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참’과 ‘거짓’을 넘어 ‘왜’와 ‘어떻게’로 - 신불(신시)과 단군조선이 인류학과 자연과학과 문명교류사를 만나다

개마두리 2012. 10. 6. 16:10

(이 글은 원래 개천절에 올릴 예정이었는데 미처 그러지 못하고 오늘 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 잉걸)

 

* 문명교류사 : 문화권이나 문명 사이의 교류를 다루는 역사학. 한국에서는 정수일 전(前) 교수가 이를 강조한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지만, 고조선 -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군조선 - 은 한국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줄여서 ‘조선 공화국’. 수도는 평양)의 역사다.『삼국유사』와『제왕운기』에 나오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의심하던 한국 학자들도, 이제는 한국 정부가『국사』교과서에 “고조선은 기원전(BC) 2333년에 세워졌다.”는 말을 집어넣는 것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는다.

 

(참고로 내가 14년 전 교수님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조선 공화국의 여당이자 정부 그 자체인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줄여서 노동당勞動黨]은 42년 전, 그러니까 서기 1970년에 “단군 이야기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속이려고 만들어낸 것이며,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 중심지는 평양이 아닌 요동에 있었다.”고 말해 고조선의 건국연대와 기자조선설을 믿지 않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서기 1994년부터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선언하고,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 아닌 평양이며, 평양의 옛 무덤 가운데 하나를 ‘단군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조선 공화국의 학계는 한국 학계와는 달리 5100년 전부터 단군조선이 세워졌다고 주장하며, 그 중심지도 요령성[랴오닝 성]이나 남[南]몽골이 아니라 대동강 유역, 그러니까 평양 주변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42년 전 노동당이 단군 이야기를 깎아내린 것은 문제지만, 못해도 그 때에는 중심지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냉전이 끝난 뒤 노동당이 단군조선을 인정한 건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건 잘 된 일이지만, 고고학적인 증거와 어긋나는 학설 - 예컨대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학설과 고조선이 4345년 전이 아니라 그보다 755년 앞서는 5100년 전에 세워졌다는 학설 - 을 내세운 건 잘못이다. 한 번 전진하고, 한 번 후퇴했으니, ‘제자리걸음’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한국과 조선 공화국의 역사학자들이 판문점이나, 서울이나, 평양이나, 아니면 ‘제 3의 장소’에서 만나 단군조선에 대해 탁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이런 문제점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두 나라는 서기 1945년 이전의 역사, 그러니까 2차 대전이 끝나기 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한국인 여러분은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진전이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지만, 그건 옳은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기 때문이다. 고조선을 ‘서기전(西紀前. 나는 “기원전紀元前”이라는 말 대신 “서기전”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그 말을 써야 지금 자신이 쓰는 달력이 자신의 달력이 아니라 서양 달력임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막연하게 “달력의 사용 이전”이라는 뜻인 “기원전”이라는 말을 쓰면, 한국은 서양에 대한 정신적인 사대주의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333년에 세워진 고대국가’로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파헤쳐야 할 것이 많지만, 글이 너무 길면 여러분이 지겨워하실 테니, 이 글에서는 (그러니까 올해에는) 세 가지 문제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한국과 조선 공화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조선이 언제, 어디서 세워졌는지를 놓고 예순여덟해 동안 연구를 해 왔다. 그런데 두 나라의 학자들은 자기 자신에게 - 그리고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를 실은 역사책에게 - 정말 중요한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바로 “단군이 <왜> 서기전 2333년에 나라를 세웠지?”라는 질문이다.

