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불편하지도, 눈물도 없는 '장애인 영화'의 힘

개마두리 2012. 4. 8. 13:58

 

- [학생 리뷰] 영화 ‘달팽이의 별’, 어느 지구인보다 더 지구인 같은 그들

 

- 임지은(성공회대 사회과학부 학생) angela414@paran.com

 

‘달팽이의 별’을 두 번째 보았다. 한번은 지금 상영 중인 개봉관 대학로의 한 멀티플렉스에서. 또 한 번은 일 년 하고도 반년 전 상암 영상자료원에서. 그 당시 영화는 보고 싶고, 돈은 없고, 작은 모니터는 싫었던 나에게 좋은 영화들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영상자료원은 흥미로운 장소였다. 그렇게 영상자료원을 매주 기웃거리다가 ‘달팽이의 별’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때 이 영화를 만든 이승준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그냥 나와 버린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에 영화를 다시 한 번 볼 때 그 감회가 남달랐다. 그때 진 마음의 빚을 덜어내는 기분이랄까….

 

또 다른 점이 있었다. 그때보다 3배정도 많은 관객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3배라고 해봤자 당시 영상자료원에 5명의 관객이 있었으니 상영관의 썰렁한 공기는 비슷했다.

 

상업영화에 익숙해져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의 소재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표를 끊고 영화를 기다리는데 우연히 20대 중·후반쯤 보이는 여자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A : 달팽이의 별 저거 감동적 이래.

B : 무슨 내용인데?

A : 장애인부부 사랑이야기?

B : 아~

 

대체 그 여자는 단 열 글자를 듣고 무엇을 알게 되었기에 “아~” 라고 했을까? 그녀의 표정을 빌어 비약하자면, ‘장애인 다큐멘터리 영화? 아, 저녁시간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성우의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안타까운 사연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이야기? 우리 엄마가 눈물 콧물 흘리며 보던 슬프고 아름다운 장애인부부의 사랑이야기? 아~’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영화는 시청각장애인 성찬씨와 척추장애를 가진 순호씨, 장애인 부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TV를 시청하던 엄마처럼 훌쩍이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왜일까?

 

오감으로 소통하는 우주인

 

영화는 두 부부의 일상적인 모습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보여준다. 밥을 먹고, 형광등을 갈고, 운동을 하며, 공부를 하고, 친구를 만난다. 이들은 불편해보이거나 안타까워 보이지 않는다. 단지 조금 느려 보인다.두 사람이 형광등을 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론 그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성찬씨가 손끝으로 형광등과 그 주변 하나하나를 수 없이 만져 보는 것 이다. 순호씨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형광등을 갈기에 성찬씨의 열 손가락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성찬씨는 형광등을 갈기 위해 단지 손끝의 촉각만이 아니라 오감을 이용해 형광등의 크기, 두께, 형광등을 끼울 홈의 위치, 철판과 철심이 벌어진 정도를 인지한다. 그 모습은 마치 달팽이가 목적지를 도달하기 위해 느릿느릿 하게 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조금은 느려 보이는 그 시간이 있기에 두 사람은 형광등을 갈고 이야기 한다.

 

“성공했어!”

 

형광등은 한 번에 바로 켜지지 않고 깜박깜박 거리며 뜸을 들이지만, 이내 어떤 전구 보다 환하고 오래가는 빛을 만들어 낸다. 그런 점에서 형광등과 그들 부부는 닮았다.

 

성찬씨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나무를 안고 있는 것이다. 남들은 나무를 보지만 성찬씨는 나무와 데이트 한다. 몸으로 나무를 안고, 손으로 나무를 만지고, 얼굴을 나무에 맞대고 있는 모습은 그 어떤 사랑하는 사이보다 밀착되어 보이고 은밀해 보이기까지 하다. 만약 하늘에서 UFO가 떨어져 우주인이 걸어와 나무와 이야기 한다면 그런 모습일까? 성찬씨와 나무는 생명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소통을 해 보인다. 그 소통과정에는 순호씨가 있다. 둘은 서로 돕고 돕는 도우미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감각기관으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은 온전한 감각 모두를 가지고 있음에도 죽을 때까지 그 감각들을 써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독한 최면에 걸려서 한 감각만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다.

 

자신이 본 것이 전부라 믿는 사람, 자신의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 이에 해당된다. 어쩌면 성찬씨는 영화에서 내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감각을 사용하며 살아가는가?’

 

부재에서 충만함으로.

 

그들에게 남들보다 많은 것은 부재이다. 시력의 부재. 청력의 부재. 온전한 척추의 부재. 하지만 그런 부재 때문일까. 그들은 세상에 아주 사소한 것들로 부터 위로받고 위로한다. 성찬씨에게서 툭툭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충만함 그 자체이다.

 

어느 날 성찬씨가 만든 찰흙모형을 보고 장애학교에서 만난 동생이 질문을 했다. 요강에다 오줌 누는 남자를 왜 만들었느냐고. 성찬씨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처음에 요강을 만들었어. 그러면 그 요강을 쓰게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래서 오줌 누는 남자를 만들었어.”

 

또 한 번은 순호씨와 성찬씨가 기차를 탔을 때의 일이다. 성찬씨가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어둠을 느끼고 질문을 하자 순호씨가 터널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그 후로 몇 번의 터널을 지나가면서 성찬씨는 말했다.

 

“구멍이 많이 뚫려서 산들이 옆구리가 허전하겠다.”

 

세상에 터널로 인해 시린 산의 옆구리와 분비물이나 받는 냄새나는 요강단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는 산의 옆구리와, 요강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껴안는다.

 

지구인 ≦ 우주인

 

영화에서 그들은 소수자가 아닌, 찾아보기 쉬운 다수 중 한명으로 보인다. 결혼을 하지 못한 동생에게 부러우면 너도 어서 하라고 우쭐 대기도 하고, 공모전에 합격되지 않아 실망하기도 하고, 서로가 떨어져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고,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이 절대 어느 경지에 이르러 해탈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 이다. 만약 이 영화에서 그들이 성인(聖人)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거부감이 들고 멀게만 느껴졌을 수 있다. 그들은 ‘해탈’ 대신 ‘인정’ 했다.

 

우주인은 지구에서 살기 힘들 수 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우주의 만물과 교감한다. 서로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연습한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인정하고, 그 느낌이 어떤지 흙에 묻혀 보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은 오히려 지구인들보다 지구인 같아 보인다.

 

많은 장애인 다큐멘터리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불편하다. 그 이유는 화면에서 그들이 불편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보다 불편하게 보여서,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데 나보다 더 열심히 꿋꿋하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간다. ‘나보다 열등한 존재가 나보다 더 잘살아간다.’ 그래서 불편하다. 하기 싫은 자기반성도 해야 한다.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 영화 ‘달팽이의 별’. 불편하지 않다. 눈물 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입력 : 201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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