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군서치요 』 : ‘많은(群) 책(書)에서 다스림(治)의 중요한 내용(要)들을 뽑은 책’이라는 뜻. (무주[武周] 왕조 이전인) 제1 당 왕조 때 이세민(시호 ‘당 태종’)의 명으로 편집된 책이다. “8만 9천여 권의 고적(옛 책 – 인용자 개마두리. 아래 ‘인용자’)”에서 고르고 뽑아낸 “역대 제왕의 치국(나라를 다스림 – 옮긴이)과 국정운영 사료”를 정리한 책이며, 유교의 6경뿐 아니라 역사서와 제자백가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관련된 핵심내용을 발췌”하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 군서치요 』 에 수록되어 있는 일부 원저가 오대(五代. 5대 10국 시대) 이후에 이미 실전되어 오직 『 군서치요 』 에만 그 핵심내용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진귀한 보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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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의 『 자치통감 』 과 비교해보더라도 이 책( 『 군서치요 』 - 인용자 )이 치세에 관한 훨씬 폭넓고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보전( 寶典. ‘보배[寶]같은 책[典]’ → 귀중한 책 : 옮긴이 )인데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 무렵에는 조판인쇄술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탓에 송 왕조 초기에 이미 실전(失傳. 묘지/고적/내력 같은 전해져 오던 사실이 알 수 없게 됨 – 인용자)되었기 때문으로, 『 송사(宋史) 』 에도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 책이 견당사(遣唐使)에 의해 일본에 전해지고, 그로부터 일본 역대 천황 및 황자와 대신들의 정치 규범이 되었고, 나아가 일본인이 중국문화를 학습하는 데 중요한 전적(典籍 : 책 – 인용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 군서치요 』 는 (서기 – 인용자) 13세기에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가마쿠라 시대(1192 ~ 1333년)에 일본인이 필사한 『 군서치요 』 전질이 가나자와 문고(金澤文庫[금택문고 – 인용자])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럼으로써 이 책이 세상에 전파될 수 있었다.
그 뒤 청 왕조 건륭 60년에 일본인이 이 책을 중국(사실은 청나라. 청나라는 ‘중국 왕조’가 아니라 제하[諸夏]를 점령하고 지배한 이민족의 나라다 – 인용자)에 전해왔다. 상하이(상해[上海] - 인용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사부총간(四部總刊)과 타이완(대만 – 인용자)에서 각각 이 판본을 바탕으로 영인(影印. ‘모습[影]을 찍음[印]’ → 책 따위의 내용을 복제하여 인쇄하는 일 : 인용자)하여 출판하였다.”
- 샤오샹젠, 『 군서치요 – 3천년 리더십의 집대성 』, 7 ~ 8쪽
“다이쇼 시대(서기 1912 ~ 1928년 : 인용자)의 서지학자 ‘시마다 간(島田翰[도전 한])’이 쓴 『 고문구서고(古文舊書考) 』 에 따르면, ‘ 『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 의 기록에는 < 닌묘(仁明[인명 – 인용자]) 천황 조와(承和[승화. 당시 일본의 연호 – 인용자]) 5년(서기 838년)에 천황이 세이료덴(淸凉殿[청량전 – 인용자])(헤이안 시대 중기의 천황 거처 – 인용자)으로 가서 조쿄(助敎[조교 – 인용자]. 당시의 관직명[벼슬 이름 – 인용자]) 직도숙칭녜광공(直道宿稱禰廣公)에게 『 군서치요 』 를 읽도록 하였다 >.’고 되어 있다.
『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 에는 ‘세이와(淸和[청화 – 인용자]) 천황 조간(貞觀[정관 – 인용자]. 당시의 연호 – 인용자) 17년(서기 875년) 4월에 천황이 『 군서치요 』 를 읽었다.’는 언급이 있다.