 

첫 번째 단군인 왕검은 왜 서기전 2000년이나 서기전 1200년이 아니라 서기전 2333년에 나라를 세웠단 말인가? “<왜> 세습제에 바탕을 둔 고대국가가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왜> 평양이나 서울이나 공주나 부여나 전주나 익산이나 철원이나 개성이나 김해나 부산이나 경주가 아니라 요서지방에서 나라가 나타났단 말인가?” 한/조선반도와 동북 3성(만주)에서 여름지이(농사農事를 일컫는 순우리말. ‘[식물을] 여름에 짓는 일’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를 지은 지 4천년이 흐른 뒤에야 고대국가가 나타났다면, 한 사회가 나라라는 복잡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긴 세월이 걸린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정부에 간섭받기를 싫어하고 자기들끼리 지내는 걸 좋아한다는 뜻인가?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오늘날 아마존 원주민(‘인디오’라는 이름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인도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카스티야어[에스파냐의 표준어]이기 때문이다)이나 쿵산족(‘부시맨’이라는 이름은 영국인이 붙인 이름이고, ‘덤불[bush]에 사는 사람[man]’, 즉 ‘야만인’이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에 옳지 않다)이나 요(遼)나라를 세우기 전의 키타이(거란)족처럼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모두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민주주의), 지도자는 핏줄이 아니라 능력을 바탕으로 뽑지 않았던가(선출 제도)?

 

그런데 동아시아인은 왜 그런 문화를 버리고 지도자가 핏줄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제도(세습제)를 만든 걸까? 그리고 자유롭게 살던 신석기 문화의 사람들과 청동기시대 초기의 사람들은 왜 나라 바깥으로 달아나지 않고 환웅과 단군에게 굽혔을까? 왜 ‘능력을 지닌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과 따름’이 아니라 ‘신분과 집안과 재물 때문에 굽히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자 문화로 뿌리를 내렸을까?

 

두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그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래 전에 싹이 튼 나라’이자 ‘길고 오랫동안 이어진 나라’라는 것만 강조했을 뿐이다. 내가 볼 때 이런 관행은 역사학에 치명타를 입히고, 안 그래도 인기가 없고 욕을 먹는 그 학문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나는 그 때문에 역사학자와 역사학도들이 고(故) 마빈 해리스 교수(미국의 인류학자)의 이론 - 왜 ‘나라’와 ‘세습제도’가 나타나고 ‘신분’이 고정되었는지를 밝히는 이론 - 에 주목하고 김기협 선생(한국의 역사학자. 저서로『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가 있다)의 이론 - 봉건사회에서는 세습제도가 나름대로 제 작용을 하는 제도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는 이론 - 을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나는 해리스 교수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파푸아뉴기니 사람을 깎아내리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의 이론 말고 국가의 형성이나 신분제도/계급이 나타난 까닭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책을 추천한다.『작은 인간』과『식인과 제왕』을 읽어보시라).

 

지적하고 싶은 것은 또 있다. 왜 하필이면 - 32년 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문명의 요람’이라는 말을 들은 - 황토고원(중국 북부)이나 서울이나 평양이 아니라, 그리고 시베리아 남부(한 때는 한국인과 조선 공화국의 인민[人民]이 이곳에서 내려왔다는 이론이 지지를 받았다)가 아니라 남(南)몽골과 요서지방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이 싹텄단 말인가? 다른 곳에서 문명이 싹트면 안 되는가?

 

게다가 남몽골(중국 이름은 ‘내몽고內蒙古’. 그러니까 ‘네이멍구’지만, 이는 한족들이 자기 땅에서 바라보았을 때 ‘안쪽’에 있는 ‘몽고 땅’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좋은 이름이 아니다. 몽골인들은 이 땅이 ‘몽골초원의 남쪽’이므로 ‘남南 몽골’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도 그게 옳다고 여겨 남몽골이라는 이름을 쓴다)은 지금 거칠고 메마른 땅인데 어떻게 이 땅에서 6~8천년 전의 유적이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여름지이와 관련된 유적이 나온다!

 

단군조선에 매달리던 사람들은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이 두 곳에서 문명이 싹텄는지 지리학적으로 진지하게 고찰한 적이 있는가?

