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동북관]에 대한 논평

개마두리 2012. 4. 9. 20:37

 

*이 글의 제목은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동북관>에 대한 논평'이다. 고문헌은 옛 책이나 옛 기록을 가리키는 말이고, '동북(東北)'은 중국이 만주에 붙인 이름이다(중국 문명의 중심지인 낙양/장안이나 중국의 중세시대부터 사실상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였던 남경南京에서 만주를 바라보면 '동북쪽에 있는 땅'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만주라는 이름이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만주라는 이름 대신 동북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바라보면 길림성/흑룡강성/요령성은 '동북쪽 땅'이 아니라 '북쪽 땅'이나 '서북쪽 땅'이므로, 한국인이 '동북'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관’은 ‘관념’이나 ‘인식’을 뜻한다. 나는 이 글을 대학원에 다니던 때(대략 4년 전) 논문을 읽고 나서 썼는데, 비록 뛰어난 글은 아니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곳에 올린다 : 잉걸

 

이성규 교수님은『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 연구의 방향』에 실린 이 논문(「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동북관」에서 "주변 민족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이 "중국인의 전통적인 천하관天下觀"과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의해 "진상이 크게 왜곡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분은 "이 기록들은 자체의 기록을 갖지 못했던 주변 민족들의 초기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로서 이용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주변 민족들이 독자적인 사서史書를 편찬할 때도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이것이 다시 중국 측에 전달되어 그 왜곡을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형성된 전통적인 '동북관東北觀'이 현재까지 은연중 계승되고 있는 예도 드물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주변 민족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이 "자체의 기록을 갖지 못했던 주변 민족들의 초기 역사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로서 이용"되어야 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 민족들이 독자적인 사서史書를 편찬할 때도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는 설명에는 아무런 보충 설명이나 각주도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내 생각이 옳다면 아마 고려의 김부식이『삼국사기』를 쓸 때『자치통감』을 비롯한 중국 기록을 많이 인용한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인데, 그런 사실을 예로 들지 않고 단지 간단한 설명만 한 것은 글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이 교수님은 중국의 "주변 민족들"이 만든 "독자적인 사서史書"가 "다시 중국 측에 전달되어 그 왜곡을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실례를 (각주 형식으로라도) 소개하지 않은 점도 독자가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아쉽다.

 

물론 중국의 "전통적인 '동북관東北觀'이 현재까지 은연중 계승되고 있는 예"로 "현대 중국이 중국사의 범위를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로 설정"한 사실을 든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내버려둘 경우 "한국사란 중국에 동화 ․ 흡수된 중국 소수 민족 중 흡수되지 않은 지류사支流史이며, 따라서 '중화문명'에 참여하지 못해 야만 또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집단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관점도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염려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위지魏志』동이전 이래 줄곧 동이로 분류되었던 왜倭(그러니까 오늘날의 일본)"를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아쉽고, 이 부분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했다고 생각함을 밝힌다.

 

그리고 논문의 25쪽에 나오는 "중국이 설명하는 '동이' 발전의 동력과 배경을 검토해 보면, 이상과 같은 적극적인 평가는 단순히 '동이'의 발전을 객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동일한 문명권의 주체적이고 대등한 성원으로 인정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같은 논문의 27쪽에 인용한 "중앙을 토라고 한다"는『관자管子』의 구절과 "오행이 교대로 (계절의) 왕이 되지만 역시 토가 있어야 한다."는『백호통』의 구절을 볼 때 합리적인 견해인 듯하다.

