통문화를 고집했다는 연구결과를 담은 책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연구결과가 옳다면, 이 글에 나오는 “이민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되, “한족[漢族]”의 문화도 받아들여서 살고 있었고, 적어도 동한/위나라/서진 사회의 공식 석상에서는 “한족”의 문화와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살고 있었던 사람들’로 봐야 할 것이다 – 옮긴이).

 

따라서 서진 정권이 조그마한 포용력이라도 발휘했더라면, 이민족들은 큰 문제 없이 서진 사회에 융화되어, 평범한 백성의 일원으로 살아갔을 가능성이 컸다(한 예로, 훈나[한자로는 흉노(匈奴)”인 겨레의 바른 이름]족 출신으로서 훈나 족이 세운 작은 왕국 동한/위나라/서진의 속국 에서 살던 사람은, 위나라 말 ~ 서진 초에 한족들이 준 군관 벼슬을 살았고, 사서삼경을 배워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옮긴이).

 

그러나 서진의 지배층들은 이민족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혐오차별의식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온전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지배층들의 눈에 이민족들은 여전히 무식한 오랑캐에 불과하며, 노예화해야 할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서진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이민족들은 불합리한 세상에 분노하며, 암암리에 서진 체재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서진 왕조를 위협하는 시한폭탄들이 체제 곳곳에 숨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 지배층들은 위험 징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여전히 사치와 향락을 추구했으며, 더 나아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내전(팔왕[8. 그러니까 여덟 임금여덟 제후 : 옮긴이]의 난)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지배층들이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에 돌입하자, 서진 체제에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이민족들이 대거 반란의 기치를 들고 일어났다.

 

한창 서로 죽고 죽이기에 여념이 없던 지배층들은 사방에서 우후죽순 일어나는 이민족 반란군에게 속수무책이었으며, 순식간에 수도 낙양이 반란군에게 함락당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위기를 파악한 서진 정권은 수도를 장안으로 이전하고 새로운 황제를 올리는 등,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317, 임시 수도 장안마저도 반란군에게 함락당하자, 서진 정권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마씨 가문의 서진 정권은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하며 위풍당당하게 등장하였으나, 체제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통일된 지 불과 30년 만에 자멸해버리고 말았다.

 

서진 정권 붕괴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것이었으나, 필자가 보기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서진 지배층에게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수적인 확고한 통치 이념과 가치관이 부재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념과 가치관의 부재로 인해 정신적 공백 상태에 빠진 지배층들은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며 백성들의 모범이 되기는커녕, ‘사치와 향락에 절은 채,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치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는 추태를 보였다.

 

이에 실망한 백성들은, 훗날 이민족 반란군의 공격으로 인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오랑캐라고 천시하던 이민족 반란자들에게 자발적인 협력을 제공하였다(아니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들로 달아나, ‘[]’라는 공동체 겸 마을을 만들어 서진 조정/이민족들을 피해 숨어 살든가 옮긴이). 이처럼 물 빠진 어항 속의 물고기 신세가 된 서진 정권이 눈 깜짝할 새에 무너져버린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cipo2094’ 님이 보시기에 옮긴이) 이러한 서진 정권과 정반대의 사례가 중국사에 있으니, 바로 조씨 가문의 송나라(중세시대에 세워진 북송[北宋]/남송[南宋] 왕조 옮긴이). 비록 송나라는 문치주의에 의한 군사력 약화 때문에 저평가되는 측면이 강하나, 군사력 이외의 부문에서는,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선진적인 면모를 자랑했다. 송 왕조는 통일 제국 중 가장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인 서진 정권과 정반대되는 정책을 펼쳤다.

 

첫째, 확고한 통치 이념이자 가치관인 문치주의에 따른 안정적인 정국 운영 -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당말(2 당 왕조 말기 옮긴이)/오대십국의 혼란이 환관과 무신들의 득세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조광윤은 과거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문신의 발언권을 높여줌으로써, 문신의 위신을 강화하고, 장차 그들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가 도입한 것이 바로 문치주의였다.

 

조광윤은 당말/오대십국의 혼란이 통치에 필요한 자질을 결여한 환관과 절도사가 국가를 좌우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앞으로는 지도층에 걸맞은 학식과 실력을 갖춘 문신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할 것을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문치주의의 시작이었다.

 

송의 문치주의는 비록 군사력 약화라는 단점이 있었으나, 이를 충분히 만회할 만큼의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송대에는 충실한 교육을 통해 높은 자질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갖춘 사대부들이 나라를 운영했기 때문에, ([키타이 족/주션 족/몽골인 같은 옮긴이] 유목민의 침략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태평성대가 지속될 수 있었다.