 

한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우리는 전혀 이동하지 않고 살아왔어.’라고 여겨서 부여나 고구려나 발해나 백제가 ‘원래 있었던 곳에서 이동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었고, 그 때문에 그 나라들보다 훨씬 전에 세워진 신불(신시神市라고 불리나, 시市와 불巿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신불’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옛 우리말로 ‘신’은 ‘큰’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풀이를 받아들인다면 ‘신불’은 ‘큰불’, 그러니까 ‘큰 벌판’이라는 뜻이 됨. 실제로 남몽골의 유적 - 단군조선 이전의 유적 - 은 대부분 넓은 벌판 위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크고 넓은 벌판에 세워진 나라가 ‘큰 벌판’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을 갖는 건 자연스럽다. 그래도 실감이 안 가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폴란드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폴스카’라고 부르는데, ‘폴Pol’은 슬라브 말로 ‘벌판/들판’이라는 뜻이고, ‘스카’는 ‘족속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로 폴란드 땅은 뫼[山]나 언덕이 거의 없는 널찍한 들판이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를 ‘벌판에서 사는 족속의 나라’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성한 저자’나 ‘신성한 시장’이라는 뜻을 지닌 ‘신시神市’는 ‘불巿’을 ‘시市’로 잘못 읽어서 생긴 이름이거나, 설령 오자가 아니라 해도 후세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 전하면서 ‘신성하다’는 뜻을 덧붙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이나 신불을 이어받은 단군조선이 한/조선반도(조선 공화국과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른다)가 아니라 남몽골과 요령성에서 세워진 나라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는 인간의 역사가 ‘이동’과 ‘정착’과 ‘정복’의 역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 나타난 일이다(동아시아로 시야를 좁혀서 보아도, 상商족의 선조나 주周족의 선조는 원래 살던 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간 뒤 새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 춘추시대의 오吳나라도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세운 왕조다.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도 마찬가지다. 석昔씨족의 선조인 탈해이사금도 그런데 왜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볼 생각을 안 한 것일까?).

 

조선 공화국도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들은 지금 평양에 수도를 두고 나라를 다스리는 조선노동당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 그리고 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이 땅에서 살았고, 따라서 우리가 정통이다.’라고 주장하려고 - 마한 초기와 고구려 말기와 서기 1949년 이후 지금까지를 빼고는 - 나라의 도읍이었던 적이 없었던 평양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주장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역사를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는 꾸지람을 들을 만한 일이다. 만약 그들이 ‘역사의 중심 무대는 이동할 수 있고, 인간집단이 중요하지 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역사관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각설하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역사학자들이 지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지정학을 바탕으로 신불(물론 나는 신불 이전에 곰을 ‘어머니 신’으로 섬기던 사람들이 만든 준準 국가가 있었고, 그것이 홍산紅山문화라고 생각한다. 신불은 환웅족이 홍산문화의 항복을 받아낸 뒤 그들과 타협하여 만든 나라다)과 단군조선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홍산문화와 신불과 단군조선이 다른 곳보다 - 예컨대 황토고원이나 황토평원보다 - 문명이 싹트기 유리한 조건을 지닌 곳이었다면, 이는 인간 하나하나의 ‘지능’ 때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 때문에 역사가 바뀌는 것임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문명국가’의 구성원이라 하더라도 그를 ‘미개한 땅’에 던져 넣으면 그 환경에 맞춰서 사느라 ‘미개인’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라 하더라도 그를 문명국가에 데려다 놓으면 문명인처럼 말하고,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에게 뛰어남과 멍청함이 따로 주어진 게 아니라 그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인간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고,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똑같음을 입증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조선의 ‘뿌리’인 신불을 세운 사람은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이하 ‘환웅’으로 부름). 그런데 그가 이 세상에 내려와 나라를 ‘세운’ 동기가 예사롭지 않다.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이것이 과연 ‘도덕적인 명분’이었을까? 좀 더 삐딱하게 볼 수는 없을까?

