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159

장마를 견디며

물소 떼가 지붕 위를 지나간다. 모기의 목소리 어제보다 낭랑해지고 나는 B형의 그리움을 벽에 피칠하며 어설픈 잠결에 불안해한다. 당신은 흔들리는 무덤 같아요, 라고 적어 보냈던 편지 쓰지도 않고 썼다고 우기면 내 마음 관보다 더 깊어져 방 안 가득 곰팡이꽃 피어오르지만 나는 목침을 베고 누워 자욱한 물안개까지만 생각하기로 하고 비 오는 시절의 주소를 모두 잊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가지부터 가슴까지 수수깡처럼 꺾이는 나라에 살았던 경력이 있는 법이다. 부끄러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심야일기예보로 다가오는 밤 1시의 태풍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탱크가 짓이긴 폐허 위에도 홍등의 거리가 다시 세워지듯이 나는 믿는다. 저 물소들 밟고 지나가는 마음 한켠에서부터 이미 벽돌 한 장, 한 장, 새로운 도시가 올..

시(詩) 2021.07.07

침시

▶ 침시(沈柹) : 가라앉은(沈) 감(柹). 소금물에 담가서(가라앉혀서) 떫은맛을 없앤 감을 일컫는 말이다. ‘ 침감 ’으로도 부른다. ===================================================== 풋감 넣은 항아리에 소금물을 붓는다 코끝을 자극하는 풋내 나는 떫은 몸 어머니 손맛을 채워 감칠맛이 돋는다 제맛을 찾는 길은 짜고 시린 눈물 길 설익은 맛 뱉어내는 아린 시간 보듬을 때 아랫목 생감 항아리 벗겨지는 내 고집 - ‘ 박진형 ’ 시인의 시

시(詩) 2021.05.29

그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

- 킴루(Cymru) 시인의 시 ♣ 킴루 : 흔히 ‘ 웨일스 ’ 로 불리는 지역의 이름. 정확한 발음은 ‘ 컴ri ’ 다. ‘ 킴루 ’ 는 원주민인 켈트인이 붙인 이름이고, ‘ 웨일스 ’ 는 중세시대에 앵글로 색슨족인 잉글랜드인이 붙인 이름이며, 중세 영어로 ‘ 이방인 ’ 이라는 뜻이다. 이곳 사람들은 로마에 점령당하기 오래전부터 살았던 켈트인과, 고대 말/중세 초에 앵글족/색슨족/주트족(모두 덴마크 남부와 독일 북부에 살던 게르만인이다. 이들이 잉글랜드 백인의 조상이다)을 피해 달아난 브리튼인(로마 문명을 받아들였던 브리타니아의 켈트인들)이 섞여서 이루어진 사람들이다. (비록 법적으로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고, 영어를 쓰기는 하지만) 이곳은 켈트 말의 한 갈래인 킴루 말을 되살리려는 운동이 지속되고 ..

시(詩) 2021.03.31

꽃처럼

언제 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돌아보면 문득 피어 있다 절벽에서도 눈얼음 속에서도 때가 되면 꼭 핀다 깊은 숲속이나 제왕의 수반(水盤)에서도 그저 타고난 모습으로 핀다 피어있는 동안 타인(他人)이 환하다 오로지 그러다가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열매가 생긴다 꽃은 모르는 열매가 생긴다 * 수반(水盤) : 사기나 쇠붙이로 만든, 바닥이 평평하고 운두가 낮은 그릇. 물을 담아 꽃을 꽂거나 수석[壽石] 따위를 넣어둔다. - ‘ 박진규 ’ 시인의 시

시(詩) 2020.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