 

실제로 중국 역대 왕조들이 환관이나 외척, 무신의 권력 농단이나 농민 반란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던 반면, 송나라는 (이민족의 외침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권력 농단이나 대규모 농민 반란 등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악용한 채경 일당이 강남 지방을 쥐어짠 나머지, 화가 난 강남 지방 사람들이 방랍을 지도자로 모시고 들고 일어난 적은 있다 옮긴이), 오랜 평화와 안정을 바탕으로 전무후무한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 송 왕조는 제대로 통치 이념, 가치관도 없이 국가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다가 단명한 서진과는 달리 뚜렷한 청사진을 가지고 국가를 체계적,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던 것이다.

 

둘째, 석각유훈(石刻遺訓)’을 통한 언론의 자유보장 송 태조는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 통치의 핵심을 비석에 새겨 후대 황제들에게 유훈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석각유훈이다. 석각유훈은 크게 3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전대 황실인) 시씨 가문을 처벌하지 말고, 잘 대우할 것.

 

- 둘째,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은 죽이지 말 것.

 

- 셋째, 자손 중 이를 어기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

 

조광윤은 석각유훈을 통해 신하들에게 황제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신하가 아무리 불쾌한 이야기를 할지라도, 황제가 이를 이유로(구실삼아 옮긴이) 신하를 처벌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송 대에는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언론의 자유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서)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신하들은 황제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아무 거리낌 없이 비판을 가할 수 있었으며, 황제들도 신하들의 비판을 최대한 겸허히 받아들이고 잘못된 점을 고치고자 하였다.

 

이처럼 송 왕조에서는 군주와 신하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관계가 만들어졌으며, 신하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자 하는 황실을 존경하며 자발적인 충성을 바쳤다.

 

그 결과, 군사력이 약한 송나라가 수차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존폐의 위기에 놓였을 때, 대다수의 신하와 백성들은 외적과 결탁하여 부귀영화를 추구하기보다, 비록 목숨이 위태로울지라도 끝까지 황실에 충성을 바치며 주군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하였다(실제로, 송나라는 금나라에 악착같이 맞서 싸웠으며, 악비와 악가군[岳家軍]이 그 선봉에 섰고, 남송은 몽골제국의 원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마흔 네 해 동안 맞서 싸웠다. 그리고 북송과 남송은 농민봉기나 군사반란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침략 때문에 망했다 옮긴이).

 

이는 오로지 소수 지배층만을 위한 정치를 펼친 결과, 위기의 순간에 신하와 백성들에게 배신당하여, 고립무원에 처했던 서진 정권의 말로와 큰 대비를 이룬다.

 

셋째, 천민계급을 폐지하여 일인지하 만인평등(一人之下萬人平等[한 사람, 그러니까 황제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뜻 : 옮긴이])’을 이룩함. - 서진 정권이 사실상 한족화가 완료된(위에서도 말했듯이, 이건 정확한 평가는 아니다. 이 말은 한족의 문명을 따르면서 오랫동안 한족과 더불어 살았던으로 바꿔야 한다 옮긴이) 이민족들을 끝까지 혐오하며, 배척하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은 데 반해, 송 왕조는 천민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일인지하 만인평등을 이룩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그리고 수/1 당 왕조/무주[武周]/2 당 왕조에도 있던 과거제도를 더 보강하여, 인재를 신분이나 핏줄이 아니라 실력으로 뽑는 관행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2 당 왕조 대까지 있던 귀족제도를 없애고 관료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옮긴이).

 

그 결과, 송나라에서는 능력과 경제력에 따른 차별은 있을지라도, 태생에 대한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하층민이나 이민족들을 노예화하였던 악습도 철폐되었다.

 

이를 통해 송 왕조는 사회의 응집성을 고도로 강화할 수 있었으며, 이는 거란(키타이 옮긴이), 여진(주션 옮긴이), 몽골 등 여러 유목민족이 송나라를 쉴 새 없이 공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송 왕조가 한나라 다음으로 오랜 기간인 319년간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 이민족과 하층민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며, 심지어는 인간으로도 여기지 않던 서진 정권과는 달리, 송 왕조는 다양한 계층과 민족을 동등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사회 안정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진과 송, 양자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중국 대륙을 통일하며 위풍당당하게 등장하였으나, 결말은 천지 차이였다.

 

서진은 전 사회가 올바른 가치관의 부재로 인한 정신적 공백상태에 빠진 채, 원초적인 황금만능주의혐오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자멸해버리고 말았다.