 

만약 환웅이 데려온 3천명이 - 몇몇 학자들의 주장대로 - ‘북쪽에서 내려온 외부인’이라면, 그들이 왜 남몽골의 북쪽(몽골초원일 수도 있고, 바이칼호 부근, 그러니까 오늘날의 부랴트 자치공화국[법적으로는 러시아의 일부지만, 원래는 몽골 땅이었음]일 수도 있고, 시베리아 남부일 수도 있다)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것일까? 정말로 ‘이상’ 때문에? 미안하지만 현실은 이상을 배반한다.

 

고대인은 자기 겨레(민족)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인간 이하’로 여겼다. 그리고 정복당해 종(노예나 노비를 일컫는 순우리말)이 된 겨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환웅이 “인간”으로 여긴 사람들은 자기가 데려온 3천 명이었지, ‘지상’으로 나오는 땅에 살던 ‘곰’과 ‘범’(원주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 물론 좋은 이념이지만 - 원래 ‘널리 환웅족을 이롭게 한다.’ 그러니까 환웅족을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하고 잘 살게 해 준다는 뜻이었지, 지구의 모든 인간들을 이롭게 한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을 ‘교화’한다는 것도 ‘정복하고 점령해서 자신의 문화를 강요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 비록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 고구려의 광개토왕 비문과 후금(청)의 비문(삼전도의 비문)이 ‘침략과 정복’을 ‘뛰어난 자가 은혜를 끼치고 교화하는 일’로 포장했기 때문이다. 백제 씨알(백성百姓을 일컫는 순우리말)의 입장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은 침략임에도 불구하고, 광개토왕 비문은 이를 “대왕(광개토왕 - 옮긴이)의 은혜가 멀리 미쳤다.”고 표현하고, 조선 씨알의 입장에서 만주족 기병대로 이루어진 후금군의 침략은 치가 떨리는 일인데도 후금이 만든 비문인 삼전도의 비문에는 한문과 만주 글자로 “은혜가 멀리 미치고 교화되었네.”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개화하지 않은 먼 옛날, 그러니까 서기전 2333년 이전에는 ‘정복과 침략’을 ‘교화’로 여기는 경향이 더 강했을 것이다.

 

(그밖에도 환웅족이나 홍산문화에 대해 할 말은 많으나, 여기서는 더 이상 자세한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다음 해에 자세히 설명하면 되니까)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일어난 것일까? 단순히 환웅족이 피와 싸움을 좋아해서 정복전쟁을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몽골족이 유라시아를 침략/정복한 것이 내부의 가난과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고 서유럽이 십자군 전쟁이나 아메리카 침략을 밀고 나간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듯이, 환웅족도 물질적인 이유로 고향인 ‘하늘나라’(실제로는 남몽골의 북쪽. 신화나 전설이나 역사에서 ‘하늘’은 ‘위쪽’, 그러니까 ‘북쪽’을 은유한 말이다)에서 떠나 ‘인간세상’인 남몽골로 내려온 것이다.