 

단, "조선열전 역시 주변 국가의 건설에 중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의 일환으로 서술된 것으로 해석된다"는 견해는, 위만조선의 건국 자체가 중국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일 수도 있으므로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하며, 비록 "중국의 교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기록 안에 담겨진 메시지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안에 사실(史實)이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에 기록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물론 중국 역사서의 동이전 기사들이 "동래東來 중국인의 공헌을 강조한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중국 사서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동질성을 강조"하고 그들의 "동원관계"를 주장한 것이 "중국이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삼국의 사신이 직접 전한 정보(예컨대 백제 개로왕이 보낸 국서의 내용)와 중국 사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동이전」을 썼을 것이고, 따라서 삼국의 "동질성"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삼한과 삼국의 등치는 삼한을 고군의 일부로 편입함으로써 그에 대한 신속권을 주장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고, "삼국을 통합 또는 부분적으로 계승한 어떤 세력도 한반도 남부의 구舊 삼한三韓 지역을 제외한 구삼국舊三國의 영토, 특히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봉쇄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로 보인다. 당나라 사람인 두우杜佑의『통전通典』은 "발해란 국명도 그 건국 과정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이른바 '통일전쟁'에서 신라의 역할은 일언반구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구당서舊唐書』가 "흑수말갈과 발해말갈을 모두 북적北狄으로 분류"함으로써 "신라와 당唐이 모두 점거하지 못한 고구려 고지를 '동이 예맥계'가 계승했다는 주장을 원천 봉쇄한 것이 분명하다"면, 이 두 가지 사례는 역사의 고의적인 왜곡임이 분명하므로 (당나라가 망한 뒤 후진後晋에서 펴낸『구당서舊唐書』에서 백제의 멸망을 "당군과 신라의 연합 작전으로 명기하고 백제전이 백제의 부흥운동 진압에 합동한 신라군의 분투를 여러 번 전하는 한편 이후 신라가 점차 백제와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명기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는 당나라의 사관들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적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중국 측이 원하지 않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보다 근원적으로 말소"하려는 시도였으며 "'삼국의 통일'을 한반도 안의 사건으로 국한"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史實)과 상관없이 중국 사관들의 곡필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결코 최근에 와서 튀어나온 새로운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중국 사관들이 "'성인은 중국에서만 있을 수 있고, 성인의 교화를 통해서만 인성人性이 완성된다'는 화이론적성인론華夷論的聖人論으로 '동이'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것"과 "예교화禮敎化된 '동이'는 당연히 중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중국의 '동북'에 "중국의 농경사회를 통치하는 군현지배郡縣支配"를 실시하려는 현실적인 욕망(영토에 대한 욕심)에 입각해서 역사서를 쓸 때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왜곡이나 삭제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따라서 "역대 사서"에 나타난 "이민족에 대한 일정한 관념"과 '사실史實'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것을 읽을 때는 "'동이'의 통제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인이 구축한 "동북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이런 왜곡은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이후 당은 내신지번內臣之番으로 고려 조선왕과 백제 대방왕을 봉해 제국의 영역 내에 거주시킨 것"이 "고구려와 백제를 당이 멸망, 병합한 것을 선언한 정치적 선전"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서史書의 필법과 실제 정책이 동일한 목표 아래 표리를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사서의 왜곡은 왜곡 그 자체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 정치에 '명분'을 제공하므로 결코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물론 나는 중국 역사서가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사실을 왜곡했으며, 그것이 현실적인 필요성과 관념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 역사서의 동이전에 나오는 사실(史實) 그 자체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교수님이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편찬 과정에 참여한『진서晉書』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을 "고구려와 백제의 존재를 말살하겠다는 태종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진서』에 신라도 나오지 않는데, 신라를 멸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신라와 손을 잡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의 의의는 동북공정의 뿌리가 단순히 지금의 중국 영토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학문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화이사상과 영토 확장/동이에 대한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중국 전통 왕조의 역사 서술 태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것은 단순한 왜곡에 그치지 않고 현실 정치에 명분을 제공하여 전쟁을 합리화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서에 쓰여진 사실(史實)까지 모두 그러한 관념이 꾸며낸 거짓이라고 보는 것 - 그리하여 모든 중국 사서에 쓰여진 사실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 - 은 잘못이며, 역사관은 역사관대로 비판하되 사실은 사실대로 참고하여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