 

반면, 송 왕조는 비록 한/당과 같은 화려한 대외 팽창(내지는 영토 확장 옮긴이)은 없었으나, 확고한 통치 이념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였다.

 

그 결과, (북송과 남송 옮긴이)을 제외한 역대 통일 왕조들이 모두 민중 반란(서진도 한족화된 이민족들의 반란으로 망했다.)으로 멸망한 데 반해, 송 왕조의 대다수 신하와 백성들은 나라가 패망하는 순간까지 황실에 충성을 바쳤다. 이는 상하가 일치단결한 송 왕조가, 애산(厓山)에서 전멸하는 순간까지, 세계(정확히는, 유라시아 옮긴이)를 제패한 몽골군을 상대로 44년 동안이나, 치열한 투쟁을 계속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민중은 고집불통이며, 사리사욕을 채우기만 바빴던 이기적인 지배층에 대해서는 충성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으나,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애로운 통치를 펼쳤던 지배층에겐 자신의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칠 만큼의 헌신을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이 글이 쓰인 해인, 서기 2022년 현재 옮긴이) 대한민국은 서진과 송의 사례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다행히 송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나머지 측면에서 본다면 서진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약간은 지나친 면이 있는) 생각이다.

 

우선, 현재 대한민국 사회, 더 나아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는 사회 전체가 동의할만한 올바른 가치관이 실종된 상태이다.

 

기후변화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지도층은 일치단결하기는커녕, 진보와 보수로 나뉜 채, 모든 것을 흑백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도 자신만의 가치관 없이, 정치인과 유명인들의 주장을 무조건 추종하며,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상대편이 비록 자신과는 다른 이념/가치관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존중하고, 그들과 협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비합리적인 혐오심을 부추기며, 상대편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헛소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같은 정치판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꺼버린 채, 끝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달성하는 데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TV와 유튜브 유명인들은 협동’, ‘화합’, ‘절제’, ‘절약과 같은 덕목을 이야기하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FLEX’욜로로 대표되는) ‘사치낭비를 자행하는 모습을 보이며, 시청자들을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의 늪으로 유혹하고 있다.

 

전 인구의 4~50%에 달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배척하며,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멀지 않은 과거에 이러한 특성을 모두 갖춘 국가가 하나 있었다. 바로 (‘도이칠란트 제 3 제국으로도 불리는 옮긴이) ‘나치독일이다.

 

히틀러는 독일국민들의 정치혐오’, ‘기득권 혐오’, ‘유대인 혐오’, ‘외국인 혐오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다. 그는 독일의 모든 위기상황이 기성 정치인, 유대인, 공산주의자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며, 모든 적대 세력을 적폐로 낙인찍었으며, 자신이 권력을 잡고 이들을 싹 쓸어버린다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 같은 혐오’, ‘차별을 무기로 삼아 권력을 장악한 나치당은 자신들을 독일제국의 부흥을 위해 앞장서는 청렴한 애국자로 포장하였으나, 실상은 독재 권력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이기적인 정치꾼에 불과했다.

 

실제로 히틀러와 괴링을 비롯한 수많은 나치당원은 독일군이 새로운 지역을 점령할 때는 재빨리 부하를 보내 현지의 귀중품을 약탈하는 등 부정축재에 열을 올린 반면, 전쟁 말기, 독일군이 패퇴를 거듭할 시점에는 주민들을 내버려 둔 채, 그 누구보다도 빨리 내빼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그 결과, 나치독일은 겉으로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나 속에선 썩어가는 사과와 다를 바 없었으며, 매우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어느덧 대선이 2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이 글은 대선 전인 서기 2022년에 쓰였다 옮긴이). 송 태조 조광윤처럼 모든 사회 구성원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아량과 국가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확고한 가치관을 가진 지도자가 뽑힐 수 있기를 기원한다. ‘혐오차별’, ‘황금만능주의가 판치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서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이 말씀에는 동의하나, 그렇다고 해서 조광윤과 그 후계자들이 북송/남송 왕조의 국방력을 지나치게 약하게 만든 것까지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뺀 송나라의 나머지 정책만 본받아야 한다 옮긴이).

 

- ‘네이버회원이신 ‘cipo2094(햄스터)’ 님의 글

 

- 출처(원문) :

 

https://blog.naver.com/cipo2094/222646806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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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 4357년 음력 216일에,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서진(西晉)과 같은 말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는 건 아닌가? 지배층의 사치 추구/도덕이 타락한 현실/물질 만능주의 같이, 안 좋은 점은 희한할 정도로 닮았잖아?'하는 생각이 들어 여러모로 착잡하고 오싹한(그리고 한국은 서진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된다.’고 생각하는) 개마두리가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