지구의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은 이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몽골초원은 40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숲이 우거지고 물이 풍부하여 여름지이를 짓고 살 수 있었으나, 지구의 축 기울기가 바뀌면서 날씨가 달라졌고, 그 때문에 많은 식물이 죽어 사람들이 여름지이를 그만두고 ‘벌판’이자 ‘풀밭’이 된 땅에서 말을 비롯한 짐승들을 길들여 유목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 황토고원과 황토평원에 있던 상(商)나라는 원래 코뿔소가 돌아다니고 코끼리가 살며 벼농사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후덥지근한 땅이었지만, 지금은 기후가 바뀌어서 - 그리고 인간들이 사냥/여름지이로 땅을 바꿔 버려서 - 전혀 다른 땅이 되었다. 서기 4세기 초에 북중국을 뒤엎고 서진(西晉) 왕조를 무너뜨린 유목민족들의 침략과 봉기도 몽골초원이 추운 땅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다. 그렇다면 환웅족이 남쪽으로 눈을 돌린 까닭도 기후변화나 환경파괴나 인구증가/내부의 갈등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어느 땅에서 인구가 많이 늘어나는데 땅은 좁고 자원이 모자라면 당연히 갈등이 일어난다. 이 때 이 갈등을 푸는 방법은 사람의 ‘수’를 줄이거나, 땅을 넓히거나, 이웃에게서 자원을 빼앗아서라도 ‘우리’쪽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다. 환웅이 ‘바깥세계’인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본 것도 ‘어디 살 만한 땅이 없을까? 아니면 정복하거나 빼앗을 땅이나!’라고 생각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면 ‘왜 인간을 이롭게 한다고 여겼느냐?’는 의문이 쉽게 풀린다. 새 땅을 정복해서 사람들에게 그 땅에서 나는 자원을 나누어주면 당연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말이 실현된다.

 

사족이지만 환웅이 “서자(庶子)”로 나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서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둘째 아들’이라는 뜻과, 벼슬 이름이라는 뜻이 있는데, 전자일 경우 이는 환웅이라고 불리게 되는 지도자가 자신의 고향에서 별로 사랑받지 못하고 큰 ‘힘’도 없었던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조선시대에 ‘첩의 아들’인 서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다들 아시리라고 여겨 설명을 생략한다). 자신의 고향에서 낮은 자리에 머무르고 별로 사랑도 받지 못한다면 길은 둘뿐이다.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자리를 빼앗던가, 아니면 포기하고 자기를 받아줄(또는 자기가 차지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던가. 환웅은 두 번째 길을 고른 듯하다.

 

환웅과 그의 무리가 ‘모험’을 하게 된 까닭이 무엇이었는가? 내가 볼 때, 가장 결정적인 까닭은 기후변화와 그 때문에 일어난 파탄이다. 원래 인간이 살 만한 땅이었던 ‘환인(桓因)의 나라(환웅의 고향)’가 너무 추워졌고(이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가 힘들다), 인구는 그 와중에도 계속 늘어 사람들이 모자라는 자원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환웅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사족이지만 환웅이 사람의 이름이라면 아마 ‘한아’, 그러니까 ‘큰 아이’나 ‘환한[훤한/밝은] 아이’나 ‘하늘의 아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환웅은 “하늘나라”에서 내려왔고 하늘나라의 신, 그러니까 “천제天帝”인 환인의 둘째 아들이었다. 또 우리 옛말로 ‘한’은 ‘크다’는 뜻이 있다. 단, 천왕天王은 어디까지나 한자가 널리 쓰이게 된 훗날 붙여진 존칭이고 실제로는 신불의 군주가 환웅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환웅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거나, - 로마의 카이사르처럼 - 원래 사람의 이름이었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군주를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한국과 조선 공화국의 역사학계는 이 가설 - 그러니까 기후변화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했다는 가설 - 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자연환경의 변화 때문에 - 그리고 ‘안’에서 ‘이익’을 두고 일어난 갈등 때문에 - 이동이나 전쟁이나 정복이 일어났다면, 앞으로는 불행한 일(예컨대 전쟁이나 난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환경을 돌보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우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에 일어났던 기후변화나 환경파괴나 인구증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미래’에 대비하고 ‘현재’를 돌보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는 학문이다.