이로 보아 『 군서치요 』 는 당 문종(文宗) 때 이미 일본에 전해졌으며, 당 희종(僖宗) 때에도 일본의 세이와 천황이 여전히 <대신들과 함께 읽고 연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증에 따르면, 일본의 가겐(嘉元[가원. 일본의 연호 – 인용자]) 4년(서기 1305년) 2월 18일에 『 군서치요 』 는 <우다이벤(右大辨[우대변 – 인용자]. 당시의 관직명) 참의경웅경(參議經雄卿)이 본서에 구두점을 찍고 교감을 끝냈다.>고 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볼 때, 『 군서치요 』 가 일본에 전해진 뒤 줄곧 일본 천황들이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 ‘하야신 긴보(林錦峯[임 금봉 – 인용자])’는 『 군서치요 』 덴메이본(天明本[천명본 – 인용자])의 교정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왕조가 조와/조간 연간에 태평하고 안락한 성세(盛世. 한창 융성한 세대 – 인용자)를 이룬 것은 이 책의 힘을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말은 일본 (헤이안 시대에 해당하는 – 인용자) 조와/조간 연간 (서기 834 ~ 876년)에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이룬 성세 국면이 열린 것은 『 군서치요 』 의 힘을 빌린 성취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일본 오와리쿠니(尾張國[미장국 – 인용자]) 한코(藩校[번교 – 인용자]) 도쿠가쿠(督學[독학 – 인용자]. 학장)를 지낸 ‘호소이 헤이슈(細井平洲[세정 평주 – 인용자])’가 덴메이 5년에 『 군서치요 』 를 간행할 때 쓴 고례(考例)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가마쿠라 막부의 제5대 쇼군 ‘호조 사네토키(北條實時[북조 실시 – 인용자]. <가나자와 사네토키[金澤實時(금택 실시 – 인용자)]>라고도 함)’는 ‘서적 모으기를 좋아해서(好居書籍)’, 『 군서치요 』를 발견하고는 중비서(中祕書. 문서와 사무를 맡아보는 벼슬 이름 – 인용자)에게 ‘가나자와 문고에 소장한다.’고 기록하도록 했으며, 이로써 『 군서치요 』 는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 – 인용자])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는 이 책을 얻은 뒤 1616년 정월에 활자본으로 인쇄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의 『 군서치요 』 는 이미 제4권/제13권/제20권을 잃어버리고 47권만 남아 있었다.
반년 뒤에 『 군서치요 』 51질이 인쇄되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무렵에 이에야스가 돌연 사망했으며, 인쇄본은 이에야스의 후예인 오와리(尾張[미장 – 인용자])/기슈(紀州) 두 번주(藩主. 서양으로 치면 ‘영주’ - 인용자)에게만 전해졌다. 사실상 공공연히 발행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으며, 그래서 외부로 퍼진 것도 많지 않았다.
1781년에 오와리 번주 가문(집안 – 인용자)의 다이나곤(大納言[대납언. 벼슬 이름 – 인용자]) ‘무네치카(宗睦[종목 – 인용자])’는 『 군서치요 』 가 유포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후잔 관고(楓山官庫[풍산 관고 – 인용자])에서 원래 ‘가나자와 문고’에 소장되어 있던 승려 필사본 『 군서치요 』 를 빌려와 새롭게 교간(校刊)하였다. 1798년에 중인본(重印本)이 완성되자, (그는 이것을 – 인용자) 여러 번주와 측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에 전해진 덴메이본(天明本[천명본 – 인용자]) 『 군서치요 』 이다.
일본의 간세이(寬政[관정. 일본의 연호 – 인용자]) 8년(서기 1796년)에 오와리 번주 가문은 이 책이 이미 중국에서는 실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섯 부를 나가사키 세관의 책임자인 ‘곤도 주조(近藤 重藏[근등 중장 – 인용자])’에게 보내어 중국(사실은 청나라 – 인용자)에 전달하도록 맡겼다. 주조는 한 부는 나가사키 성당에 보관하고, 한 부는 ‘스와’ 신사에 증정했으며, 세 부는 중국계 상관(商館)에 증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중국인(명나라의 유민인 ‘한족[漢族]’들 – 인용자) 상인들이 이를 지니고 귀국함에 따라, 『 군서치요 』 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로 중국에 들여온 덴메이본 『 군서치요 』 는 세 질뿐이었다. 왕충민(王重民[왕중민 – 인용자])의 『 중국선본서제요(中國善本書提要) 』 의 기록에 근거하면, 이 책의 원본은 25책으로, 가로 18.2㎝, 세로 31㎝이다.
청 가경(嘉慶) 7년(서기 1802년)에 ‘포정박(鮑廷博)’은 『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 』 를 편찬했는데, 제21집 『 효경정주서(孝經鄭注序) 』 에서 『 군서치요 』 에 관해 ‘이 책은 오래전에 실전되었으며, 오직 일본 덴메이 간본만 보인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덴메이 본 『 군서치요 』 가 이미 중국(청나라 – 인용자)의 장서가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완원(阮元)이 편집한 『 완위별장(宛委別藏) 』 에도 『 군서치요 』 에 관한 내용을 편성하여 삽입시키고 있는데, 그 제(題)에 ‘ 『 군서치요 』 50권은 권4, 권13, 권20이 결락(缺落)되어 있다(빠져 있다 – 인용자). 당의 위징 등이 편찬했으며, 일본 덴메이 간본이다. ’ 라고 되어 있다.