 

끝으로 세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12년 전부터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단군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국수주의와 인종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위험한 짓이다.”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중세사와 근세사와 근대사와 현대사를 분석하는 나의 방식이 그들의 방식과 같으며, 그들처럼 성차별과 국수주의와 인종주의와 순혈주의와 (강요된) 애국심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그 주장은 제 살을 칼로 자른 뒤 살을 빼서 날씬해졌다고 우기는 짓과 같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이여, 내게 화를 내기 전에 내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나서 화를 내기 바란다. 나는 혼혈인(요즘은 ‘다문화多文化’라는 말이 욕설로 쓰여서 어쩔 수 없이 이 낱말을 쓴다)과 이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민자/난민/유학생 포함)과 제 3국 사람들에게 신불/단군조선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그리고 그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전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고?『삼국유사』와『제왕운기』를 읽어봐도, 고조선이 순혈주의를 부추기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고학 유물과 다른 나라의 역사책을 뒤져 보아도, 고조선의 역사는 ‘문명의 교류’를 증명하지 국수주의를 증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읽어보라. 뭐가 나오는가? ‘외부인’인 환웅족과 ‘토착민’인 곰족(곰을 섬기는 겨레)과 줄범족(줄범은 순우리말로 호랑虎狼이라는 뜻이다. 몸에 줄이 그어진 범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이 나온다. 환웅족은 곰족에게서 왕비를 뽑았고, 두 겨레는 혼인으로 동맹을 맺어 신불을 다스렸다. 줄범족은 왕비는 뽑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쫓겨난 것도 아니었다(“달아났다.”는 말은 없으니까).

 

또 평안도에 내려오는 야사(野史)에 따르면 그곳의 토착민은 ‘마고’라는 여신을 섬겼는데, 마고는 단군(또는 환웅)의 군사에 항복하고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 마고는 고조선의 군사들이 자신의 씨알(백성)들을 잘 대접해 주는 것을 보고 감격해서 스스로 나아가 항복했다고 하는데, 이는 고조선의 확장과 지배가 단순히 군사력에만 달린 게 아니라 정복당한 사람들 - 또는 새로 백성이 된 외부인들 - 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는 뜻이다.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동부여는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따르면 - 황금 두꺼비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다고 하는데, 이는 동부여 사람들이 두꺼비를 모시는 겨레로서 단군조선에 항복했음을 암시한다.

 

『제왕운기』에 나오는 단군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하늘에서 ‘신단수’라는 나무 아래에 내려온 환웅이 자기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뒤 “박달나무(한자로는 단수檀樹)의 신(神)과 짝지워 주어 아들을 낳게 하자” 그 아들이 단군이 되었다고 한다. 환웅족은 박달나무를 섬기는 겨레와도 연합해서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이 사료들을 그대로 따를 경우 고조선은 ‘깨끗한(?) 핏줄만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겨레와 핏줄이 섞여서 이루어진 나라’고 ‘지배층이 토착민의 도움을 받아 꾸려나간 나라’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사회는 다른 사회나 공동체나 나라나 겨레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다. 따라서 열린 마음으로 다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이 신불과 고조선의 역사를 뿌리쳐야 할 까닭이 없다. 자신들의 주장과 맞아떨어지는 역사인데 왜 그래야 하겠는가?

 

(실제로 다른 겨레나 무리와 만나 서로 섞이는 건 그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은 그 발상지인 이란 남서부의 문화만 고집한 게 아니라 여러 나라, 여러 겨레의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키워 주었기 때문에 번영했고, 로마는 정복전쟁이나 연합을 통해 낯선 것을 자주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 왕조나 아바스 왕조도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東로마와 바라트[인도]의 유산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번영했고 당나라도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찬란한 문화를 남기고 주위의 여러 나라에 자신의 장점을 전할 수 있었다)

 

또 한국의 역사교육이 국수주의로 흐르는 게 걱정되면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유물과 제 3국(예컨대 중국)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조선과 주변의 교류(내지는 무역)를 강조하면 된다.