그뒤 『 연균이총서(連筠移叢書) 』, 『 월아당총서(粤雅堂叢書) 』 등에서 『 완위별장 』 을 저본(底本. 번역이나 저술을 할 때, 그 바탕이 되는 책 – 인용자)으로 하여 영인 출판하였다. 함분루(涵芬樓)에서도 『 완위별장 』 을 저본으로 해서 『 군서치요 』 를 영인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백년 가까이 중화 전통의 성철(聖哲. ‘성인[聖]과 철인[哲]’ → 모든 일에 통달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 : 인용자) [을 만들어 내는 – 인용자] 교육이 쇠락하면서, 『 군서치요 』 는 다만 학자들이 고서적을 교감하고 수집하여 편찬하는 데 참고하는 용도로만 쓰였을 뿐, 아는 이도 극히 적어 그 경세치국(經世治國. 세상[世]과 나라[國]를 다스림[經/治] - 인용자)의 큰 쓰임새가 줄곧 발현되지 못했던 것이 실로 유감스럽다.
1990년대에 이르러, 주일 중국대사였던 ‘푸하오(符浩[부호 – 인용자])’가 일본 황실의 구성원을 통해 덴메이판 『 군서치요 』 한 질을 구했고, 이를 ‘뤼샤오쭈(呂效祖[여효조 – 인용자])’가 교감하고 구두점을 찍어, 2004년 『 군서치요 』 표점교감본을 출판했다.
전 중공 중앙서기처 서기이자 국무원 부총리 ‘시중쉰(習仲勛[습중훈 – 인용자])’(시진핑[習近平<습근평 – 인용자>] 현 주석의 부친)은 2001년 2월 25일, 이 책에 ‘과거를 거울삼아 오늘을 비추다.’라는 뜻의 ‘고경금감(古鏡今鑑)’이라는 제사(題詞.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련되는 노래/시 따위로 적은 글 – 인용자)를 남겼다.
2011년에는 원문을 백화문(‘한어[漢語]’를 구어 그대로 쓴 글 – 인용자)으로 번역한(옮긴 – 인용자) 『 군서치요고역(群書治要考譯) 』 (뤼샤오쭈/자오바오위[趙寶玉<조보옥 – 인용자>]등 주편[主編. 편집을 주관하다/책임 편집하다 – 인용자])이 출판되었으며, 2012년에는 중국서점이 온전하게 주를 달고 번역한 『 군서치요 』 를 출판하면서 원래 망실되었던 세 권을 보충하여 수록하였다.
이에 이르러 『 군서치요 』 는 다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중국의 지도급 간부와 전문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목을 받고 있다.”
- 샤오샹젠, 『 군서치요 – 3천년 리더십의 집대성 』, 24 ~ 27쪽
- 이상 『 군서치요 – 3천년 리더십의 집대성 』 (‘샤오샹젠’ 풀어엮음, ‘김성동/조경희’ 옮김, ‘(주)교유당’ 펴냄, 서기 2014년)에서 발췌
▣ 인용자(개마두리)의 말 :
내가 이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까닭은, 『 군서치요 』 라는 고전을 소개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소개하며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책이나 고전은 그것을 만들어낸 나라에서는 사라지더라도, 그것이 전해진 나라, 또는 다른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다면 우리도 책 이름만 전해지는 우리 옛 책들을 다른 나라 박물관의 수장고에서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 군서치요 』 가 본고장인 제하(諸夏)에서는 사라졌지만, 그 책이 전해진 다른 나라,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고, 근세에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사람들이 일본에 남아 있던 『 군서치요 』를 인쇄/복사해서 청나라에 전해주었으며, 서른 해 전에는 주일 중국대사가 일본 왕실의 왕족을 통해 『 군서치요 』 를 얻어 그것을 바탕으로 제하에 다시 『 군서치요 』 가 알려질 수 있게 해 주었듯이,
한국인들도 『 유기(留記) 』 나 『 서기(書記) 』 나 『 국사(國史) 』 나 『 조대기(朝代記) 』 나 『 신지비사(神誌祕詞) 』 같은 배달민족의 옛 책들을 한국이 아니라 제하(諸夏)나 일본의 도서관에서(또는 옛 책을 다룬 서점이나 일본 왕실 도서관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곳에서 책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찾아낸 책들을 국역/인쇄/출판하고 그것들을 한국과 온누리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지금이라도 그 일을 시도하고 실천해야 한다!
- 단기 4357년 음력 10월 9일에, 개마두리가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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