 

예컨대 고조선과 하(夏)/상(商)나라의 관계라던지(갑골문이 고조선으로도 건너갔는지 연구해서 이를 교과서에 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서주(西周)와 고조선의 무역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고(古)아시아인이자 만주족(오늘날에는 ‘만족滿族’으로 불린다)의 선조인 숙신족과 서주의 무역에 단군조선이 어떤 식으로 관여하였는지, 한/조선반도의 원주민(김상훈 교수는 3년 전 이들을 ‘원原 한국인’으로 부르자고 제안했고, 나도 김 교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과 단군조선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는지를 밝히면, 그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먼 옛날부터 서로 교류하고 배우고 가르치면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국수주의나 인종주의가 아니라 ‘문명의 교류(정수일 전前 교수가 강조하는 개념)’나 ‘문명간의 대화(하타미 전前 이란 대통령이 만든 개념)’나 “문명의 공존(독일 백인 지식인인 하랄트 뮐러 교수가 주장한 개념)”이 중요함을 익히게 될 것이다.

 

나아가 북중국의 왕조인 상(商)나라는 예전에 산동성과 강소성의 원주민들(모두 한족은 아님)이 만든 글자들을 바탕으로 갑골문을 만들었는데, 단군조선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를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면, 한 인간 집단이 문명을 먼저 만들어냈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방면에서 다 뛰어난 것은 아니고, 때로는 나중에 나타난 문명이 옛 문명이 만들어내지 못한 뛰어난 것을 만들어 옛 문명을 앞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문명은 수메르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뛰어난 글자인 소리글자는 그보다 훨씬 뒤에 나타난 문명인 페니키아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헬라스보다 나중에 나타난 문명인 로마는 헬라스가 풀지 못한 문제인 상하수도 건설이나 도로 건설을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법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가 먼저 만들었지만, 인권선언은 그보다 훨씬 나중에 나타난 아케메네스 제국, 그러니까 페르시아가 만들었다).

 

또한 나중에 나타난 문명이 처음 나타난 문명보다 세질 수 있고, 그리하여 나라와 겨레의 운명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진보주의자들이여, 참된 ‘평등’을 바란다면 고대사를 외면하거나 버리지 말라. 여러분은 오히려 보수파나 수구세력보다 더 치밀하게 고대사를 파헤쳐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전부다.

 

(사족이지만, 나는 올메카를 연구하는 중앙아메리카 국가의 학자나, 잉카 이전의 역사를 연구하는 페루 학자나, 인더스를 연구하는 파키스탄 - 또는 바라트 - 학자나, 수메르를 연구하는 이라크 학자나, 누비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수단 학자나, 케메트[이집트의 옛 이름. ‘검은 땅’이라는 뜻이다. ‘이집트’는 헬라스 말인 ‘아이깁토스’에서 온 이름이다]를 연구하는 미스르[아랍 무슬림들은 이집트를 ‘미스르’라고 부른다] 학자나, 페니키아인을 연구하는 레바논 학자나, 진秦나라가 사천四川분지를 정복하기 전의 촉蜀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 학자나, 초楚나라의 뿌리인 듯한 장강長江 문명을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나, 아케메네스 제국 이전의 이란 역사를 연구하는 이란 학자나, 히타이트 제국 이전의 아나톨리아 - 소小아시아라고도 한다 -에서 꽃핀 문화와 문명을 연구하는 - 또는 괵튀르크[돌궐] 제국이나 훈누[흉노] 제국을 연구하는 - 튀르키예[터키의 정식 국호] 학자나, 베트남 최초의 고대국가인 반랑 왕조를 연구하는 베트남 학자를 고조선 연구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관점’이 우리가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실을 알게 도와줄 것이며, 그들이 이룬 연구결과를 우리 고대사에 적용하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느끼는 ‘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제 3자, 그것도 이해관계가 겹치지 않고 나와 별 상관이 없지만 나를 이해할 만한 경험을 쌓은 사람이 나를 보고, 내 말을 듣고, 나에 대해 느낀 것까지 알아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정확한 고증을 거쳐 단군의 영정을 그려야 한다.’거나 ‘신불과 단군조선의 사회 성격이 궁금하다.’처럼,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너무 많은데 ….” 이쯤에서 글을 매듭지어야 하는 것이 아쉬운 어설픈 역사학도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